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하고 사치스런 시류에 감정을 내맡긴 채 오늘을 살아가는 당신에게는 아무래도 그저 소박하기만한 동춘당의 풍경 보다는 거기서 몇 발짝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대전시 민속자료 2호인 송용억가(宋容億家)의 봄이 더욱 실감나게 다가올지런지도 모르겠습니다.
5월이 되면 송용억가의 앞뜰과 뒤뜰에는 영산홍과 매화꽃과 백목련, 자목련, 백모란과 붉은 모란등 온갖 꽃이 피어납니다. 삶이 쓸쓸하거나 막막한 봄날에도 송용억가의 만화방창한 풍경들은 사람의 마음을 붕붕 뜨게 하지요.
작년 봄 마음 밖으로 정처없이 빠져나가 까딱햇으면 길을 잃을 뻔한 저를 오래도록 붙들어 매둔 것도 바로 이 송용억가를 휘감고 있었던 싱그러운 봄의 흥취였답니다. 수령 3, 4백년을 훌쩍 넘긴 너댓 그루 영산홍이 피어내는 아름드리 꽃들이 소시적 당신처럼 요염하게 피어나 내 눈은 더할 나위없이 황홀했었지요.
한때는 내 온 생애를 걸고 당신을 저 영산홍처럼 활짝 피어나게 하는 기름진 거름이 되고 싶었던 때가 있었다는 생각이 나를 공연히 쓸쓸하게 했던 기억이 되살아납니다.
홀씨가 날린다
겨울이 가고 새가 운다
홀씨는 눈 뜬다
눈 뜬다, 노란 꽃이 핀다
아이 하나가 지나간다
아이는 꽃을 본다
꺾는다,
던진다,
맑은 물이 빠져 나온다
꽃은 분해된다
흔적이 없다
그 봄 하루 동안
다시 많은 꽃이 피어난다
없다, 아무 일도
문득 있던 것이 문득 사라진다
끝없이 태어난다.
이진엽 시 <그 봄 하루 동안> 전문
그때 우리는 아직 젊은 나이라서 시간은 결코 제 걸음걸이를 늦추는 법이 없음을 알 리 없었지요. 우리가 막상 삶이 안겨주는 막막함과 덧없음에 눈떴을 때에는 이미 우리 생의 봄날이 다 흘러가버린 뒤였구요.
쓸쓸함에 젖어 조상현이 부르는 단가 <이산저산>의 한 대목을 가만히 흥얼거려 봅니다.
이 산 저 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을 찾어왔건마는 세상사 쓸쓸허드라. 나도 어제 청춘일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내 청춘도 날 버리고 속절 없이 가 버렸으니, 왔가 갈 줄 아는 봄을 반겨 헌들 쓸데가 있느냐?
왜 사람들은 쓸쓸하면 언덕에 오르곤 하는지요? 근처 언덕에 올라 내려다 본 송용억가는 무사태평에 잠겨 있습니다. 어쩌면 나도 많은 날들을 저렇게 엉거주춤한 자세로 삶의 맹목성과 부질없는 허덕임을 견디어냈는지도 모른다는 자각이 나를 아프게 합니다.
그래요. 다가오는 봄에는 저 영산홍처럼 불게 타오르는 꿈을 안고 살겁니다. 사람 사는 일 언제나 봄만 같을 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여기 와서 영산홍 꽃그늘에 홍건히 마음을 적시고 나면 아무리 삶이 고단할지라도 봄 한 철이야 무난하게 흘러보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삶이 왜 이리 적막하냐고 투정부리는 당신도 한번은 여기 들러 주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