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마'는 불교의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요 '매화'와 '난초'는 그야말로 전실(典實)한 유학의 군자도(君子道)의 하나다. 이 시화첩의 시들이 선(仙)과 불(佛)을 만지면서도 영가(詠歌)와 게송(偈頌)과는 거리가 멀듯이, 그려진 (그림이 아니라 친 것이지만) 달마와 난초와 매화가 문자향(文字香)이나 서권기(書卷氣) 또는 장바닥으로부터의 초탈(超脫)에 관계가 있지만(그렇다) 동시에 사실은 관계가 없다는(아니다) 점에서 새로운 문화정치학의 가능성을 찾을 수도 있을 것이다."
지난 해 7월, 8년만에 신작시집 <화개>(<오마이뉴스> 7월 2일자 참조)를 내놓았던 시인 김지하가 2년여간 선암사, 구룡사, 화엄사, 내소사, 운주사, 쌍계사 등을 순례하면서 쓴 시 32편과 직접 친 매화와 난초, 달마도의 수묵화를 함께 엮은 수묵시화첩 <절, 그 언저리>를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냈다.
<절, 그 언저리>는 김지하 시인의 말처럼 불교와 유학의 사상을 어루만지면서도 불교와 유학과는 거리가 먼 그런 책이다. 다시 말하자면 이 책은 불교와 유학의 언저리를 핥고 또 핥다가 마침내 불교와 유학을 탈피하고 초월한 그런 책이라는 것이다.
이 책 속에 나오는 시들은 말 그대로 선과 불을 동시에 어루만지는 척하다가 어느새 선과 불을 벗어나, 제 홀로 긴 그림자를 끌며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다. 시인이 친 달마도와 매화, 난초 또한 마찬가지다. 시인의 말처럼 달마는 불교의 보살행을, 매화와 난초는 유학의 군자도를 나타내고 있다.
또 언뜻 보면 시인이 친 달마와 매화와 난초는 불교와 유학이 전하는 사상의 옷을 그대로 걸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막상 그 두터운 옷을 모두 벗겨내면 속내는 다른 곳에 닿아 있다. 그렇다. 시인은 어쩌면 이번 수묵시화첩을 통해서 새로운 문화정치학의 가능성에 대해 저울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지금은 문예부흥과 문화혁명의 때다. 젊은이들의 감수성과 상상력이 '신화'(神話)와 '복고'(復古)와 '엽기'(獵奇)와 '명상'(瞑想)과 '환상'(幻想)과 '희극(喜劇) 그리고 숭고비장의 생태학과 장엄한 생명의 세계관을 지향하고 동경한다. 미학혁명이 요청되고 있는 것이다. 그 혁명은 추의 미학이 문예부흥과 문화혁명을 관통하면서 동시에 안팎에서 추진될 것이다."
<절, 그 언저리>는 지난 2001년부터 2002년까지 김지하 시인이 여러 문예지에 발표한 시 32편, 그러니까 시인이 우리 나라 곳곳에 뿌리 박고 있는 절을 순례하면서 쓴, 일종의 주제가 있는 시편들이 실려 있다.
산문 밖 개울가에서
합장하고 헤어질 때
검은 물위에 언뜻 비친
흰 장삼 한자락이 펄럭,
아 이제야 알겠구나
흰빛의
서로 다른
두 얼굴을
('백학봉 1'(白鶴峰) 몇 토막)
이 시는 지선스님과 헤어질 때, 지선스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쓴 시다. 이 시 속에는 검고 희다는 두 가지 색채가 시인의 마음을 툭, 툭, 건드린다. "검은 물 위에 언뜻 비친/흰 장삼 한자락이 펄럭"이는 걸 바라보는 시인은 물 위에 비치는 지선스님의 흰 장삼 한자락을 바라보며, 흰빛 속에 일렁이는 검은 빛을 찾아낸다.
다시 말하자면 티끌 한점 없어 보이는 그 흰빛이 결국에는 검은 빛이 있었기 때문에 더욱 하얀 빛을 낼 수 있었다는 그런 말이다. 그렇다. 애당초 밤이 없다면 어떻게 그 반대가 되는 낮이 있을 수가 있었겠는가. 여기서 시인은 흰 빛과 검은 빛이 하나이면서도 둘이요, 둘이면서도 곧 하나라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 말은 시인의 말에서 밝힌 것처럼 "흑백화는 그 나름의 색채관을 갖고 있다. 내 식으로 표현하자면 '흰그늘' 이다. 색채영화가 처음 나왔을 때 여기에 대한 비난의 기조는 잠재적으로 모두 바로 이 '흰그늘'에 연계된 것들이었다"와 맞닿아 있다. 흰그늘이 무엇이겠는가. 그것은 바로 낮과 밤, 희망과 절망, 기쁨과 슬픔 등이 어우러진, 우리들의 세상살이가 아니겠는가.
수묵화 또한 마찬가지다. 수묵화가 무엇인가. 흰 바탕에 검은 먹물을 친 그런 그림이 아닌가. 그래. 어쩌면 김지하 시인의 사상과 미학의 뿌리는 바로 이 '흰그늘' 이란 세 글짜로 요약되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그는 달마와 매화와 난초를 치고, 절 언저리를 돌아다니며 시를 쓰는 것이 아닐까.
검은 숲에 우는
짐승소리들 법설이요
물방울 모두 다
보살이며 신장이요
잎새들 새 잎새들
모두 반야이거니
('화엄(華嚴) 율려(律呂)' 몇 토막)
김지하 시인의 '흰그늘'은 이 세상의 모든 모순이 화해하여 하나로 화합되는 그런 세상이다. 흰 빛과 검은 빛은 서로 극과 극을 향해 치닫는 모순의 원형이다. 하지만 그 극과 극을 달리는 모순의 원형은 '흰그늘' 이라는 세 글짜 속에서 화엄과 율려로 화합 된다. "검은 숲에 우는/ 짐승소리들"이 모두 "법설이요/ 물방울 모두 다" 가 "보살이며 신장" 이고 "잎새들 새 잎새들"이 모두 반야인 것이다.
이처럼 김지하 시인은 '흰그늘'을 통해서 이 세상의 모순된 모든 것을 하나로 화합시켜낸다. 또 그 화합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그 이상의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그는 그의 시에 대해서도 스스로 이렇게 평가한다. "백학봉, 쌍계사, 운주사, 지장암 등은 다소 성공적으로 보인다. 나머지는 파품(破品)인데 그렇다고 버릴 것까진 없겠다. 공색(空色)과 청탁(淸濁)이 함께 하듯이 잘난놈과 못난놈은 반드시 엇섞이게 마련" 이라고.
절,
그 언저리 무언가
내 삶이 있다
쓸쓸한 익살
達摩(달마) 안에
寒梅(한매)의 외로운 예언 앞에
바람의 항구
서너 촉 風蘭(풍란) 곁에도
있다
('절, 그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