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따라 부시 행정부 출범 이후 악화되고 있는 문명간의 갈등은, 서구 문명 내의 균열로도 이어지고 있다. 작금의 현실은 세계 유일 초강대국인 미국이 스스로 오랫동안 쌓아온 국제질서를 송두리째 뒤흔들고 있는 것이다.
"사악한 지도자가 대량살상무기를 갖게 하지 못하게 하겠다"는 얼토당토하지 않은 명분으로 이라크 침공을 강행하려는 부시 행정부의 진정한 의도는 중동의 석유 패권 장악과 자신의 강력한 정치적 기반인 군산복합체의 살찌우기에 있다는 것은 더 이상 새로운 얘기가 아니다.
더구나, 후세인 정권에게 생화학무기를 제공했던 당사자가 바로 미국이고, 걸프전 이후 8년간의 혹독할 정도의 무기 사찰 및 해제 작업으로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가 대부분 제거되었으며, 이라크가 유엔 무기 사찰단 활동에 전적으로 협력하고 있다는 점을 떠올려보면, 미국의 이라크 침공을 '더러운 전쟁'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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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이라크전 파병 기정사실화
이렇듯 미국의 명분 없는 전쟁에 반대하는 국제 사회의 분위기와는 달리, 우리 정부는 이라크 전쟁 지원을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이미 "테러와의 전쟁 협력과 한미동맹 관계를 고려해 이라크 전쟁 지원을 고려"해온 김대중 정부는 개전이 초읽기에 들어가자, 비전투병 파병을 중심으로 지원을 추진하고 있다.
정부는 일단 제1차 걸프전 또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수준의 파병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수송, 의무, 공병 등 미군의 전투를 후방에서 지원하는 형태로 300-500명의 비전투요원과 C-130 수송기 등 관련 장비가 걸프 지역으로 파견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전쟁 비용 및 전후 복구비용으로도 적지 않은 예산 지출이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전투병 파병 가능성도 완전히 배제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 독일, 벨기에 등이 이미 반전 입장을 명확히 하면서, 이라크 전쟁 지원 불가 방침을 밝혔기 때문에, 미국으로서는 이들 국가의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한국과 같은 다른 동맹국들에게 전투병 파견을 요청할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한국군 일각에서도 연합작전 능력 제고, 전쟁지역에서의 다양한 군사작전 경험, 전후복구사업 진출기반 확보 등을 이유로 전투병 파견을 주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와 관련해, 노무현 당선자는 대선 과정에서 지원 방침을 명확히 밝히지 않았으나 "국제관계와 국익을 고려해 판단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실제로 부시 행정부는 이라크 전쟁 과정에서 노무현 정부의 파병과 전비 지원 여부를 노무현 정부의 대미관의 중요한 잣대로 판단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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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무엇을 위한 한미동맹인가?
이러한 우리 정부의 대이라크 전쟁 지원 동기는 한마디로 "한미동맹 유지·강화 비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우리 정부가 이라크 전쟁 지원에 미적거리면, 한미동맹관계에 균열이 생길 수 있고 미국 주도의 세계 질서에서도 낙오될 수 있으며, 전후 석유 이권 분배에서 제외될 수 있다는 이유로 가능한 수준에서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 정부와 군의 인식인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인식에는 상당한 문제점이 있다. 우선 정부 차원에서 이라크 전쟁을 기정사실화하고 지원을 준비하는 것은 이라크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추구하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반할 뿐더러, 정부 스스로 외교적 입지를 좁히는 결과를 낳게 된다.
지원 방침을 밝힌 상황에서 나중에 이를 철회하기가 더욱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전쟁을 막아볼 생각은 안하고, 전쟁을 기정사실화하면서 편협하고도 불확실한 국익을 추구하겠다는 발상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정부는 또한 이라크 전쟁을 지원할 경우, 그 결과에 대한 깊이 있는 사려가 필요하다. CIA 전직 관료들조차 경고하고 있듯이 미국의 대 이라크 침공 강행은 전세계에 걸쳐 미국 및 이라크 전쟁에 지원한 국가들에 대한 광범위한 테러를 낳을 가능성이 높고, 한국이 이라크 전쟁을 지원할 경우 테러의 표적으로 한국 및 해외 교포들도 예외일 수 없다. 또한 이슬람국가 및 국민들과의 관계 악화도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국제사회에서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이라크 전쟁을 한반도의 남쪽인 한국이 지원하고서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이끌어낼 수 있을지도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미국이 북한과의 협상에 임하지 않은 채 이라크 전쟁을 강행하면, 북한의 핵 시위는 한층 높아질 가능성이 높고, 이라크 전쟁 종결 이후 미국의 총구가 북한으로 향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반도의 위기가 고조된 상태에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할 때, 명분과 도덕성은 대단히 중요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명분 없는 대이라크 전쟁에 대한 한국의 지원이 갖는 근본적인 위험성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한국의 대 이라크 전쟁 지원을 통해 미국의 대북강경책을 유화시키는 것을 시도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그러나 이는 대단히 근시안적인 접근이다. 미국의 대북강경책 완화와 한국의 대이라크 전쟁은 거래의 대상이 될 수 없을 뿐더러, 일시적으로 미국의 대북발언을 유화시킬지 모르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질 것은 없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 정부가 이라크 전쟁에 대한 반대 및 지원 불가 방침을 천명하면, 한미동맹관계는 흔들릴 수 있다. 그러나 한미동맹은 근본적으로 한반도 및 국제사회 안정과 평화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미국의 명분 없는 더러운 전쟁에 병력과 돈을 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미동맹이 갈수록 미국 패권주의 추구의 도구로 활용된다면, 이는 정작 중요한 우리 국민들로부터의 외면을 당할 것이고, 이에 따라 한미동맹의 미래는 더욱 불안해질 것임을 정부는 깨달아야 할 것이다.
이라크에서 만날 한국의 군인과 '인간방패'
이미 3명의 한국 반전평화운동가들은 미국의 폭격을 온 몸으로 막겠다며 이라크를 향해 출발했고, 후발대도 곧 출발할 예정이다. 미국이 고집을 꺾지 않고 이라크 전쟁을 강행하고, 전투병이든 비전투병이든 한국군이 파병되면, 한국의 군인들과 평화운동가들이 조우할 상황이 벌어질 수 있는 것이다.
'반전'과 '참전'이라는 '상이한 목적'을 갖고 있지만,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는 '공동의 운명'을 갖고 이역만리 이라크 땅에서 마주칠 이들의 지독한 역설은 비단 이들만의 몫은 아닐 것이다. 정부는 물론 우리 모두가 함께 풀어가야 할 이 시대의 숙제인 것이다.
정부는 마땅히 미국에게 참전 약속을 하기 전에, 국민들의 의사를 물었어야 한다. 시대의 상식과 양심을 반영하는 여론을 설득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만큼 참전의 명분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
한미동맹의 지속은 미국의 입맛에 맞는 행동만 해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 때, 한미동맹은 그 근본부터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이것이 한미동맹 50주년을 맞는 오늘날, 우리 정부가 명심해야 할 '새로운 시대'의 명령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