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권 초기에 집권당 내부에서 대통령의 당직이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나온 것은 전에 같으면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대통령에게 당을 떠날 것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공개적으로 나오는 것은, 정권 말기에 권력누수가 심각하게 진행된 상황에서나 있었던 것이 역대 정권들에서의 경험이었다. 이렇게 집권 초기에, 대통령의 지도력이 건재해있는 상황에서 당적 이탈 요구가 공개적으로 나온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물론 그같은 당적이탈 요구에 가세하는 인사들이 표면적으로는 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 요구에 깔린 정서만큼은 구주류 내부에서 공유되고 있는 분위기였다. 당적 이탈 요구가 민주당내 다수의 정서를 대변한 것은 아직 아니었지만, 결국 노 대통령과 민주당 사이의 미묘한 기류를 그대로 드러낸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돌아보면 대통령선거 이후 노 대통령과 민주당 사이의 관계는 엇박자의 연속이었다. 노 대통령은 당의 개혁을 주문했지만, 당개혁안은 아직도 통과되지 못한채 무산위기에 직면해있다. 민주당은 대북송금 특검법에 대한 거부권을 건의했지만, 노 대통령은 여야 재협상을 전제로 이 법을 공포하였다. 노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을 결정하였지만, 민주당 안에서는 파병반대의 목소리가 야당보다도 더욱 크게 확산되었다. 이쯤되면 노 대통령이 민주당의 대통령후보였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이다.
| | | 갈수록 멀어지는 노무현과 김근태 | | | |
| | | ▲ 김근태 의원 | | 이라크 파병동의안 처리가 진통을 겪고 있을 때, 국회 주변에서는 민주당이 야당이고 한나라당이 여당같다는 농담이 오갔다. 노무현 정부가 결정한 파병을 반대하는 목소리가 민주당내에서 더 컸던 상황을 빗댄 것이었다. 그때 민주당내 파병반대 대열의 가장 앞에는 김근태 의원이 서 있었다. 대선 이후 한동안 뒤로 물러나있던 김 의원은 이번 파병반대운동을 계기로 다시 전면에 나섰다.
그런데 노 대통령의 결정에 반대하는 국회내 파병반대 움직임에 김 의원이 앞장선 상황을 보며 지난 대선을 떠올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그때도 김 의원은 노 대통령과 같은 편에 서지않고 후보단일화 입장에 서며 당시 노무현 후보를 사실상 압박했다.
이번에 다시 김 의원은 노 대통령의 결정에 반대하며 그의 처지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역할을 한 셈이다. 물론 파병반대문제야 정치적 문제라기보다는 양심과 소신의 문제인지라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김 의원과 노 대통령 사이의 엇박자는 다시 한번 시선을 모으는 대상이 되었다.
그러고보니 대선 이후 두 사람 사이는 그리 나아진 것이 없는 모습이다.
필자가 과문한 탓인지는 몰라도 노 대통령이 김 의원에게 도와달라는 손을 내밀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고, 거꾸로 김 의원이 노 대통령을 돕겠다는 뜻을 밝혔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다. 혹 대선과정에서의 앙금을 서로가 아직도 털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스타일의 차이이든, 정서의 차이이든간에, 그렇지 않아도 개혁추진세력의 힘이 모자라는 상황에서, 과거 개혁정치를 이끌었던 두 사람 사이의 거리는 유난히도 멀어보인다. / 유창선 기자 | | | | |
이밖에도 현실적인 갈등의 소재들은 수없이 많다. 대선에서 승리한 민주당은 새 정부 구성에서 당인사들의 진출을 기대했지만, 인수위원회, 청와대, 행정부, 그 어느 곳에서 당출신 인사들이 중용되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런가하면 민주당에서는 다가오는 정부산하단체와 공기업인사에서 당출신 인사들에 대한 배려를 거듭해서 요청하였으나, 청와대는 끝내 분명한 답을 주지 않았다.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자신이 집권당임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으며, 노 대통령은 노 대통령대로 자신이 민주당 출신의 대통령임을 실감하기 어려운 분위기이다.
물론 당정분리가 제도화된 상황에서 대통령과 집권당의 관계가 이전과 같을 수는 없다. 어차피 당에 대한 대통령의 역할은 구조적으로 제한되게 되어있다. 아니, 엄격히 말하자면 대통령이 당의 일에 개입하는 것은 당정분리 원칙에 위반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대통령과 집권당 사이에는 정치적 보조라는 것이 있다. 국정운영 혹은 정국운영에서 서로 협의할 것은 협의하며 공동보조를 맞추어 나가는 일은 필요하다. 당정분리라고 해서 이같은 노력조차 기울여지지 않는다면 국정의 혼란을 초래하게 되어 있고, 이는 대통령선거에서 정당공천의 의미를 훼손시키는 문제를 낳게 된다. 그래서 당정분리 아래에서도 대통령과 집권당은 정치적 행보를 함께 해나가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청와대와 민주당 사이의 관계를 보면 이같은 기본적인 전제조차 성립되지 않는 심각한 난기류에 빠져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물론 정책사안들에 대한 청와대와 민주당 사이의 협의는 계속되고 있지만, 정작 정국의 흐름을 좌우하는 주요 사안에 대해서는 사사건건 엇박자를 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적이탈은 정계개편의 신호탄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구주류 인사가 발설한 당직이탈 요구가, 노 대통령과 코드를 같이하고 있는 신주류 핵심의원들 사이에서도 거론되고 있다는 점이다.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으로 불리우는 한 의원은 지난 3일, “당 개혁안이 지금처럼 한발도 앞으로 나가지 못하면 노 대통령에게 당적이탈을 건의할 것”이라며, “노 대통령은 당적 이탈후 국민을 상대로 초당적 입장에서 국정운영에 전념하면 된다”고 말한 것으로 보도되었다. 실제로 신주류내 몇몇 의원 사이에서는 당개혁이 끝내 좌초될 경우 노 대통령의 당적이탈이 필요하다는 판단을 주고받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구주류측에서 제기되는 당적이탈론이 대통령책임론이라고 한다면, 신주류 일각에서 거론되는 당적이탈론은 개혁신당론과 맞물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지금과 같은 민주당에 발목을 잡혀 제대로 개혁드라이브를 걸지 못하느니, 차라리 민주당을 떠나 초당적 입장에서 국정을 운영하는 것이 개혁의 명분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임기를 시작한지 얼마되지도 않은 대통령이 아무런 원내 기반도 없이 국정을 운영해 나가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인지는 의문이다. 자칫하면 기존의 여야 모두가 도와주지 않는 ‘식물 대통령’이 되어버릴 위험마저 있기 때문이다. 당적이탈 필요성을 거론하고 있는 신주류 인사들이 이같은 현실을 모를 리가 없다면, 결국 당적이탈의 귀착점은 개혁신당을 통한 정계개편에 있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런 점에서 노 대통령의 당적이탈은 정계개편의 신호탄이 되게 되어있다. 현재의 민주당이라는 기득권을 포기하는 당적이탈은, 포기한 기득권을 상쇄할 수 있는 새로운 무엇을 만들어야 현실적 대안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민주당 신주류 일각에서 거론된 당적이탈론은 상황에 따라 정국의 뇌관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과연 노 대통령의 당적이탈은 현실적 가능성이 있는가. 현재로서는 그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아 보인다. 우선은 민주당내에서 대통령의 당적이탈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아직은 소수이다. 구주류내에서도 당적이탈을 현실적인 대안으로 생각하는 숫자가 그리 많지 않은 분위기이며, 신주류내에서도 당적이탈론은 소수 개혁신당론자들에 국한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청와대측도 당적이탈의 가능성에 아직은 회의적인 분위기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 길은 민주당의 의석마저도 포기하는 대단히 위험부담이 큰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당적이탈은 당분간 민주당내에서 세력간의 상호경고용 수준에서 계속 오갈 전망이지, 당장에 현실화될 가능성은 적어보인다. 그러나 몇가지 유동적인 변수는 존재한다.
우선 민주당의 당개혁안이 무산되고 그에 따른 당내 분열이 심각한 양상으로 치달을 경우이다. 다음으로 4.24 재보궐선거의 결과이다. 만약 민주당이 패배하는 경우에는 이대로는 내년 총선을 치를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신당창당론이 부상할 가능성이 있으며, 이때 당적이탈 문제가 본격적으로 거론될 가능성이 있다. 게다가 덕양갑에서 개혁당의 유시민 후보가 당선되는 경우, 개혁신당 창당론이 한층 힘을 받을 여건이 갖추어질 것이다.
당분간 당적이탈론은 수면 아래에 잠복해 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적이탈론이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될 때, 정국은 대대적인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