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사(守直舍).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하던 사람들이 거처하던 공간으로 넓은 운현궁 마당에 있다.
수직사 방 한 켠에 운현궁의 경비와 관리를 담당했던 관리들의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운현궁에서는 심심치않게 전통혼례가 거행되어 거기 들리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에게 옛 추억을 되새기게 한다. 또 4월부터 10월까지 매주 일요일이면 오후 5시에 일요예술무대가 열린다.
이 날은 마침 정월 대보름을 맞아 관람객들이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도록 팽이와 투호 따위를 준비해놓고 있었다. 몇몇 젊은 연인들이 팽이치기를 하고 있었다, 난 항아리에 화살을 던져 넣는 투호를 해보기도 했다. 나무와 나무 사이에 둘러쳐 놓은 새끼줄 마디 마다에 사람들이 자신의 한 해의 소원을 적어 넣은 소지(燒紙)가 빼곡히 꽂혀 있었다.
노안당 현판.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이 집에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노안당. 대원군의 섭정기간 동안 주요 개혁정책을 논의하던 대원군의 사랑채. 임오군란 당시 청에 납치되었다가 환국한 이후 민씨 척족의 세도 정치 아래에서 유배되다시피 은둔생활을 한 곳도 이곳이고 대원군이 생을 마친 곳도 바로 이곳이다.
대원군은 과연 노안당이라는 이 집의 당호에 걸맞게 편안한 말년을 보냈던 것일까. 대원군은 <아소당(我笑堂)>이라는 시 끝 귀절에서 호기롭게 말한다. "긴 세월을 알맞게 그린다면 이 생 저 생이 죄다 가소롭다"라고. 그의 생애는 과연 '가소롭다'라는 경멸의 시선에서 얼마나 멀리 벗어날 수 있는 것일까.
노안당 후원. 서까래에 장방형 각재틀 위에 판재를 깐 다음 그 위에 함석을 덮어 만들었는데, 서까래 5-6개 간격으로 지지목을 설치하고 평고대에 설치한 철물에 매단 차양이 이채롭다. 이 운현궁에는 두 개의 아득한 소리가 있다. 이 너른 공간의 한가로움을 이기지 못하는 듯 스피커에서 낭랑하게 흘러나오는 가야금 소리와 여름 소나기에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가 그것이다. 그 어느 쪽의 소리에 마음을 적셔도 상관없으리라.
이노당. 기단이 3단으로 왕의 아버지가 거쳐하는 곳이기 때문에 창덕궁보다 한 기단이 더 높게 얹어졌다.
'입구(口)'자 모양으로 된 운현궁의 안채 이노당(二老堂). 철저한 금남(禁男)의 공간답게 폐쇄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대원군의 부인인 부대부인 민씨가 운현궁의 살림을 맡아서 하던 곳임을 보여주고 있는 이노당의 모형 전시물.
이노당 복도각. 이 문으로 나가서 물확과 우물 등이 있는 후원을 지나면 노락당이 나온다.
노락당 대청에 앉아 해바라기를 하며 담소하는 할머니 두 분. 기댄다는 것, 상대에게 내 틈을 내어주고 나도 상대의 틈에 끼어 드는 일이야말로 사람살이의 원형이다. 어쩌면 독불장군이었던 대원군의 정치적 실패는 '저 할머니들처럼 서로 기대어 사는 법을 알지 못한데 있지 않을 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노락당서 바라본 이로당으로 들어가는 중문. 노락당은 운현궁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건물로서 가족들의 회갑이나 잔치 등 큰 행사는 이곳에서 치렀다. 고종과 명성왕후의 가례도 이곳에서 치렀다고 한다.
마당의 북쪽 끝에 있는 유물 전시관에 걸린 대원군의 영정. 흥선대원군은 경복궁 중건을 위해 원납전(願納錢)을 징수하는 등의 과오도 저질렀지만 세도정치를 청산하고 당색과 문벌을 타파하여 고루 인재를 등용한다거나 당쟁의 원인이었던 서원(書院)을 대폭 정리하는 등의 공적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극단적인 성격은 끝내 역풍을 불러왔고 결국 개혁은 실패하고 말았다. 어쩌면 그에게 부족한 것은 합리성이라는 근대적 정신이었는지도 모른다.
유물 전시관에 있는 척화비. 넘치는 세계화 담론을 피해 이곳에서 홀로 척왜척화를 되새김질 하고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돌아나오는 길에 흘낏 쳐다본 운현궁의 겨울은 적막하다. 적막이라는 당의정을 벗기면 사방은 금새 물음으로 둘러 쌓인다. 한때 대문 밖에 빗장이 달릴 정도로 손님이 들끓었다는 대원군의 사랑채인 노안당은 내게 권력이란 얼마나 무상한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대답 없이 시간이란 얼마나 적막한 것이냐고 되물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