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우리 선비들은 문방사우와 함께 살았다. 먹의 향내를 맡으며, 난을 치고, 글씨를 쓰는 것을 즐거움으로 알았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이 멋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동네마다 있던 서예원이 이제는 동사무소의 주민자치센터 등에서나 볼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 즈음에도 오직 붓을 만드는데 일생을 바친 장인이 있다. 붓으로 유명하던 광주직할시 백운동에서 살았던 인연으로 1969년부터 붓을 만들기 시작하여 34년의 세월을 붓과 함께 살아온 붓제작 고유전승 기능자 제 99-1 호인 문상호(文相晧) 선생이 바로 그분이다.
붓은 글씨를 쓰거나 그림을 그릴 때 사용하는 필기구이다. 과거 인쇄술이 발달하지 못하였을 때는 문자나 그림을 남기는 도구로서 종이, 벼루, 먹, 붓을 보물처럼 여겼으며, 우리나라를 비롯 중국, 일본 등 동양 3 나라의 서예, 문인화, 산수, 채색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서화용품이다.
붓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는 분명한 기록이 없으나 갑골문자가 생긴 뒤에 사용된 것으로 추측된다고 한다. 붓의 실물이 발견된 가장 오래된 것은 1954년 중국 장사(長沙)고분에서 발견된 전국시대의 붓이다. 이 붓은 전체의 길이가 21cm이며, 붓대는 대나무를 썼으며, 붓털은 토끼털로 전해진다.
한편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발견된 붓으로는 1988년 경남 의창군 다호리 고분에서 기원전 1 세기경의 삼국시대 생활용품 70여점과 같이 길이 23cm 정도의 칠기 손잡이로 된 붓 다섯 자루가 출토된 것이 그 처음이다.(曺首鉉, 韓國 書藝의 史的 槪觀 - 고대에서 조선 후기까지를 중심으로 -, 南丁 崔正均 敎授 古稀紀念 서예술 논문집, 원광대학교 출판국, 1994년, 141페이지)
좋은 붓이 갖추어야 할 조건과 붓의 종류
먼저 붓은 다음과 같은 조건이 갖추어져야 좋은 것이라 한다.
-첨(尖): 붓끝을 모으면 뾰족해야지 뭉툭해서는 안 된다.
-제(齊): 붓털을 쥘부채처럼 쫙 펼쳤을 때 중간에 갈라짐이 없고 붓끝이 가지런해야 한다.
-원(圓): 붓끝 주위가 둥글게 꽉 에워싸여 둥근 송곳 모양을 하면서 어느 한쪽이 홀쭉하거나 빠져 보이면 안 된다.
-건(健): 탄력성이 풍부하여 붓을 눌러쓴 다음 다시 거두어들일 때 휘었던 붓털이 다시 원래 모습으로 돌아와야 한다.
붓의 종류는 털의 종류에 따른 것과 쓰임에 따른 것 두 가지가 있다.
우선 쓰임에 따른 붓으로는 한문 서예용, 한글 서예용, 사군자용, 산수화용, 채색용, 세필용(細筆用:작은 글씨를 쓰는 붓), 액자용(장식용으로 만든 큰 붓, 말꼬리털로 만들며, 액자에 넣기도 한다) 등이 있다.
다음은 털의 종류에 의한 붓의 종류이다.
* 양호필(羊毫筆) : 흰 염소의 털로 만들며, 붓이 부드러운 것이 특징이다.
* 황모필(黃毛筆) : 족제비 꼬리털로 만드는데 붓에 힘이 있으며, 주로 작은 글씨를 쓰거나 불화(佛畵:불교용 그림), 민화(民畵)를 그리는데 쓴다.
* 장액필(獐腋筆) : 노루 앞가슴 털로 만들며, 붓 가운데 가장 부드럽다.
* 닭털붓 : 닭 목의 털로 만들며, 비백서(飛白書:후한의 채옹(蔡邕)이 만든 글씨체인데 획을 나는 듯이 그어 그림처럼 쓴 글씨체)를 쓸 때 사용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 마필(馬筆) : 말털로 만들며, 붓에 힘이 있어 큰 글씨를 쓸 때 사용한다.
* 낭모필(狼毛筆) : 이리털로 만들고, 탄력이 좋다.
* 죽필(竹筆) : 대를 잘게 쪼개어 만든다.
* 죽편(竹片) : 대나무 조각으로 만드는데 지펜같은 효과를 낸다.
* 갈필(葛筆) : 칡줄기로 만들고, 특수효과를 낸다.
* 고필(稿筆) : 볏짚으로 만든 붓이다.
* 태모필(胎毛筆) : 태아가 태어날 때부터 나있는 머리털로 만든다.
이중 죽필은 대나무를 두드려 잘게 쪼개어 만드는데 중국이나 일본에서도 잘 만드는 이가 없다. 문 선생이 개발한 이 죽필은 일반인들이 글씨가 거칠게 써질 것으로 생각하지만 털로 만든 모필보다 오히려 잘 써진다고 한다.
고필은 문선생이 최초로 볏짚을 사용해 만든 붓이다. 이 붓 역시 잘못 만들면 글씨가 잘 써지지 않아 만드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한다. 모필보다 오히려 붓끝이 짱짱하고 부드러우며, 봉은 단단하여 글씨가 잘 써진다.
또 특이한 것은 태모필이다. 태모는 태아가 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머리털을 말하는데 보통 6~9개월 정도 지나 잘라 준다. 예로부터 일본에서는 이 태모로 붓을 만들어 주면 글씨를 잘 쓴다는 말이 전해져왔다. 붓대에는 학 그림을 그려주어 장수를 기원하며, 보통 가훈을 쓴 액자에 넣어 아이에게 훗날 선물을 한다.
전시된 붓 중엔 조립식붓, 세 가지 크기의 붓을 같이 넣은 삼단붓과 붓통, 휴대용붓통, 붓털을 치자, 홍화, 쪽물을 들인 붓도 있었다.
붓의 재료를 어떻게 구하는지 물었다. 돼지털 등 모든 털은 다 붓털의 재료가 되는데 닭털, 짚, 대나무 외에는 거의가 중국에서 수입한다고 한다. 가장 많이 사용하는 염소털도 흰염소 수컷의 털이어야 하는데 국내에는 흑염소만 기르기 때문에 구할 수 없다.
문 선생에게 붓을 만드는 일의 어려움을 물었다. 그는 서예인구가 급격히 줄어 붓의 수요도 미미하기 때문에 생계유지 수단으로는 어렵다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따라서 현재는 계승하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어 안타깝다는 말을 한다. 그의 젊은 아들이 계승을 하겠다는 약속을 한 것이 다행이라며, 쓸쓸하게 웃는다. 붓 1 자루에 1억 엔짜리도 있는 일본이 부럽다는 말을 덧붙인다.
우리나라에는 언제 전통문화가 제대로 계승되려는지 또 전통문화 전승자들이 대접받는 사회로 변모할 수 있을는지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엄청난 손해가 되는 컴퓨터 게임, 고스톱에 많은 사람들이 빠져있다. 누구나 이런 현상이 절대 바람직하다고 생각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이 때에 문 선생의 죽필과 함께 묵향에 심취해보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