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쌓인 무등산 상봉이 또렸히 보이기 시작한다. 판소리 흥보가 중 <제비 노정기>에 나오는 흥보 제비가 "흑운 박차고 백운 무릅쓰고 거중에 둥실 높이떠" 흥보 움막에 당도 허드키 나도 그렇게 먼 길을 와 '그림자가 쉬고있는 정자' 식영정에 도착한 것이다. 식영정으로 오르는 층계 옆 동백나무는 아직 꽃을 피지 않고 있었다. 꽃을 보지 못한 서운함을 지그시 누르고 계단을 오른다. 식영정은 여전히 구부러진 소나무며 팔작지붕의 서까래를 괴고 있는 퇴보도 멋드러진 굴곡을 보여 주었다. 어떤 시간은 숙성되어 기쁨이 되고 어떤 시간은 매우 더디게 쌓여서 고통이 되는 것일까.
우리 마을에서 면 소재지인 연천 까진 십리길이었다. 할아버지 심부름으로 면에 갔다 돌아오는 길이면 지친 어린 몸은 식영정 마루에서 한 잠 늘어지게 잠을 청했다. 여기서는 그림자만 쉬어가는 것이 아니다.선들선들한 바람도 내 이마의 땀을 씻어 주며 쉬어가곤 했다. 회상 속에서 몇 장의 흑백사진이 인화되고 마침내 내 어린 날의 시간들은 서서히 기쁨으로 발효되어 간다. 식영정 마루에 앉아서 무등산과 몇 번 눈을 맞춘다. <쉬어가는 곳>이라는 황지우의 시를 생각하며 식영정을 떠났다.
내가 여름 나라 아래 당도하니
식영정(息影亭) 온 채가
저 아래 물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노인들이 큰 나무 수령(樹齡) 아래에서
배꼽을 내놓고
손으로 부채질한다
멀리 무등산 동쪽 산록이
군용 담요를 뒤집어 씌워 놓은 듯
한낮 햇살 받아 더욱더 녹록(綠綠)하다
모든 길은 노인만이 안다
금곡(金谷)으로 들어가는 버스 이정표
코카콜라 간판 아래
이따만한 웬 누렁 개 한마리가
섬찟하게 홀로 앉아 있다
너 이노오옴!
헛것이 수작을 부리다니!
돌멩이가 한여름의 으스스한 정물(靜物)을
깨겡껭, 깨뜨려 놓는다
녹은 아스팔트에 발자욱 남기며
헛것이 쩔뚝쩔뚝 사라진다
황지우 詩 <쉬어가는 곳> 全文
소쇄원을 향해 걷는다.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기억이 떠오른다.이 지실 마을 아이들은 텃세가 심했다. 어쩌다 면에 다녀오는 길에 마을 앞을 지나게 되면 그냥 지나가게 두는 법이 없었다. 공연히 시비를 걸고 싸움을 청했다. 그런데 그 아이들은 아직도 여기 남아 고향을 지키고 있을까. 나이들면 별 것이 다 궁금해진다. 대숲 가운데로 난 사잇길은 여전히 삽상했다. 소쇄원(瀟灑園)의 '소쇄'란 말이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뜻을 담고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이 대나무 숲 길에서 연유하는 시원함일런지도 모른다. 아마도 이 대숲이 없었다면 소쇄원은 한낱 허명(虛名)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송강 정철이 <소쇄원 草亭에 부치는 시>에서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 정자를 세워 사람이 가고 오기 마흔 해로다. 시냇물 서늘히 벽오동 아래로 흐르니 손님이 와서 취하고 깨지도 않네"라고 읊었던 광풍각이 첫눈에 들어 왔다. 어린 아이들의 과자 반입마저도 한사코 막는다는 양산보의 15대 후손 양 재영씨의 약간은 극성스런 소쇄원 관리에도 불구하고 대나무사이로 뚫린 위태로운 다리라는 뜻을 가진 투죽위교(透竹危橋)는 이제 제 맛을 잃었다.극성스런 관람객들의 등살에 몇 번 무너진 끝에 아예 튼튼한 시멘트로 발라버린 것이다.
대봉대를 지나서 애양단 오곡문 아래를 흐르는 계류에 걸쳐진 외나무 다리를 건너면 매대(梅臺)와 만난다. 담에는 瀟灑處士梁公之廬라 씌여져 있다. 소쇄원 주인 양산보의 오두막집이라는 우암 송시열 글씨가 박혀 있다. 매대의 매화나무는 아직 동안거(冬安居)를 끝내지 않았나 보다. 꽃을 터뜨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쉬움에 못이겨 제월당 뒷곁 굴뚝 옆 매화나무를 기웃거려 본다. 마찬가지였다. 매화나무가 동안거를 해제하고 꽃망울을 터뜨릴 때 쯤이면 이 소쇄원의 정취는 한껏 무르익을 것이다.
광풍제월(光風霽月)]이란 비가 갠 뒤의 바람과 달이란 뜻으로, 마음결이 명쾌하고 집착이 없으며 쇄락하다는 뜻이며 한편으로는 "깨끗하게 가슴 속이 맑고 고결한 것, 또는 그런 사람"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그러므로 이 두 정자의 이름은 나를 부끄럽게 할 뿐이다. 제월당 마루에 앉아서 광풍각의 뒷모습을 바라 보았다.사람이고 건물이고 뒷모습이 고와야 여운을 남긴다.
광풍각 뒤란에 심어진 커다란 산수유나무의 꽃망울이 야무지게 여물었다. 이대로 가면 산수유 나무는 수일내로 노란 꽃을 피워 사람들에게 제 존재를 드러낼 것이다. 개나리꽃, 산수유 나무 꽃 생강나무 꽃 등을 보며 난 '왜 봄에는 노란 꽃이 가장 먼저 피는 걸까.'라고 의문을 품었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여간에 노란색이 주는 느낌은 따뜻하다.하여간에 산수유 꽃은 가는 실 마냥 아른아른하고 이쁘다. 그러나 시방 소쇄원 園林에 가득 핀 꽃은 쓸쓸함, 혹은 황량함이란 단 한가지 꽃 뿐이다.그 꽃을 바라보며 마냥 가슴을 적실만큼 수많은 순간들을 낭비하며 여기에 이르렀다.
창계천을 건너 환벽당을 향해 간다.내 어린 날의 추억의 팔부 능선 쯤에는 이 환벽당이 있다. 아직 존재의 극점인 꽃을 터뜨리지 않고 있는 건 환벽당 뒤란의 커다란 동백나무도 마찬가지였지만 내 추억은 동백꽃 보다 더 붉게 타올랐다.
초등학교 1, 2학년 담임 선생이셨던 김봉은 선생은 임신한 배불뚝이였음에도 불구하고 수요일 마다 용의검사를 했고 그때 마다 우린 이 창계천에 끌려나와야 했다. 그 시절에 우리는 너 나 없이 까마귀와 혈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우린 까마귀의 아저씨 뻘이었다. 때가 얼마나 시꺼멓게 끼었던지 손등이 쩍쩍 갈라져 있었다. 때를 벗기려고 조약돌을 주워 빡빡 문지르면 피가 찍찍 흘러 내렸다. 어느 정도 때를 벗겼겠다 싶으면 김봉은 선생님은 다시 검사를 하신다. 그리고는 때가 벗겨지려면 멀었다 싶은 아이는 직접 돌멩이를 문질러서 때를 벗겨주시기도 했다. 궁상맞은 것도 꽃이 되는 참으로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환벽당을 걸어 나왔다.시간이 없었지만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1968년 졸업한 후로 단 한 차레도 가본 적 없는 나의 모교, 지금은 광주 동 초등학교의 분교가 돼버린 광주 충효 초등학교였다. 학교는 차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해 있다. 성안 마을 옆길을 지나 엣날 상여집이 있던 언덕받이를 지나자 학교가 모습을 드러냈다. 학교는 벽돌을 교체했을 뿐 골격은 옛 그대로였다. 순간 만감이 교차했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 울먹이는 가슴을 겨우 달래며 나섰던 교정을 난 35년만에 돌아왔다. 그때 품었던 청운의 꿈들은 다 어디서 쉬고 있는가. 하나 둘씩 늘어가는 흰 머리칼 속에 숨었는가.
운동쪽으로 돌아 나왔다.화단을 바라 보았다.둥글고 탐스럽게 자라난 저 회양목. 화단을 만들던 5학년 때 담임 선생이셨던 김원순 선생님은 완도에서 가져온 귀한 나무라고 몇 번이고 강조를 하셨었다.그때는 육종이나 조직배양 기술이 별로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지금처럼 회양목이 흔하던 때가 아니었던 것이다. 저 나무는 바로 우리가 심은 나무였던 것이다. 저 나무가 자라는 것과 비례해서 내 꿈은 점점 푸르름에서 멀어져 갔으리라. 교정을 돌아나와 길을 서둘렀다. 수리 마을 저수지를 지나 서림 마을을 지나 석저 마을 김덕령 장군의 사당인 충장사를 지나간다. 저 마을엔 아직도 어린 날의 내 친구들이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마음 속으로 친구들의 안부를 물었다.
무등산의 노을이 지고 있었다.날짐승도 집을 찾아드는 황혼에 나는 다시 내 삶의 터전인 외지로 떠난다. 장사익의 노래를 듣는다. 그의 <기침>이라는 노래의 가사처럼 '삶은 언제나 가시박힌 손톱의 아픔'이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견딜만큼의 통증일 뿐이고 고향은 그 통증이 시작됐던 발원지이기도 하다. 이번 여행은 내게 새삼 그 통증을 확인해주는 일에 다름 아니었다. 생각해 보라. 그리움이란 얼마나 심각한 통증인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