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 앨범의 곡을 모두 외운다. 그만큼 이 앨범을 좋아한다. 이유가 무엇일까하고 이 CD를 넣은 채 곰곰이 생각해본다. 여기서 적는 말들은 그의 1, 2집에서만 의미가 있다는 것을 미리 말해두고 싶다.
스캣으로 시작하는 첫곡 '32℃ 여름'부터 그는 이 앨범이 기존 가요 음반들과는 다를 것임을 넌지시 밝히고 있다. 그의 재즈는 훵키하고 합주보다는 독주에 가까운 연주들로 이루어져있으며 목소리를 받쳐주는 역할에 충실하면서도 틈틈히 귀에 들어와 박히는 그런 연주이다. 편곡과 프로듀싱에 재능이 없으면 이런 사운드는 결코 만들 수 없다.
'그런대로'를 들으면 팻 매스니PatMetheny 분위기가 나는 신세사이저 연주가 주조를 이루는데 이것은 조동익의 영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조동익은 어떤날 시절부터 이러한 연주를 즐겨 해왔다. '까만 치마를 입고'는 전형적인 발라드 풍의 곡이다. 이렇게 그녀와 헤어진 남자의 마음을 담은 곡 셋과 연주곡 '눈싸움하던 아이들'로 LP 앞면을 끝낸다. 지금 이 순간은 CD로 듣고있지만 나는 이 앨범이 나온지 1년쯤 지나서 LP로 들었었다.
'연습실에서'는 가벼운 피아노 터치와 색소폰을 배경삼아 느긋하게 부르는 재즈풍의 사랑노래다. 밤에 가벼운 블랙 러시안 한잔과 함께하면 딱 좋을만한 그런 분위기인데 김현철은 이런 분위기에 비교적 강하다.
마지막 곡인 '나나나'는 조규찬의 곡으로 김현철의 곡들보다 조금 템포가 빠르고 밝다. 조규찬도 얼마지나지 않아 데뷔앨범을 발표하게 되는데 김현철에 비해 조금 밀린 감은 있지만 그 역시 훌륭한 싱어송라이터로서의 자질을 이미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조규천, 조규만, 조규찬 삼형제는 형제가 모두 음악적 재능이 뛰어난 편인데 그중 조규찬이 백미라 하겠다.
그의 가사는 대부분 자신의 체험을 소재로 적는다고 밝힌 적이 있다. 그래서 그런지 그의 가사들은 진솔하다. 타이틀곡 '32℃ 여름'에서 어디를 봐도 자꾸만 떠오르는 그녀의 생각이 나고, '까만 치마를 입고'다니는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그녀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은 내가 남자라서 그런지 나의 이야기처럼 들린다. 그는 그런 모습을 직설적인 편이지만 조금은 돌려서 표현하고 있어서 듣다보면 소설속의 한 장면처럼 이미지가 스쳐지나간다. '그런대로'는 결코 그런대로 살고있지 못하면서 항변하는 실연남의 마음을 잘 담고 있으며 무척 호소력이 있다.
김현철의 목소리은 별로 기교가 없다. 그는 결코 가창력이 뛰어난 가수라고 말할 수는 없으며 자신도 그것을 알기 때문인지 그의 곡들은 그다지 톤이 높지 않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맑은 편이며 그 목소리에 나직하게 감정을 실어서 전달한다. 이것은 그를 가수라기 보단 옆에서 연인이 노래해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준다. 거리감이 적다는 말이다. 따라 부르기도 좋다.
그의 음악이 가진 가장 큰 미덕은 음악을 이루는 각 요소들이 가진 균형감이다. 그의 음악에서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분명 그의 목소리이지만, 이미지를 떠올리게하는 시적인 그의 가사는 그의 목소리에 의해 호소력을 얻어 감상자에게 전달된다. 그런가하면 목소리 뒤에서 각각의 연주들은 결코 튀지 않으면서 충분히 목소리를 받쳐주고 있으며 목소리이 쉬고있을 틈에 나와서 충분히 존재감을 알리고 있다. 이런 균형감이야말로 재능이라고 할 수 있으며 이런 프로듀싱, 뮤직 디렉터적인 능력은 결코 흔히 찾아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김현철은 예전에도 그랬지만 음악가로서의 활동보다는 사업가 혹은 방송인으로서 활동을 더 많이 하는 것 같다. 물론 그는 TV에 얼굴을 비친다거나 하진 않는다. 그리고 요즘 여러 중견 가수들은 사업가로서 활동을 많이 하고 있으며 그것은 후배들과 공존하는 하나의 방법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가 90년대 초반에 보여주었던 빛나는 감성을 생각해보면 아직도 그에게서 음악적으로 일말의 기대를 하게된다. 지난 듀엣 곡 모음집 '...그리고 김현철'(2002)에서 별다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여기서 재즈라고 했을 때 일반적인 재즈를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우리나라에서 붐을 이루었던 재즈는 밥이나 스윙, 쿨 등의 정통재즈라기 보단 크로스오버 재즈 혹은 팝 재즈라고 불리던 것들입니다. 따라서 김현철이나 봄 여름 가을 겨울 등에 자극받아 재즈를 듣고자 하시는 분들은 얼 클루Earl Klugh, 래리 칼튼Larry Carlton, 밥 제임스Bob James 등을 찾아들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특히 오해할 수 있는 것은 퓨젼 재즈라는 말입니다. 영미권에서 퓨젼 재즈라고 하면 마일즈 데이비스Miles Davis의 중후기에 강하게 영향받은 허비 행콕Herbie Hancock, 웨더 리포트Weather Report등의 재즈와 락, 민속음악이 강하게 섞인 격렬한 음악을 말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잘못 사용되고 있는 퓨젼 재즈라는 말만 듣고 퓨젼 재즈 음반을 접하신다면 배신감을 느끼실 겁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