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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금붕어 유치원 원장 임인식 할아버지
시카고 금붕어 유치원 원장 임인식 할아버지 ⓒ 김명곤
그동안 한국의 근현대사에서는 위기의 때마다 굵직한 삶의 지표를 그려 온 원로들이 있었다. 이들은 때로 선지자적 호통으로, 때로는 나직한 듯 무게있는 '시대의 소리'로 표류하는 시대에 민중들에게 삶의 좌표를 설정해 주었다.

이들은 모두가 '구럭 메고 장바구니 들고' 잘못된 길로 내달릴 때면 가로막고 나서서 '그러면 못써!'라고 손 사래질을 치며 '사람됨'의 도리를 가르쳤고, 민중들은 멈칫 가던 길을 돌려세우곤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한국사회는 이들의 고언을 발전을 가로막는 구시대의 유물로 치부하며 마음 한가운데로부터 '퇴출'하기 시작했고, 그 뭔가에 천착하며 정신없이 내달려 왔다.

특히 올해로 이민 100주년을 맞이했다는 미주 이민사회는 애당초 원로가 귀찮은 사회이다. 이민사회에 '늙은이는 존재해도 원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들린지 오래다. 눈앞의 푸른 빛깔 달러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최고의 가치로 인정하려 들지 않고, 그 어느 누구도 존경하려 들지 않는 이민사회에 원로란 마음 불편한 생뚱맞은 존재일 터이다.

그런데 이 이민자들에게 "약한 것에 생명이 있다"며 '가짐의 삶'보다 '됨의 삶'에 대한 엉뚱한 고집을 내세우는 원로가 있다. 그는 다름아닌 '시카고 금붕어 유치원' 원장인 올해 90세의 임인식씨.

기자가 임씨를 처음 만난 것은 5년전 플로리다 올랜도의 어느 한국식당에서였다.

임씨는 당시 김 대통령의 당선을 뛸 듯이 기뻐하며 '우리 조국에도 명운이 열렸다'며 기자에게 '얘기좀 하자'고 했다. 80대 중반의 고색창연한 '할배'가 전화를 걸어와 정치얘기를 하자는 말에 기자는 적게는 당황스러웠으나, '당신의 칼럼을 열심히 읽었다'는 말로 띄워주는 바람에 '답례'차 만난 것이었다.

당초 1시간의 '들어주기'를 예상하고 만나러 간 기자는 그날 오후의 다른 약속을 모두 취소하고 자리를 옮겨가며 임씨와 시간을 보냈다. 당시 3시간이 넘게 임씨와 시간을 보내며 기자는 '이게 왠일인가' 싶었다.

'망명시절 김대중' 얘기를 필두로 단재 신채호, 도산 안창호, 월남 이상재, 남강 이승운, 고당 조만식을 비롯 함석헌, 김교신 등에 대한 임씨의 '고담'은 끝이 없었다. 그 날 조용조용하게 펼쳐진 임씨의 '입담' 에 기자는 녹초가 되어버렸다.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기자가 이번에 다시 만난 임씨는 세월 탓인지 걸음걸이도 예전같지 않았고, 전에는 없던 보청기가 귀에 끼워져 있었다. 그러나 정신은 여전히 맑아 보였다. 기자는 5년전에 기라성 같은 민족의 선현들의 '말씀'을 듣는데 집중하다 흘려 지나친 임씨의 '신사참배 거부사건'이 생각나 이에 대해 먼저 묻기로 했다. 마침 3.1절 기념일이 다가오고 있기도 해 돌아가시기 전에 증언을 대량 채록해 놓고 싶기도 했다. '신사참배 거부 사건' 얘기가 나오자 임씨의 눈에 돌연 생기가 돌았다.

"숭실학교 5학년 때였지요. 졸업을 한 달 앞두고 조지 맥퀸(운산온)교장이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파면을 당해 추방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던 날이 토요일이었는데, 학생회장이었던 내가 일요일 아침 각 학년 및 학급대표들을 소집했습니다. 긴급대책회를 열기 위해서였는데, 모두 11명이 달려 왔습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는 임씨의 눈은 더욱 깊어져 보였다. 갑자기 임씨는 잊었다는 듯 '아, 그때 문익환이도 3학년 대표로 달려 왔었지!'라며 첨언했다. '문익환'이라는 귀익은 이름이 뛰쳐나오는 바람에 기자는 깜짝 놀라 문 목사에 대해 몇 마디 물어보았다.

임씨는 문 목사에 대해 '학생시절부터 순수하고 신중하며 과묵한 사람'이라고 했다. 임씨는 문 목사의 이른 타계에 대해 몹시 가슴아파해 했다.

임씨는 "서거 몇개월 전에 수유리가는 버스 칸에서 문 목사와 우연히 마주쳐 반가이 몇 마디 나누고 헤어졌는데, 그렇게 일찍 갈 줄 알았으면 그날 억지로라도 붙잡아 회포를 풀었어야 했는데..."라며 아쉬워했다. 증언의 맥을 끊지 않기 위해 기자는 '문 목사 이야기'를 훗날에 더 듣기로 하고 먼저 하던 이야기를 재촉했다.

월요일 아침 전교생이 모이는 기도회 시간이었습니다. 마포삼렬 선교사가 나와서 '내가 오늘부터 이 학교 교장이오' 하는 것이었습니다. 전날 미리 계획한데로 내가 손을 번쩍 들고 '신사참배 거부하다 파면된 운산온 교장이 우리의 교장이오! 당신을 교장으로 인정할 수 없으니, 교장 자리 내놓으시오!'라고 소리를 쳤습니다. 학생들이 일제히 '옳소!'라고 함성을 질러댔습니다. 그리고 강당을 뛰처 나오며 '신사참배 반대하다 파면된 운산온 교장 만세! 운산온 교장 만세!' '숭실학교 만세!' '전 조선 신사참배 반대학생 만세!'를 목이 터져라 외쳤습니다.

당시를 회상하자 가슴이 벅차 오르는 지 임씨는 눈물을 글썽이며 잠시 가슴에 손을 얹고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다시 증언이 이어졌다.

"그때는 정말 죽음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모두가 눈물이 범벅인 채로 교가를 부르며 교문 밖을 향했습니다. 이때 우리학교 축구선수 11명이 우리를 에워싼 채 시위를 계속하며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순사들의 정강이를 마구 차기 시작했습니다. 이어 일단의 순사들이 칼을 빼 든 채 '검거하라!'며 교문 안으로 밀고 들어 왔습니다. 양측이 대치하는 가운데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았습니다. 벌써 교문 밖과 학교 담장 둘레에는 소문을 들은 평양 시민들이 진을 치고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이 때 교무주임이 눈물을 흘리며 가로막고 나서더니 '제발 강당으로 들어가 달라'고 호소했습니다.

학생들은 시위를 계속하자며 소리를 질러 댔습니다. 결국 우리는 설왕설래 끝에 일단 물러나 시위 계속 여부를 토의하기로 하고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을 목 높혀 부른 후 강당으로 들어갔습니다."

이후로 학교측과 경찰 그리고 학생측의 타협에 의해 '이대로 해산하면 아무도 검거하지 않겠다', '주모자를 퇴학시키지 않겠다', '교장 문제와 신사참배 문제는 학교측의 결정에 맡기겠다'는 선에서 마무리 짓고 시위대는 해산되었다. 임인식 학생이 교문을 나서자 벌서 연도에는 소문을 듣고 몰려온 시민들이 웅성거리고 있었고, 순사들을 태운 트럭과 오토바이가 교문 주변에 깔려 있었다.

교계의 인물중 하나인 송창근 목사가 '인식이 수고했다!'며 덥썩 손을 잡고는 하숙집으로 데려다 주었다. 하숙집에 도착하자 마자 하숙집 주인 홍 장로는 인식이 학생게게 돈을 쥐어주며 '빨리 피하라!'고 했다. 임인식은 친구들과 고민을 거듭한 끝에 피하지 않고 '하늘의 뜻'에 맡기기로 했다.

다음날 새벽같이 평양 경찰서 고등계 박천 형사가 찾아와 임인식을 연행했다. 임인식은 이 날 고등계 취조실에 불려가 은근한 회유와 함께 "다시 나가서 선동하면 그때는 정말 없다"는 협박을 받고 무사히 풀려났다. 이후로 임인식은 '운동권' 학생으로 평양시민들과 경찰서로부터 주목을 받게 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임인식은 쫓기듯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그곳에서도 그는 '유난한' 일을 벌이는데, 당시 노무자로 끌려와 비참한 삶을 살고 있던 조선인 노무자들이 거주하는 빈민굴에 드나들며 이들을 돌본다. 그렇찮아도 주목을 받던 임인식은 이 일로 일제의 '블랙 리스트'에 올라 계속 감시를 받았고, 해방 후 결국은 이 일이 계기가 되어 문제 청소년 선도 단체인 '희망 소년원'을 운영하게 된다.

임인식은 어려서부터 앞서 열거한 기라성 같은 민족주의자들의 영향을 깊게 받았다. 그러나 임인식에게 누구보다도 가장 크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그의 부친이었다. 숭실고보를 마친 후 일본의 청산학원과 일본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고향으로 돌아와 있던 임인식에게 조국의 해방은 입신 출세를 위한 절호의 공간이었다. 해방 후 북쪽에서 존경받던 민족주의 진영 리더 고당 조만식 선생의 추천으로 임인식 청년은 대동강 상류인 강동군의 군수 자리에 오를 뻔했다. 이 때 임인식은 아버지의 만류로 출세의 디딤돌에 오르기를 포기했다.

혼란한 해방공간에서 남하를 결심하고 마지막 작별인사차 고향으로 찾아간 아버지는 임인식에게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으라며 '오금'을 박는 말을 남겼다.

"한학자이기도 한 아버님은 귀국하고 돌아와 찾아온 저에게 대뜸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돈벌이에 열중하지 말아라. 정당에 가입하지 말아라. 벼슬하지 말아라!' 기가 막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도대체 돈도 벌지 말고, 벼슬도 하지 말라면 무엇을 하라는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아버님은 속마음으로 불만을 품고 있는 저에게 평생을 붙들고 살 좌우명 하나를 남기셨습니다. '약한 것에 생명이 있고, 약한 것을 돕는데 생명이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임인식은 남쪽으로 넘어왔고 군정과 이승만 정권하에서 여러번 '벼슬' 제의가 들어 왔으나 모두 사양했다. 막 6.25가 터진 직후 서울 거리에는 거지 소매치기 불량배들이 들끓었고 이승만 대통령의 특명으로 이들에 대한 소탕령이 내려졌다. 어느날, 서울 시경과 시청에서 이들을 맡아 교육할 소년원을 맡아 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일본인들이 철수할 때 요시찰 인물들의 신상이 수록된 서류철을 남기고 갔는데, 이 서류철 속에서 임인식의 과거 빈민굴 봉사 행적을 발견하고 적격자라며 요청이 들어 온 것이었다. 임씨는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어느 정도 마음은 굳히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민에 들어간지 사흘째 되던 날 아침 일찍 잠에서 깨어났는데, 아버지의 마지막 당부인 '이재궁궁을을'이라는 귀절이 귓전을 울렸습니다.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임인식 청년은 이후로 불철주야 이 일에 매달렸다. 5백여명의 말썽꾼들을 먹이고 입히며 교육시킨다는 일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혼신을 다해 이들을 양육하고 훈계하며 돌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재정'이었다.

정부로부터 지원금이 나오지 않아 독지가를 찾아다니며 15년여를 겨우 겨우 운영하다 결국 9백여만의 빚을 지고 고민하다 고혈압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그때가 50을 갓 넘긴 때 였다. 집을 팔아 빚을 정리하고 병석에 들어앉았다. 그러나 반신불수가 된 임인식은 우연찮게 단전호흡과 요가 강좌를 접하고, 이를 통해 4년 7개월만에 기적같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이후 1978년 시카고에 살고 있는 딸의 초청으로 이민와 금붕어 유치원을 설립했다.

임씨가 금붕어 유치원을 설립한 것은 다시 회복한 건강에 대한 감사 때문뿐 아니라, 주변의 동포 노인들이 미국사회에 살면서 금붕어처럼 귀여움을 받으며살게 하자는 취지에서였다. 그는 지금도 한인 노인들에게 길거리에서 가래침을 뱉지 말자, 휴지를 버리지 말자, 줄 설때 새치기를 하지 말자며 잔소리를 쉬지 않는다. 그는 25년째 '원장 노릇'을 하며 한인 노인들 뿐 아니라 주변의 타민족 노인들까지 미시간 호변에 불러 모아 체조와 단전 호흡을 가르치며 그들의 약한 육신을 추스리는데 마지막 힘을 쏟고 있다.

이제는 시카고지역 뿐 아니라 동부 지역 한인 노인들의 많이 거주하는 지역에서 '임장로님'은 유명인사가 돼 있다. 일생동안 보육사업과 사회 교육운동에 헌신해 온 임씨는 이에 대한 공로로 1990년 한국 평생교육 진흥회로부터 월남장을 받았다.

임씨는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기자를 붙들어 앉히고 '좋은 일 많이 하려면 건강해야 한다'며 간단한 단전호흡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는 "마지막으로 이민자들과 이민교회에 꼭 당부할 것이 있다"며 가슴 철렁한 말을 했다.

"인간의 고통의 대부분은 바로 이기심과 탐욕때문이지요. 지금 인류는 이로 인해 말세를 살고 있습니아. 주변을 조금만 돌아보면 아직도 삶 자체가 고통인 사람들이 널려 있지요. 이민자들이 움켜 쥐고 높아지는 데만 혈안이 돼 있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이민교회는 이를 부추기는 경향이 있고요. 조금 덜 갖는 연습을 했으면 좋겠어요."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물거너 온 이민자들이 듣기에는 생경하다 못해 매우 거북한 주장이었다. 과연 기자를 포함해 '햄버거'에 뱃살이 오를 대로 오르고 '케딜락'이 주는 안락함으로 지상천국을 누려온 이민자들이 이 원로의 '반 자본주의적' 주장을 얼마나 받아들일 수 있을까. 오로지 푸른 빛깔 종이가 주는 마력에 취해 스스로의 삶을 질문해 보지 않고 마구 내달려 온 이민자들. 과연 자본주의가 첨단으로 발달해 있다는 이 땅에서 '움켜쥐는 삶' 외에 '약한 것에서 생명을 찾는' 그런 '엉뚱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일까? 기자는 재물을 버리지 못해 예수 곁을 떠난 부자청년의 무거운 마음을 안고 맥도날드 식당문을 나섰다.

집에 돌아와 임 할어버지가 자리를 일어서며 슬며시 넣어준 종이조각을 펴 보니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여 자긍하며 교만하여 훼방하며...감사치 아니하며 참소하며 전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반하여 팔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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