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들어 세번째로 태백산을 찾았다. 이번에는 천제단 아래에 있는 망경사라는 절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했다.
날이 저물기 전 까진 아직 약간의 시간이 남아 있었으므로 무리라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문수봉으로 가는 자작나무 숲길에 다녀오기로 했다.
눈보라가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울만큼 몰아쳤다. 걸음을 총총 서둘렀지만 아무래도 무리인 듯 싶어 도중에 돌아섰다.
저녁 눈보라가 몰려들고 있었다.하지만 미안하게도 그 절집엔 눈발들이 묵을 방이 없었다.
망경사에서 하루밤을 자고 천제단에 다시올라 능선을 타고 문수봉 쪽으로 해서 하산하기로 하였다. 도처에 눈꽃이 피어 장관을 이루었다. 그 눈부심 앞에서는 그야말로 言語道斷(언어도단)이 될 수 밖에 없었다. 그 아침 태백산은 그렇게 모든 언어는 길을 잃은 곳에 있었다.
침묵에는 여러 가지 형태가 있다. 먼저 생래적으로 말수가 적은 데서 오는 침묵이 있다. 이 경우는 침묵이라기 보다는 無言이라고 해야 마땅할런지 모른다. 또 자신의 무지를 위장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매우 의도적인 침묵이 있다. 이른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이나 간다'라는 격언이 그것이다. 그런가 하면 소극적인 저항의 의사표시로서의 침묵이 있다.이런 경우 자칫 잘못하면 상대의 자의에 의해 암묵적인 동조로 해석될 수도 있으므로 유의 하지 않으면 아니 되리라.
정화(精華), 정수(精髓), 침묵은 모든 허섭쓰레기 같은 말들을 가라앉히고 걸러내어 가장 말다운 말만을 說하게 한다. 그리하여 그 깨끗하고 순결한 말들은 세상의 귀달린 모든 존재의 영혼에 깊은 울림을 주는 것이다.
그것은 정말이지 장엄한 눈꽃의 화엄(華嚴)이었다. 보잘 것 없는 서어나무도 마가목도 한그루 산죽도 모두 저마다 주렁주렁 눈송이를 달고 피어 오르는 눈꽃의 만다라였다. 거대한 설원의 침묵 조차도 한송이 거대한 꽃으로 불타올랐다. 그 침묵은 어느새 내 마음 안으로 걸어와 무한히 확장하기 시작했다. 그 침묵의 덩어리들은 무한분열 끝에 마침내 말씀의 경전이 되었다.
이 풍경에 대하여 더 이상 찬탄하지 말라. 도취하지 말라. 열광하지 말라. 고여있지 말라. 어떤 순간을 마음에 담아두면 결코 먼길을 가지 못한다.
발목 중간 까지 푹푹 빠지며 오솔길을 걷고 또 걸었다. 이것이 마지막 아름다움이다라고 아쉬워 하면 길은 또 자신의 품속에 감춘 풍경을 열어 또 다른 아름다움을 보여주곤 했다. 雪經(설경)-눈이 說하는 경전의 첫장은 어쩌면 어떤 아름다움에도 집착하지 말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또 다른 맹목일 게 분명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눈발이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그에 따라 나무들은 시시각각 자신의 모습을 더욱 아름답게 成形(형성)해냈다. 눈 쌓인 문수봉.어제 망경사에서 방이 없다고 쫒겨난 눈발들이 여기서 밤을 새고 있었다.
산을 거진 다 내려와 당골광장에 다다랐다. 어제 끝난 눈꽃 축제에 전시되었던 얼음 조각들이 눈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눈이 퍼붓는 태백시를 떠나 해발 1100m의 싸리재 터널을 엉금엉금 빠져나오니 고한읍이었다. 거기서 택시로 정암사에 도착했다. 무릇 모든 진리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혼돈스러울 때 필요한 一物(일물)이다.도저히 눈을 뜨기 어려울 만큼 퍼붓는 눈발을 헤치고 적멸궁 앞에 선다.
적멸궁 측면에는 冬安居(동안거, 음력 10월 보름부터 정월 보름까지)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동안거라, 한데 하찮은 미물인 나는 이 엄동을 헤치고 뭐하러 싸질러 다니는고? 절에 갓 들어온 승려가 조주 선사에게 자신이 할 일을 물었을 때 조주가 ‘죽은 먹었는가?’라고 물었것다. 승려가 먹었노라고 대답하자, ‘그러면 바리때나 씻어라(洗鉢盂去).’라고 말했다 한다. 눈이 쌓여 길 찾기가 매우 어려워졌다. 눈 치워 길 여는 중 하나 보이지 않는다. 뉘 있어 이 바리때를 치울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