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관심있게 읽고 비판해 주신 점 감사드립니다. 합리적인 토론으로 사태 해결을 위한 바른 인식을 갖추는데 상호 도움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이정호 기자의 글의 부제로 대북 경제제재는 한국경제에 치명적일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하였습니다. 저는 훨씬 더 심각한 상황을 맞게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대북 경제제재는 북핵 문제를 제대로 풀지 못해서 국제사회에 긴장이 조성되고 또 전쟁 가능성도 언급되는 상황을 전제한 것입니다. 대북 경제제재는 직접 한반도를 대결 국면으로 전환시킬 것입니다. 남한 경제의 문제 정도가 아닌 한반도는 일촉즉발의 위기 상황이 전개될 것입니다.
어떻게 해서라도 이러한 위기 상황을 막는 실질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유일한 무기인 경제력을 동원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정동영 의원이 다보스 포럼에서 천명하였듯이 북한이 대화를 통해 사태 해결에 나섰을 경우 북한이 상상할 수 있는 이상의 경제적 지원을 할 수 있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북한이 끝까지 대화를 거부하고 상황을 악화시킬 경우 경제적 제재 방안도 활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경제제재도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저의 주장에는 '최후의 수단'이라는 전제조건을 달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는 점과, 사태 해결을 위해서는 전쟁 등 무력 사용을 제외한 모든 지렛대를 활용해야 한다는 판단입니다.
저는 솔직히 제 판단이 틀렸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지 않고 문제가 해결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러나 국제 사회의 움직임과 한반도의 정세를 놓고 볼 때 이러한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한반도 비핵화는 타협할 수 없는 전제
이정호 기자는 "북한이 핵을 가지면 잠을 잘 수 없다"는 제 말을 두고, "지금도 미사일과 생화학무기 등으로 위험한 것은 마찬가지인데 잠을 잘 잘고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제가 잠을 못 잘 정도로 걱정하는 것은 북한이 핵을 가졌을 경우 일본·대만은 물론 우리도 핵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는 점입니다. 이를 막아야 한다는 것은 타협할 수 없는 원칙입니다.
동북아는 핵의 숲으로 바뀌고, 평화는 사라질 수 있습니다. 혹자는, "그것은 자국의 동북아 영향력이 급속히 쇠퇴될 것을 우려하는 미국의 걱정이 아니냐"고 묻기도 하지만, 미국이 어떤 걱정을 하건 관계없이 그것은 엄연히 우리나라의 걱정입니다. 막대한 평화유지 비용, 일본의 군사대국화, 무엇보다 핵무기를 가진 남북의 통일을 주변국들이 적극적으로 저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러한 사태가 예견되는 한반도에서의 핵개발을 놓고, 우리나라의 심각한 문제라고 인식하지 않는 주장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핵 개발 위협'과 '핵 협박'은 차원이 다릅니다
이정호 기자는 북한이 핵 협박으로 남한의 경제 원조를 요구하는 일을 다행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북한의 핵 개발 위협으로 시작되어, 94년 제네바 합의, 그리고 남북정상회담까지 이루어낸 역사적 사례를 염두에 둔 주장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핵을 개발하겠다는 위협'과 '핵을 갖고 협박'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입니다. '핵'을 외교의 수단 정도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민족의 생존이 달린 문제입니다.
물론 북한이 핵을 쉽게 가지려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핵 개발 위협에는 국제사회의 지원을 통한 사태 해결 방안이 가능하지만, 핵을 가지려 하는 순간 국제사회는 무력 사용에 의한 저지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북한의 핵 문제는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체제 유지와 직결되어 있는 만큼 북한이 결국 핵무기를 갖지 않을 것이라는 희망은 가질 수 있겠지만 그 누구도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제 인터뷰를 보신 많은 네티즌들이 "미국 다녀와서 변했다"는 지적을 하셨습니다. 사실입니다. 저는 이번에 UN과 워싱턴에 가서 북핵 사태에 대한 미국과 국제사회의 입장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미국에 가기 전에는 제 생각도 그랬고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도 마찬가지였지만, 미국의 무력사용의 기준(Red Line)이 북한이 핵을 가지려는 순간일 것으로 판단하였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정책 당국자들에게서 확인한 결과는 달랐습니다.
북한이 핵을 가지려는 순간이 아니라 북한에서 핵을 수출하는 순간을 무력사용의 기준으로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즉, 이라크 등이나 테러 조직에 무기가 넘어가서 자국에 위해가 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놓고 무력사용의 기준을 삼고 있었습니다. 미국은 한반도에서의 무력사용을 현재로서는 부차적으로 판단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핵을 가져도 물리적으로 막지 않아도 된다'는 판단까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 판단의 변화는 북핵 문제에 대해 '시급한 건 미국 쪽이고, 우리는 이 점을 활용하여 중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급하게 된 건 오히려 우리나라입니다.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의 협력을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야 할 때라는 점을 확인하게 된 것입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경제제재' 전제는 국제 외교가의 상식
국내에서 접한 언론과 전문가들의 분석을 보고 있노라면, 경제제재 등 제재 조치에 대해 미국만이 적극적이고 중국·일본·러시아 등 대다수의 국가가 반대하거나 중립적인 것으로 이해되었습니다. 이정호 기자 역시 프랑스와 독일을 중심으로 한 국제여론이 미국에 우호적이지 않다고 단정하였습니다.
그러나 UN에서의 각국 대사를 접한 결과 전혀 달랐습니다. UN 사무국은 물론 프랑스와 독일 대사 역시 '무력사용은 안되지만 최후의 수단으로서 경제제재는 필요하다'는 점을 전제하고 있었습니다. 참고로 이 두 사람이 1월과 2월 UN 안보리의 의장입니다. "끝까지 대화만 하자는 말이냐? 대화해서 북한이 들으면 좋지만, 안 들을 경우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대화의 강제 수단은 없다는 말이냐?".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없는 것은 무책임한 논거였습니다.
물론 대화의 전제는 강제수단이 아니라 신뢰와 인내입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 대화의 성공을 보장해주지는 못합니다. 무엇보다 국제사회의 동의도 이끌어내기 어렵습니다. 북한이 대화의 틀을 깨뜨리려 할 경우 그것을 막을 수단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국제 외교가(外交家)의 상식입니다. 상식을 인정하지 않고 우리나라가 북핵 사태 해결의 주도권을 가질 방도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북핵사태 해결의 주도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국제사회가 납득할 수 있는 방안으로 이 문제에 대한 평화적인 해결을 이끌어 낼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줘야 합니다.
현재의 핵 위기 상황이 미국의 제네바 합의를 이행하지 않은 것에서 출발한 것이라는 이정호 기자의 지적에 동감합니다. 미국의 여러가지 의심스러운 의도나, 불편부당한 태도 역시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점이 사태를 악화시킨 북한의 책임을 면해주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보다 투명성의 확보 수단을 제거해 버린 북한의 처사(IAEA 사찰단 추방 등)는 국제질서에 대한 명백한 도발입니다.
북한이 군사적 긴장사태 보다 경제교류를 통한 이득이 크다는 것을 북한 수뇌부가 느껴야 한다는 점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때까지 북한의 어떠한 위협에도 눈을 감고 있을 수는 없을 노릇입니다.
미국도 북한도 오판하지 말아야 합니다
미국은 한국 정부가 대책 없이 대화 만능주의에 빠져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버려야 합니다. 이번 사태에 대한 한국 정부의 주도성을 인정하는데 인색해서는 안됩니다. 동북아시아의 평화를 위해 한국과 함께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잊어서도 안됩니다. 우리 사회 일부의 반미감정을 확대하거나 왜곡해서도 안될 것입니다.
북한 역시 대화에는 이익이 있지만, 대결에는 응징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핵무기는 절대로 안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햇볕정책 역시 서해교전에서의 신속한 응징이 상징하듯 굳건한 안보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대화와 포용으로 평화를 유지하지만, 그것을 벗어날 경우 힘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어야 합니다.
한반도의 장래를 생각해볼 때, 대북 포용정책 외에 대안은 없습니다. 대북 포용정책의 기조는 굳건히 유지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번 문제는 기왕의 포용정책과는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다름 아닌 핵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냉정하게 따져봐야 할 문제입니다.
우리는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변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름 아닌 "북한이 계속 협박하더라도, 우리는 제재에 대한 이야기는 함구한 채 끝까지 인내하고 대화를 해야 하느냐"는 질문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그래야 한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핵무기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개발할 가능성이 현실화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핵무기를 가지면 또 어떠냐, 결국 통일되면 우리 것 아니냐"고 생각하는 분들도 일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러한 사고야말로 가장 위험한 것일뿐더러 통일도 가로막는 사고라고 확신합니다.
참고로 제 주장을 접하신 분들 중에 "북한 인민을 다 굶겨 죽이자는 말이냐"고 지적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경제제재는 최후의 수단으로 그 경우에도 인도적 지원은 제외됩니다. 그리고 대북 인도적 지원은 언제 어느 경우에라도 더욱 확대되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신념입니다.
물론 경제제재가 실현될 경우, 인도적 지원이 확대되더라도 북한 인민의 생활은 최악의 상황으로 내몰릴 것입니다. 이러한 사태를 막아야 합니다. 막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사태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북쪽에 엄중히 경고하고 사태 수습을 위해 빨리 대화할 것을 촉구해야 합니다.
한반도 핵위기 해결을 위한 모든 논쟁을 환영합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강조하면 저는 제 주장이 틀리기를 바랍니다. 한반도의 평화가 '제재'라는 진통 없이, 하루속히 정착되어 영구히 이어지기를 희망합니다. 개인적으로도 내 인식이 틀렸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은 곧 나의 발전입니다. 정치인이고 학자이고 간에 자기 주장을 분명히 하고 논쟁해서,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을 부끄러워 해서는 안됩니다.
물론 정치인이 정책결정의 과정에서 잘못된 판단을 가지면 안되겠지만, 공론화의 과정에서는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논쟁해야 마땅하며, 그것이 정책결정의 오류를 줄이는 지름길이기도 합니다.
제 주장에 대한 또다른 반론을 기대하겠습니다. 모든 논쟁을 환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