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0년간 있었던 파병의 사례들을 돌아보면 크게 두가지 성격으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에 한미관계를 고려하여 참여하는 경우이고, 다른 하나는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하는 경우이다. 여기서 후자의 경우는 파병을 둘러싸고 그렇게 심각한 논란이 발생하지는 않곤했다. 우리가 유엔에 가입한 이후에는 유엔회원국의 일원으로서 평화유지활동에 참여해야 한다는데 큰 이의제기가 없었고, 동티모르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평화유지활동에 걸맞게 공병 혹은 의료진 파병에 국한되었다. 항상 문제가 된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에 참여하는 경우였다. 2차대전 이후 미국이 주도한 전쟁은 대부분 그 성격과 명분을 둘러싼 논란이 그치지 않았고, 당연히 우리 군의 파병을 둘러싼 논란도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전쟁은 우리의 입장에서는 사실 특별한 참전명분이 없었다는 점에서, 겉으로 보면 지금의 미-이라크전과 비슷하게 비쳐질 수 있다. 그런데 그 참전의 경위는 지금의 경우와는 많이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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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따르면 우리 군의 베트남 파병은 박정희가 먼저 미국정부에 제의하여 이루어졌다. 5.16 쿠데타 이후 미국으로부터의 지지와 지원을 필요로했던 박정희는 1961년 11월 최고회의 의장 자격으로 미국을 방문하였고, 방미일정중에 케네디 행정부와의 비공개회의를 통해 최초로 파병의사를 밝힌 것으로 알려져있다. 김종필 공화당의장도 1962년 2월 베트남을 방문하여 파병의사가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오히려 미국은 한국군의 활용 필요성에 대해 조심스러운 반응을 보였고, ‘보다 많은 국가들의 참여를 위한 캠페인’(More Flag Campaign)이 시작되면서 비로소 미국으로부터 파병을 허용받게 되었다. 박정희가 파병희망을 밝힌지 2년 반이 지난 1964년 5월 1일, 미국은 비로소 공식적인 파병제안을 하였고, 우리 정부는 야전병원과 통신지원단을 파병하겠다는 답을 하기에 이른다. 다른 동맹국들의 저조한 참여 속에서 한국은 미국을 지원하는 실질적인 전략파트너가 되었고, 한국은 베트남 참전의 깊은 수렁속으로 빠져들어가게 되었다.
베트남파병의 과정에서 국회내에서는 적지않은 논란이 따랐다. 비전투병력에 국한된 1,2차 파병은 특별한 논란이 따르지 않았지만, 대규모 전투병력 파병을 내용으로 하는 1965년의 제3차 파병때에는 국민의 반대여론도 비등하였고, 야당도 반대입장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 존슨 정부와 박정희 정부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파병동의안은 1965년 8월 13일, 한일협정비준안에 반대하는 야당의원들이 총사퇴한 가운데 공화당의원들만으로 통과되었다. 다음해인 1966년 2월, 우리 군의 증파를 위한 동의안이 다시 국회에 제출되자 야당은 강력한 반대에 나섰으나, 그래도 파병동의안은 국회를 통과할 수 있었다.
박정희 정부에게 있어서 베트남파병은 젊은이들의 피를 흘리게 하는 대신, 경제적 대가를 챙기는 일종의 거래와도 같은 것이었다. 베트남 참전을 통해 박정희 정부는 전쟁특수를 누렸고 수출을 늘렸는가 하면, 미국의 차관지원을 받아낼 수 있었다. 그러나 1972년 베트남에서의 철수가 진행되고 결국 사이공 함락이 현실로 왔을 때, 우리는 도대체 무엇을 위해 그 전쟁에 뛰어들었던 것인가라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의 남측은 남베트남을 지원하고, 북쪽은 북베트남을 지원하는 상황에서 남북한간의 긴장 또한 격화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역사적 상처는 지금도 고엽제 고통으로, 때로는 라이 따이한의 사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베트남전 이후 우리 군의 해외파병은 오랜 기간 동안 거론되지 않다가, 1991년 다시 미국이 주도하는 다국적군의 걸프전이 시작되면서 다시 파병이 결정된다. 상대는 지금과 마찬가지로 이라크였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의료지원단 파병에 이어 공군수송단의 파병을 결정하였고, 5억달러 규모의 지원을 하였다.
이같은 파병결정이 있기까지 미국은 다각적인 압력을 행사하였다. '아버지' 부시 대통령은 9월 7일 노태우 대통령에게 메시지를 보내 미국의 대(對)이라크 제재에 한국의 협력을 요청했다. 바로 다음 날에는 브레디 재무장관이 방한하여 미군의 군사비를 한국도 분담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미국의 압력은 의회를 통해서도 전달되었다. 9월 10일 미 상원은 동맹국들이 재정적, 군사적 추가부담에 나서지않을 경우 미국과의 관계가 악화될 것임을 경고하는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하였다.
그럼에도 미국은 구체적인 파병요청은 하지않는 겉모습을 유지하였다. 그레그 주한 미대사는 "미국은 한국군 전투부대의 파병을 요청하지 않았고 이는 한국 스스로 결정할 문제"라고 밝혔다. 당시 노태우 정부도 파병결정은 우리 정부의 독자적인 결정임을 강조하였다.
베트남전 파병이 미국의 지원과 경제적 대가를 겨냥한 결정이었다면, 걸프전 파병은 당시 미국이 구상하고 있던 ‘미국주도의 새로운 세계질서’에 적극 합류하려는 의사, 그리고 한미간 군사동맹관계의 확인이라는 배경이 깔려있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걸프전 파병에 대해 당시 재야운동세력은 미국의 전쟁중단과 파병반대 입장을 밝혔다. 또한 학생운동권에서도 전쟁반대와 파병반대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당시 제1야당이던 평민당이 당초의 파병반대 입장을 보이다가, 노태우-김대중 회담을 거치면서 군의료지원단 파병에 동의하는 모습으로 선회하면서 파병반대여론은 그리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다. 파병만대 목소리는 소수야당들과 재야운동권에만 머물렀고, 파병동의안은 큰 어려움없이 국회를 통과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10여년이 지난 오늘, 미국이 다시 우리 군을 전장(戰場)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이미 지난 2001년 9·11 테러 이후에 발생한 아프간전쟁에 해·공군수송지원단, 공병, 의료 500여명이 파병되었다. 당시 미국이 내건 반(反)테러전쟁이라는 명분이 압도하는 분위기 속에서, 아프간전의 타당성에 대한 논의조차 없이 아프간전 파병동의안은 국회를 통과하였다. 9·11 테러 직후의 분위기 속에서 파병에 대한 반대는 곧 테러세력에 대한 옹호로 간주되는 미국식 논리가 횡행했던 때였다.
그리고 지금, 다시 이라크를 상대로 한 전쟁이 우리를 괴롭히고 있다. 이라크 파병이 정부차원에서 공론화된 것은 김대중 정부 시절인 지난 1월, 김석수 총리의 국회답변을 통해서였다. 당시 김 총리는 “미국의 이라크전 파병 요청에 대비해 아프가니스탄과 동티모르 파병 범위 내에서 사전준비를 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러면 이때까지 과연 미국은 파병요청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미국은 이미 지난해 11월 세계 50여개국에 미-이라크전 파병의사를 타진했고 거기에는 한국이 포함되어 있었다. 미국은 우리 정부에 이라크전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비공개적으로 요청했고, 그후 국방부와 외교부는 지원규모와 방식을 논의해온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 3월 10일에도 라종일 청와대 국가안보보좌관은“이라크와의 개전을 앞두고 미국이 우리 정부에 적극 협력을 요청해 왔다”면서 “미국이 우리 정부에 대해 지지의사 표명, 의료지원, 난민처리 등의 지원을 요구해왔다”고 밝힌 바 있다. 전투병의 파병까지 요청하지는 않았지만 비전투분야의 적극적인 지원을 요구해 온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난 13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 미-이라크 전쟁에 대한 지지입장을 받아내는 등 사실상의 압박을 계속해왔다.
베트남전 파병이 그래도 우리에게 상당한 경제적 대가를 보장하며 이루어졌던데 비해, 이번 미-이라크전 파병에는 아무런 반대급부조차 없다. 360억원에 달하는 파병비용조차도 모두 우리가 감당해야 할 부담이다. 그나마 미국으로부터 현금지원 요구가 없는 것을 다행스러워해야할 분위기이다.
우리의 발목이 잡혀 있는 문제가 있다면 바로 북한 핵문제가 될 것이다. 사실 노무현 정부가 국민의 반전여론을 다 알면서도 파병결정을 내린 것도, 북한 핵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서는 한미공조를 선택하지 않을 수 없고, 향후 미국의 독자적 군사행동 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도 미국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렵다는 판단의 결과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부시 행정부의 존재는 과거 미국의 어느 정부의 모습보다도 위압적이고 폭력적으로 비쳐진다.
미-이라크전 파병논란에서 이례적인 것은 과거와는 달리 야당이 파병에 더 적극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과거 베트남전, 걸프전 혹은 동티모르 파병동의안이 제출되었을 때 야당은 반대 내지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오히려 야당인 한나라당이 정부보다 더 앞서나가고 여당인 민주당에서는 정부와 반대되는 파병반대 기류가 형성되는 전례없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베트남 파병이 있은 지 이제 40년. 해외파병을 둘러싼 논란에는 언제나 미국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엔의 평화유지활동을 제외한 파병은 미국이 주도하는 전쟁을 위한 것이었고, 그때마다 한미동맹관계를 고려한 파병이라는 설명이 뒤따랐고, 파병에 대한 반대 또한 번번이 제기되곤 했다.
그러나 이번 미-이라크전 파병논란을 계기로 이제 우리 파병의 역사도 전환점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요청하고 정부가 결정하면 무조건 파병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국민의 의사가 파병여부를 결정하는 큰 변수가 되고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한미관계 혹은 국익이라는 말 한 마디로 부당한 침공에까지 우리 젊은이들을 동원할 수 있는 시대는 이제 가고 있는 것이다. 국회는 노 대통령을 향해 먼저 국민을 설득해달라는 주문을 하였다. 물론 자신들의 정치적 부담을 덜려는 의도임은 읽을 수 있지만, 파병을 결정하는 것은 미국정부가 아니라 우리 국민의 의사, 그리고 그것을 수렴한 우리 정부여야 한다는 상식을 확인시켜주고 있다.
미국이 수행하는 전쟁에, 심지어 이번 전쟁같이 명분없는 침공에까지 우리 군의 파병이 일종의 의무처럼 생각되는 역사는 이제 마감되어야 한다. 무엇을 위한 전쟁인지, 그리고 누구를 위한 전쟁인지 그 질문의 끈을 놓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전략적 선택’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국가적 양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 다른나라의 평화를 유린하는데 힘을 보탤 수밖에 없다는 발상, 과연 그래가지고 우리의 평화인들 세계로부터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인 의문을 풀 길이 없다. 우리 젊은이들은 폭격이 계속되는 바그다드 하늘 아래에서 목숨을 걸고 반전을 외치고 있는데, 우리 정부는 그 전쟁에 힘을 보태려하고 있다. 21세기 벽두, 미국이 벌여놓은 부도덕한 전쟁은 지금 우리를 이렇게 갈라놓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