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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25일 <미디어오늘>의 신미희 기자가 리영희 선생님을 인터뷰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리영희 선생님은 "개념과 일치하는 정확한 용어, 언어, 표현을 쓰라"고 당부하셨다고 합니다.

또 "언어를 개념과 일치시키는 과정은 투철한 자기 비판적인 의식이 선행돼야 가능한, 매우 어려운 일"이라면서 분발을 촉구하셨다는군요.

주로 언론인들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했지만 '말'과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명심할 말씀이라고 봅니다. '말글'에 의지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니 그건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이라고 보아도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런 리영희 선생님의 당부 말씀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언론은 말과 개념을 일치시키는 일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 예로 이라크 침략전을 벌인 당사자의 이름을 국내 각 언론들이 어떻게 부르는지 찾아 봤습니다. 우선 인용부터 해보겠습니다. 맥락이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 인용은 짧게 줄입니다.

▲ 30일 카타르 도하에 있는 영국군 제3특수여단 사령부에서 영국군 관계자들이 새로 투입되는 40명의 특공대원들이 이라크에서 수행할 공격 임무에 대해 보고를 받고 있다.
ⓒ 로이터 뉴시스
"미.영 연합군은 이라크 남부 주요 도시 ...." (<연합>, 3/27, 김형근 기자)
"... 연합군의 진격이 이라크군의 저항과 ..." (<연합>, 3/27, 윤두현 기자)

<연합뉴스>는 '미-영 연합군'이거나 그냥 '연합군'이라는 말을 씁니다. 다른 외신을 받아쓰는 경우에도 원어가 '앨라이즈(allies)'이든 '코울리션(coalition)'이든 모두 '연합'으로 통일했습니다.

다른 신문들이 <연합뉴스> 기사를 그대로 사용할 경우 <연합>의 용어까지 그대로 받아서 '연합군'이라고 쓰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조중동과 한경문에 차이가 없고, 심지어 최근 <연합뉴스> 기사를 받기 시작한 <오마이뉴스>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은 기사를 고치지 않고 전재하는 경우니까 원문을 보존한다는 측면에서라도 그럴 수 있는 일이겠지요.

그러나 대다수의 신문들은 자사 기자들이 작성한 기사도 <연합>의 용어를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 아래 인용된 조중동 기사들은 모두 각사 기자들이 작성한 것이지만 <연합>의 선례대로 주로 '미영 연합군'이거나 그냥 '연합군'이라고 씁니다. 가끔 제목을 뽑을 때 '미-영군'이라고 쓰기도 하는데, 그건 주로 말을 줄이기 위해서 그러는 것으로 보입니다.

"미·영 연합군을 크게 괴롭히고 있다 ..." (<조선>, 3/27, 김민철 기자)
"...연합군은 국제적으로 호된 비판에 ..." (<조선>, 3/27, 김희섭 기자)

"... 미군.영국 연합군의 희생자가 ..." (<중앙>, 3/27, 이효준 특파원)
"... 연합군의 허를 찌르겠다는 ..." (<중앙>, 3/27, 정용환.정현목 기자)

"미영 연합군과 이라크군의 치열한 ..." (<동아>, 3/27, 권순택,신치영 기자)
"민간인의 자살공격으로 연합군 탱크가 ..." (<동아>, 3/27, 박종훈 기자)

<한겨레>는 좀 다르더군요. 자사 기자들이 만든 기사에서는 거의 '미·영군'이라는 말로 통일돼 있습니다. '연합군'이라는 말이 안 쓰인다는 말이지요. 아마도 논의를 거쳐서 그렇게 하기로 결정한 듯 보입니다.

"미·영군의 이라크 공습이 1주일을 ..." (<한겨레>, 3/27, 함석진 기자)
"미·영군 진격전략 수정(제목)" (<한겨레>, 3/27, 박중언 이수범 기자)

▲ 31일 이라크 나시리야 인근 사막의 한 미군 캠프에서 미 해병대원이 카톨릭교 미사가 진행되는 동안 기도하고 있다.
ⓒ 로이터 뉴시스
인터넷 신문들은 미국과 영국군을 뭐라고 표현하고 있을까요? 우선 <프레시안>은 <한겨레>처럼 일관되게 '미-영군'이라는 말을 쓰고 있습니다.

"미-영군의 잇따른 오폭과 반미여론 급증으로 요르단, 터키,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잇따라 미-영군 미사일 및 전폭기의 영공통과를 거부하고 나서 미-영군을 크게 당혹케 하고 있다." (<프레시안>, 3/31, 박태견 기자)
"미-영군 사이의 갈등을 고조시켜 자칭 '연합군'이라는 말을 무색케 하고 있다." (<프레시안>, 3/31, 황준호 기자)

<프레시안> 기사만 유독 문 장단위로 길게 인용했습니다. <프레시안>의 '미-영군'은 지극히 의식적으로 선택된 말임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박태견 기자의 글에서는 한 문장에 '미-영군'이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나오는데, 다른 표현을 섞어 쓰지 않고 일관되게 '미-영군'으로 썼습니다.

황준호 기자의 글에도 '연합군'이라는 말을 쓰지 않겠다는 의지가 물씬 배어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연합군'이라는 말을 써야 할 자리에는 '자칭 연합군'이라고 해버린 것이지요.

<오마이뉴스>는 이라크 침략전 개전과 함께 <연합> <이데일리> <뉴시스>로부터 기사를 공급받고 있는데, 그 기사들에서는 대체로 '연합군'이라는 말이 그대로 쓰입니다.

<오마이뉴스> 전속기자와 시민기자들은 비교적 용어 선택에 신중한 편인 것 같습니다. 주로 '미군'이나 '영국군'처럼 개별적으로 부르는 경우가 많고, 둘을 한꺼번에 불러야 할 때에도 '연합군'이라는 말보다는 '미-영군'이라는 말을 더 많이 썼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두 기사에서는 '미-영 동맹군'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손병관 기자와 김민웅 기자가 쓴 것인데, 아마도 '코울리션 포시스(coalition forces)'를 '앨라이드 포시스(allied forces)' 즉 '연합군'과 구별하기 위해서 일부러 그런 것 같습니다. (나중에 보겠지만, 이점은 아주 중요합니다.)

"미-영 동맹군의 기세가 주춤..." (<오마이>, 3/27, 손병관 기자)
"미-영 침략 동맹군의 오판으로 ..." (<오마이>, 3/31, 김민웅 기자)

이렇게 보면 종이 신문들이 무비판적으로 <연합뉴스>를 따라 '연합군'이라는 말을 쓰는 반면 (<한겨레>는 제외), 인터넷 신문들은 '연합군'을 대신할 용어를 모색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용어 선택에 인터넷 신문들이 훨씬 더 의식적이라는 말이지요.

그런데, '연합군'이든 '미-영군'이든 혹은 '동맹군'이든, 그 용어가 그렇게 중요할까요? 중요합니다. 당사자인 미국과 영국, 특히 21세기를 맞아 유엔 대신 세계 질서를 좌우하고 싶은 미국 강경파들은 더 더욱 그럴 것이라고 봅니다.

부시를 주축으로 한 강경파들은 일찌감치 '코울리션 오브 더 윌링(Coalition of the Willing)'이라는 말을 내놓았습니다. 1년 전만 해도 미국의 '테러 근절 의지'를 가리키는 정도의 말이었는데 지금은 '세계 질서 재편 의지'로까지 확대됐습니다. 세계를 향해 '유엔을 버리고 여기로 와라'고 손짓하는 중입니다.

'유엔'과 '연합'은 지난 반세기 이상 세계 질서를 유지해왔습니다. 2차대전과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과 걸프전 등, 많은 전쟁들이 '유엔'과 '연합'의 이름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러나 미국은 이제 그것을 용도 폐기하려고 합니다. 새 이름이 필요하게 됐고 그것을 '코울리션'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미-영군'을 '연합국'이라고 부르는 것은 부시와 미강경파들에게는 못마땅한 일일 것입니다. 그들의 공식 발언을 잘 들어보면 그들이 의식적으로 '앨라이드(allied)' 대신 '코울리션(coalition)'을 쓰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연합국이 아니다'고 항변하는 것이지요.

저도 그들을 '연합군'이나 '연합국'이라고 부르기 싫습니다. 그들에게는 '코울리션'이 딱 맞는 이름입니다. 그건 '앨라이'라는 말과 '코울리션'이라는 말의 어원적인 뜻을 살펴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앨라이(ally)'의 어원은 라틴어 '알리가레(alligare)'입니다. 이 말은 아드(ad)와 리가레(ligare)의 합성어인데 '-에다가 단단히 묶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앨라이드' 혹은 '연합'이란 '한데 단단히 묶여진 것'을 가리키지요. '하나'라는 말입니다.

'동맹'이라는 말도 사실은 '연합'과 뜻이 같습니다. 연합(聯合)은 '한데 묶여 합쳐지는 것'을 강조할 뿐이고, 동맹(同盟)은 그 결과로 '하나됨'을 강조하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1차대전과 2차대전의 '연합국'을 '동맹국'이라고도 부르는 것이 관례입니다.

그러나 '코울리션'에는 '하나'라든가 '같다'는 뜻이 없습니다. 서로 다른 것이 '함께' 있을 뿐입니다. '코울리션'의 동사형 '코울레스'도 라틴어 어원입니다. '함께'라는 뜻의 '코우(co)'와 '자라다, 나이먹다'는 뜻인 '알레세레(alescere)'의 합성어이지요. 그래서 '코울리션'은 '함께 자란다' 혹은 '함께 나아간다'는 뜻입니다. 행동을 같이한다는 말입니다.

'코울리션'이 정치용어로 가장 자주 쓰이는 어법은 '연립 내각 (coalition cabinet)' 혹은 '연립 정부 (coalition government)'입니다. 각 정당이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일시적으로 정치 행위를 함께 하는 것이 바로 '연립'이고 '제휴'입니다. 반면에 각 당이 정체성을 버리고 한 데 모여 새로운 당을 만드는 것은 '연합'이라고 부르지요.

미국과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와 스페인과 폴란드를 비롯한 서른 몇 개 나라의 모임은 '연합'이라기보다는 '연립'이나 '제휴'에 더 가깝습니다. 이해타산이 안 맞으면 언제든지 헤어질 수 있는 모임이니까요.

벌써 스페인은 이라크에 전투병 파견을 거절했고, 오스트레일리아의 총리도 미-영 정상회담에 동참하기를 거부했습니다. 일본은 이라크 대사관 추방을 거절했고 한국도 파병 반대를 위해 의회를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미-영군'을 '연합군'이나 '동맹군'이라고 부르는 것은 마땅한 일이 아닙니다. '코울리션'만 추구하는 부시도 싫어하고, 기존의 '연합국'인 프랑스-독일도 싫어하고, 말과 개념에 괴리가 없기를 바라시는 리영희 선생님도 싫어하실 일입니다.

그러니 그들을 '연립군(聯立軍)'이나 '제휴군(提携軍)'이라고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하나 되기'는 아니어도 '나란히 서기'는 하잖습니까?

미-영 연립군.
미-영 제휴군.

이상한가요? 혹시 또 모르지요. 자꾸 쓰다보면 괜찮아질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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