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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박눈이 쌓인 집 뒤의 소나무
함박눈이 쌓인 집 뒤의 소나무 ⓒ 최성수
주말 아침, 날이 훤하게 밝을 시간인데도 창 밖은 점점 어두워지고 있었습니다. 밤새 집 안에 가두어 두었던 공기를 몰아내듯 현관문을 열자 잿빛 하늘이 눈앞으로 다가왔습니다.

한 번 내린 눈이 웬만하면 녹지 않고 겨울을 나는 곳이 여기 강원도 산골짝입니다. 요즘은 지구 온난화로 그래도 기온이 많이 올라가는 편이지만, 제가 어릴 때는 정말 삼월 하순이 되어서야 눈이 다 녹고 봄이 왔습니다.

이번 겨울은 유난히도 자주 눈이 내렸습니다. 응달쪽으로는 작년에 내린 눈이 아직 남아 있는데, 또 금방이라도 눈이 쏟아질 것 같았습니다.

날씨는 제법 푹 해서 점퍼를 입지 않았는데도 그리 추위가 느껴지지는 않습니다. 날씨 속임은 못한다고, 입춘이 지나고 나니 매운 바람도 제법 풀린 듯 합니다.

잠시 들어와 책을 보다 창 밖으로 눈길을 주니 펑펑 눈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서울에 두고 온 큰아들 녀석이 전화를 해 비가 온다는 소식을 전해왔습니다. 그런데 이곳 강원도 골짜기에는 함박눈입니다.

낙엽송 숲으로 내리는 눈발
낙엽송 숲으로 내리는 눈발 ⓒ 최성수
점퍼를 챙겨 입고 장갑을 끼자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그림을 그리다가 벌떡 일어나 소리를 질렀습니다.

"아빠, 어디 가요?"
"응, 마당에 눈 치우러."

그러자 녀석도 제 옷을 찾아 입으며 나섰습니다.

"우리 눈사람 만들자. 지난번에도 눈사람 만들었잖아. 이번에는 아주 아주 큰 눈사람 만들자, 아빠."
"그럴까?"

나는 빙그레 웃으며 녀석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말마다 녀석을 데리고 보리소골 이 골짜기를 찾은 것이 벌써 한 해 반이 지났습니다. 방학이라 제법 긴 시간 동안 이곳에 내려와 있었는데도, 녀석은 서울에 가면 얼른 도로 보리소골로 가자고 재촉을 하곤 했습니다.

아내는 그런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피는 못 속인다니까요. 얘도 아빠 닮아 강원도 촌사람 피가 분명해요."

마당에 나선 나와 늦둥이 녀석은 한 나절 내내 눈을 굴리며 눈사람을 만들고, 눈밭에 뒹굴며 놀았습니다. 마당 가에 커다란 눈사람도 두 개 만들어 세워 놓았습니다.

늦둥이와 만든 눈사람
늦둥이와 만든 눈사람 ⓒ 최성수
봄이 멀지는 않았나 봅니다. 한 겨울 같으면 금방 손이 시려웠을텐데, 늦둥이 녀석은 그런 기색도 없이 신이 나서 눈을 뭉치고 굴리며 놀았습니다. 눈도 제법 찰 진 것이, 눈 송이 속에 봄이 담겨 있는 것 같았습니다.

한동안 그렇게 놀다 보니 어느 새 눈은 비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어? 비가 오네."

겨울의 마지막 풍경
겨울의 마지막 풍경 ⓒ 최성수
늦둥이 녀석은 눈이 비로 바뀌자 섭섭한 표정이었습니다.

"비가 오면 이제 눈사람 못 만들잖아?"

녀석은 그만 집 안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나는 처마 밑에 의자를 가져다 놓고, 눈 위에 비가 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정말 겨울이 이제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머지 않아 저 흰 눈 밭 위에 제일 먼저 잡초들이 돋아날 것입니다.

집 뒤 언덕에서 제일 먼저 괴불주머니가 꽃을 피우고, 마당 귀퉁이에는 작년의 그 별꽃들이 돋아날 것입니다. 그러면 겨우내 눈 이불을 덮고 잠들었던 저 땅위에 또 감자꽃이 피어나고, 고추가 파랗게 자라나고, 인적조차 드물던 이 골짜기에도 농사일로 떠들썩할 것입니다.

나는 그런 봄을 생각하며 어두워지도록 처마 밑에 앉아 있었습니다.
어느 새 비가 그치고, 하늘에는 눈썹같은 달이 떠올랐습니다. 슬금슬금 불어오는 바람조차 봄기운이 묻어오는 그런 밤이었습니다. 겨울이 마지막 선물로 주고 간 눈 들판이 그 달빛 아래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눈이 그치자 밤 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눈이 그치자 밤 하늘에 달이 떠올랐다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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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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