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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그친지 여러날이 되었지만 봄이 될 때까지 눈을 이고 있을 지붕들이다.
눈 그친지 여러날이 되었지만 봄이 될 때까지 눈을 이고 있을 지붕들이다. ⓒ 전희식
이런 일을 가지고 그를 ‘물건’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다.
어눌하면서도 만물박사인데다가 입담 걸쭉하기가 전문 육담가 뺨치는 수준이다. 나름대로 마음공부의 경지가 있는 사람이라 번득이는 혜안이 감복스럽다. 눈 덮인 산길을 넘어가면서 운전대를 잡은 내가 어물거릴 때 그의 입담이 시작되어 저녁 늦게 돌아 올 때까지 계속되었었다.

“형님. 운전하기 힘들죠? 정주영이가 서산 땅 보러 다닐 때 헬기 타고 다녔다는 거 아녀요. 헬기 가져 올 걸 그랬네요”
“됐네. 이양반아. 헬기 하루에 300만원이야.”
“아참. 국토감정원에 있는 재팔씨가 경비행기 빌려 준다고 했잖아요?” 대전 동생의 말이다.
“하하하....그건 2인용이야”
“2인용이면 우리 넷이 타서 두 명 머리 숙이면 되잖아. 교통한테 걸리면 안 되니까.”
“운전수 없이 날아가는 비행기 봤소?” 진안에 사는 선비같은 막내가 한 마디 했다.
“그럴 거 뭐 있나. 다들 단식 선수들 아녀? 열흘 단식해서 체중 반으로 줄여가지고 타.”
“비행기 기름 값 누가 대누. 생태적으로 산다는 사람들이 영 기본이 안돼 있네요. 기본이 안돼 있어.”
“이러면 돼. 유체이탈 해서 둘러보자고. [1개월이면 해탈]이라는 프로그램을 내가 지리산에서 개발 해 놓은 게 있어. 그걸로 1주일이면 유체이탈 할 수 있어”
“와.... 그거 좋겠다. ‘유체이탈 1시간 100만원~’ 이렇게 종로바닥에 가서 외치면 허파에 바람 든 사람들 꽤 모일 텐데. 일년 농사짓는 것보다 낫겠다.”


넷이서 뒤엉켜 주고받은 말들이라 누가 뭔 소리를 했는지 모른다. 새로 합류한 친구가 말길을 주도한 것만은 뚜렷이 기억난다. 다만, 종로에 사는 서울 특별시민을 뜬금없이 들먹인 것은 이 자리를 빌어 사과한다.

체크 리스트가 없었구나

이 친구가 우리보고 체크리스트 하나 없이 어떻게 땅 보러 다니냐고 해서 암묵적으로 합의된 기준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우리는 즉석에서 새로운 귀농지 선택의 체크리스트를 만들기도 했다. 우선적인 것이 향.

남향이 아니더라도 동남향이나 서남향일 것. 그리고 전봇대가 있느냐. 빈 집이 있느냐. 뒤로 산이 둘러있고 앞에 개울이 있을 것. 아름드리 감나무나 느티나무가 동구 밖에 있어야 하고 외부인의 접근이 어려울 것. 땅은 몇 년 묶은 땅이면 더욱 좋고 축사가 없을 것. 대규모 화학농지가 곁에 있어도 안 되고 전기를 가급적이면 안 쓸 것이니 자연 우물이 있어야 할 것.

사람이 살고 있는 집 지붕은 눈이 녹아있었다. 사람 훈짐이 그래서 무섭다는 것일까?
사람이 살고 있는 집 지붕은 눈이 녹아있었다. 사람 훈짐이 그래서 무섭다는 것일까? ⓒ 전희식
겨우살이를 위해 북쪽으로 대밭이 있으면 더 좋음. 마을길이 포장되어 있지 않을 것. 농지는 가구당 1,500평에서 2,000평 기준. 땅값은 평당 1만원 이하여야 개간 및 기초작업비 포함하여 평당 총 2만 원 이하가 되도록 할 것. 등이었다. 이걸 만드니 우리가 함께 가 보지 않더라고 새로 합류한 친구 말 따라 항목별로 동글뱅이나 세모나 곱표를 하여 기록으로 남기면 되는 셈이다.

환경농업이니 뭐니 하면서 나라에서 주는 돈이나 농협 돈은 한푼도 안 쓰는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먹을거리와 입을거리 잠자리를 철저히 자력으로 해결하고 세상과 더불어 살아 간다는것도 이견이 없었다. 그렇지만 체크리스트에 적어 넣고보니 보기에 참 든든해 보였다.

두 번째 방문지에서다

가파른 육십령 고갯길을 오르다 옆으로 한참을 빠져서 감정원 다니는 친구가 복사해 준 일 만분지 일 지도를 따라 꼬불꼬불 산길을 몇 개나 넘어 갔다. 중간에 차는 팽개쳐 놓고 걸어서 올라갔다. 눈이 구석진 곳에는 무릎까지 빠졌다. 산모퉁이를 돌자 햇살을 가득 머금은 손바닥만한 동네가 보석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다 빈집이었으며 꼭 3가구만 남아 있었고 당연히 꼬부랑 할머니와 할아버지만 계셨다.

다짜고짜 우리는 넙죽 세배부터 드렸다. 서울서 온 아들들은 제사상 다 물리기도 전에 도망치듯이 차 밀린다며 돌아가 버려서 못내 섭섭해 하고 있던 차에 네 명의 장정한테서 세배를 받은 노친네들이 반가워 어쩔 줄을 모른다. 이 과정에서 단연 빛났던 것은 새로 합류한 친구의 입담이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일흔 한 살 동갑이시라는데 이 마을에서 4대째 산다고 했다. 할머니는 젊었을 때 소 키우느라 낫질을 뼈골이 빠지게 해서 그렇다면서 보여주시는데 오른손 손가락들이 다 비틀려 있었다.

처음에는 할아버지가 맏아들 쯤 되는 줄 알았다. 할머니는 우리 앞에서 눈을 흘려가며 영감 흉을 보았다. 이날 이때껏 맨 날 영감은 빈둥거리고 읍내 나가 놀기만 하고 자기가 지금도 밥하고 눈치우고 나무한다는 것이었다.

할아버지는 싱겁게 웃기만 하셨다.
마을에 들어오기만 하면 농사짓도록 땅도 알선 해 주겠다고 하고 전기도 끌어 주겠다고 하고 집도 짓도록 면에 가서 알아 봐 준다고 했다. 절 한번 하고 몇 곱의 호의를 받았다. 호기어린 할아버지의 친절을 뒤로하고 우리는 설핏해지는 짧은 겨울 해를 눈대중하면서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

긴 긴 겨울이 문제...

이 뒷 모습들은 희망인가 쓸쓸함인가. 카메라 촛점을 맞추다가 잠시 숨을 멈추어 본다.
이 뒷 모습들은 희망인가 쓸쓸함인가. 카메라 촛점을 맞추다가 잠시 숨을 멈추어 본다. ⓒ 전희식
가는 길에 차가 눈 속에 빠졌을 때는 넷이서 맨 손으로 자동차를 번쩍 들어 끌어내기도 했다. 네 명 중에 두 명은 이혼남. 한명은 실질적인 별거 상태라 기운이 넘쳐났던 덕이다. 어마어마한 저수지를 빙빙 돌아가는 도중에 차를 세우고 오줌발 멀리 쏘기 시합을 했는데 역시 예상했던 대로 순위가 매겨졌다. 엠바고가 걸려있어 결과를 공개하진 못한다.

계절이 계절인지라 이동하는 차 속에서는 자연스레 겨울철 난방과 온수 문제가 나왔다. 산골 마을의 겨울은 유난히 길다. 해는 짧고.

“뉴질랜드에서 방한 한 팜 에콜로지 운동가 세미나에 갔었어. 우리가 공동으로 거름자리를 크게 만들어 내부로 엑셀 파이프를 돌려서 온수를 쓰는 거야.”
“온수 보관은 어떻게 하나? 우레탄 쏴버리면 될까?”
“온수통은 우레탄 5밀리면 충분해.”
“겨울 채소밭에 닭을 여러 마리 넣어서 함께 키우는 거야. 닭 평균 체온이 42도거든”
“몽고움막에서 자 본적이 있어. 미국 엠이셔리 공동체 팀들이 왔을 때 인디언 난방원리와 몽고움막 방식으로 일주일을 산에서 잤는데 움막 가운데에 돌을 쌓고 벌겋게 데우는 방식이야”
“천연 온실 만드는 것이 작년 귀농통문 책에 잘 나왔더라. 겨울에 비닐 안 쓰고 야채 배 터지게 먹는 거야.”
“무슨. 다리 꼬고 가부좌하면 다 해결되는 걸 뭘 그래.”
“맞아. 얼음 깨고 저수지에 한번 들어갔다 나오면 난방 없어도 돼.”
“태양열과 복사열을 최대한 활용하는 주택이 되는 게 기본이야.”
“그러려면 개인 집은 7-8평을 넘어서면 안돼. 허리 바짝 굽히고 방에 들어가야 해.”
“TV니, 세탁기니, 잔치용 그릇들하며 책이니 농기계 등은 동네 공회당에 웬만한 공유살림들은 다 갖다 놓고 살아야지.”
“하하.... 그것들 안 버리고 싸가져 오게?”

일본의 대표적인 생태이론가 ‘쓰찌다 다까시’와 ‘쓰쯔이 다까이와’가 쓴 글이 생각났다. 지구 생태계 안에서의 인간의 배타적 특권을 부인하면서 이들은 하늘과 땅과 그리고 도(道)와 함께 나란히 사람을 나열 했었다. 테크놀로지에 대립되는 개념으로서의 에콜로지 운동이 참된 귀농의 행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새로운 귀농지를 찾아 헤매는 과정 자체도 그래야 한다면 설날 하루는 참 잘 살은 인생이었다. 아주 흡족했던 하루였다. 집에 돌아오기 전까지는.

아이들은 세뱃돈을 기다리지만 노모는 자식을 기다렸구나

저녁 7시가 넘어서 집에 왔더니 기다리기라고 했듯이 서울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올 설에는 막내가 못 온다고 몇 번을 얘기해도 늙으신 우리 어머니는 계속 문 열어 두라고 하면서 희식이 안 왔나? 희식이는 언제오나? 하루 종일 그러고 계신다는 것이었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형님은 내 청대로 어머니를 바꾸어 주었다. 희식이가? 어데고? 밥은 묵었나? 어서와라. 국 식기 전에 얼렁와야지 뭐 하노. 나는 들리지 않을 줄 알면서도 몇 차례 수화기에 대고 고함지르듯이 대꾸를 하다가 목이 메었다.

다음주에 서울 한번 다녀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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