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니체의 독해를 위해 제법 많은 시간과 열정을 투자한 적이 있었다. 고등학교 윤리교과서에서 배운 그 엉터리 니체가 아니라 '삶'의 철학자, '차이'의 철학자 니체를 찾기 위해...
그러나 투자한 시간과 열정에 비해 그 열매는 언제나 나의 지적 능력을 의심할만큼 초라했다. '짜라투스트라'를 통해 '선악을 넘어서' '도덕의 계보학'을 통해 '권력에의 의지'로 가는 길은 늘 미로를 걷는 기분이고, 그 길의 안내를 자처하는 수많은 해설서들은 길안내가 아니라 길찾기를 포기하도록 만드는 황제의 칙서와도 같았다.
그런데, 여기 한 권의 니체 해설서가 있다. 아니 해설서가 아니라 니체에게로 가는 천 개의 길, 천 개의 눈 가운데 하나를 제시하는 책,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은 내 지난 날의 수많은 시간과 열정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니체로 가는 길을 친철하고 쉽게 안내한다. 너무나 간단명료하고 명확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설명하기에 질투를 느낄 정도로 매력적인 책이다.
"먼저 니체를 충분히 좋아하라. 떠남은 그 뒤에 판단할 일이다."
숫자 '천'은 다양성과 차이를 가리킨다. 니체는 모든 사물이 지닌 '천 개의 주름'을 '천 개의 눈'으로 바라보고 '천 개의 길'을 거쳐 '천 개의 숨겨진 섬'에 이른다. 니체라는 '천 개의 주름'을 정확한 지도로 완성한 지은이의 사고력은 튼튼하고 치밀하다. 덕분에 우리는 미로를 헤매지 않아도 된다. 다음을 보자.
'철학이 하나의 통치 수단으로 전락할 때 사유에 대한 삶의 복수가 시작된다. 이제 삶은 새로운 사유의 탄생을 가로막는 거대한 수렁이다. 새로운 가치의 탄생은 습속의 윤리의 압력에 굴복한다. "명령하는 것은 관습이다." 새롭고 위험한 생각은 안된다! 하던 대로만, 시키는 대로만 생각하라! 그 사회의 가치에 복종함으로써 길들여지는 것, 그리고 나서 그 가치를 미덕으로 숭상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인류가 처한 가장 커다란 위기다.'(p.51)
'누구도 자신의 머리카락을 잡고 무게를 달아 볼 수 없으며, 누구도 자신이 서 있는 지반의 무게를 알 수 없다. …니체는 철학 바깥에서 철학의 무게를 달아보고 있는 철학자다.'(pp 25~26)
니체를 해석하는 일은 그를 재현하는 일이 아니다. 이 책에서 지은이는 철저하게 자신만의 니체를 '창조'한다. 친절하고 겸손하게, 그러나 열렬하게 니체를 설명하고 옹호하면서, 그를 통해 진리와 도덕, 정치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명확하게 밝힌다. 이 책 어디에도 니체에 대해서 거리를 두고 평가하거나 비판하는 구절은 찾아보기 힘들다. 왜? '객관성이나 비판적 거리란 오히려 사랑 능력을 상실한 학자들의 불임증'이라 생각하기에...
지은이는 니체를 이해하는 길은 니체에 대한 주석이나 비판이 아니라 니체를 직접 여행하고 답사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우리가 흔히들 문화유산에 대한 올바른 인식이라는 이름을 걸고 행하는 답사라는 형식을 생각해보자. 아무리 많은 자료를 가지고 학습과 정리를 한다 하더라도 직접 그곳에 가서 눈으로 익히고 몸으로 깨닫는 여행과 답사에는 미치지 못한다. 완성되고 고정화된 하나의 틀에 정형화되기 보다는 우리 자신이 직접 각자 하나의 길, 하나의 깨달음을 얻는 게 훨씬 더 문화유산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첩경이다.
"걱정해야 할 것은 '과잉'이 아니라 '결핍'이다."
니체에 대한 이해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비판과 주석 이전에 직접 니체의 영토를 경험해야한다는 것이다. 이 책을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장은 독립된 내용을 담고 있는 니체의 영토들이다. 각각의 영토들을 여행하고 나면 우리는 자연스럽게 저자의 니체를 이해하게 되고, 그 영토들을 가로지르고 있는 어떤 일관성을 발견하게 된다. 각 장들은 모두 동일성과 결핍을 조장하는, '근대 이성의 고약한 산물'이라 할 수 있는, (부정의) 권력의지와 대결하고 있다.
그 (부정의) 권력의지는 차이를 은폐하고 그 생성을 가로막으며, 창조적 욕망에 결핍을 집어 넣어 아무런 생성 능력도 갖지 못한 대중들, 심지어는 자신의 억압과 예속마저 요구하는 대중들을 양산해오고 있기 때문이다(히틀러의 나찌즘에 열광했던 독일인들을 생각해보라. 이에 대해서는 빌헬름 라이히, <파시즘의 대중심리> 참조).
그런데 그 대결하는 방식이 독특하다. 지은이 자신이 곧바로 니체가 되어 니체 입으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전략을 통해 하나의 니체에서 그와 비슷한, 하지만 동일하다고 말하긴 힘든 다른 니체로 옮겨다니며 말한다.
"그는 단 여섯 줄의 문장에도 천 개의 의미를 담아내는 사람이다. 그 천 개의 니체를 하나의 니체 아래 묶어두려는 사람들이 문제"(p.6)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은이는 자신의 입으로 니체를 말하면서 사실은 니체의 입으로 '자기'를 말하고 있다. 그 수많은 (천 개의) 니체 중 하나의 니체의 입을 빌어 자신이 사유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부정의) 권력의지에 대한 이러한 대결방식을 통해 지은이는 차이와 다양성, 새로운 신체를 생산하는 '긍정의 권력의지'를 제시하고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천(千)'이라는 숫자는 동일성에 맞서 다양한 '차이'를, 결핍에 맞서 '과잉'과 '넘침'을 의미한다. 이렇게 니체의 영토를 답사하다 보면 지은이는 사물들을 바라보는 천 개의 눈, 우리가 나아갈 수 있는 천 개의 길, 사물들이 발생한 천 개의 기원, 세상이 도달할 천 개의 섬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어떻게 보면 이 책에서 보여주는 니체는 스피노자의 니체일 수도 있고 맑스의 니체일 수도 있고 들뢰즈의 니체일 수도 있는, 그런 니체다.
이렇듯 이 책은 니체의 영토를 여행하는 여행객 각자의 니체를 만날 수 있게끔 유도한다. 이해할 수 없는, 아니 이해될 수 없었던 기존의 니체 주석에 좌절을 맛보신 분들에게 이 책은 분명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지은이는 니체의 단어를 빌어
"모든 책들이 '망치'가 되거나 '다이너마이트'로 사용되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
"저기 니체라는 화살통에 천 개의 화살이 들어있다! 저기 니체라는 이름의 다이너마이트들이 널려 있다!"(p.20)고 흥분하면서.
또한 지은이는 다음과 같이 사람들을 유혹한다.
"모든 책들은 동료를 구하는 몸짓이다"(p.9)라고. 아마도 그는 망치 또는 다이너마이트로 무장한 많은 동료들을 그의 곁으로 불러모으고 싶은 모양이다. 물론 그 수많은 화살, 수많은 다이너마이트들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순전히 이 책을 읽는 우리들의 몫이다.
덧붙이는 글 | 고병권, <니체, 천 개의 눈 천 개의 길>, 소명출판사(2001)
저자 소개
고병권 - 서울대 화학과 졸업하고, 같은 대학 사회학과 박사과정 수료했다. 현재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회원이다. 주요 논문으로 「니체 사상의 정치 사회학적 함의에 대한 연구」, 「들뢰즈의 니체 : 헤겔 제국을 침략하는 노마드」, 「투시주의와 차이의 정치」, 「노동 거부의 정치학 : 새로운 '구성'을 향한 투쟁」이 있고, 옮긴책으로는 『한 권으로 읽는 니체』,『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 자연철학의 차이』등이 있다.
<수유연구실+연구공간 '너머'>의 홈페이지(http://www.transs.pe.kr)에 가시면 저자 '고병권이 말하는 고병권'이라는 자기소개를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