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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바위에서 내려다 본 운주사 전경
공사바위에서 내려다 본 운주사 전경 ⓒ 이재성
미완의 도장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느껴보려면 이른 봄 운주사로 가라. 새싹이 돋고, 꽃이 열리고, 나비가 나는 생명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리고 오래 전에 사람들의 손길이 떠난 폐사지. 그 철저한 대조 속에 내리는 비를 맞으며 걸어 보라. 봄날 내리는 비를. 모든 생명이 태어나는 순간 미완의 도장에 서서 오래전 역사 속 인물들의 귀를 씻었을 바람 소리, 물소리를 들으며 걸어 보라. 비 오는 절간에서 듣는 풍경소리 목탁소리가 가슴 깊은 곳을 휘돌아 나갈 것이다.

백두대간을 뻗어 나온 산줄기는 무등산을 지나 국사봉과 화학산으로 뻗어 마침내 운주산 다탑봉 천불천탑에 다다른다. 전라남도 화순군 도암면 대초리와 용강리 일대에 자리잡고 있는 운주사. 양쪽으로 벌어진 구릉의 산등성이 사이에 돌부처와 돌탑이 흩어져 있다. 평지나 다름없이 얕으마한 곳으로 일주문도, 천왕문도, 사천왕상도, 부도 밭도 없는 절. 천불천탑의 골짜기를 따라 바람과 구름만이 왕래할 뿐이다.

운주사의 돌부처는 꾸밈이 없다. 많은 사람들이 서민적인, 토속적인, 해학적인, 못난이와 같은 수식어를 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돌부처의 결정체라 할 수 있는 석굴암 본존불에 익숙한 눈으로 이들을 들여다보면 한결같이 못났다. 돌에다가 조금씩만 손을 대서 눈, 코, 입을 만들어 놓은 형상이 꼭 서민들의 얼굴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생김새는 물론 형체, 비례도 어색해 부처라기보다는 서민들의 모습 같다.

돌탑 역시 자연스런 아름다움을 품고 있다. 자연석 기단에 특이한 장식 무늬, 원반형이나 항아리 같은 옥개석으로 이루어졌다. 판석을 다듬지 않고 그대로 옥개석으로 삼은 경우도 있다. 이렇게 돌부처와 돌탑이 흩어져 있으면서도 하나의 덩어리로 조화를 이룬다. 이것이 운주사의 신비한 매력이다.

그럼 이 아름다운 노천 박물관을 누가, 언제, 왜 만들었을까? 그동안 운주사 천불천탑과 관련해 통일신라말부터 고려시대에 조성됐을 것이란 추정만 있을 뿐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고 여러 가지 설이 분분하다.

먼저,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은 도선국사와 관련된 풍수비보설이다. 도선이 우리나라 지형을 배로 보고 호남 땅이 영남 땅 보다 산이 적어 배가 한쪽으로 기울 것을 염려했다. 따라서 그대로 두면 배가 동쪽으로 기울어 땅의 정기가 일본으로 흘러가는 것을 막기 위해 도력(道力)으로 천불천탑을 조성했다는 이야기다. 이는 운주사의 다른 이름 운주사(運舟寺)를 뒷받침 해 주고 있다. 그러나 운주사 유적들은 12~13세기의 양식을 보이는데 도선국사는 9세기에 살았던 인물이니 연대가 맞지 않는다. 이를 학자들은 풍수설이 민간에 유행하던 후세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어찌되었든 전설을 들어보면, 도선 국사가 하룻동안 하늘의 석공을 불러 천 개의 돌탑과 천 개의 돌부처을 만들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와불이 천불천탑의 마지막이었던 모양이다. 이 불상을 일으켜 세우면 세상이 바뀌고 천년동안 태평성대가 계속된다고 했는데 안타깝게도 이 와불을 일으켜 세우려는 순간 첫닭이 울었다. 그래서 석공들이 하늘로 올라가 와불을 일으켜 세우지 못했다고. 그리하여 운주사는 미완의 도장이 된다. 그 닭울음소리는 일하기 싫어한 동자승이 흉낸 것이라고도 하던데….

또, 천민과 노비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며 만들었다는 미륵도량설이 있다. 이는 운주사의 돌부처나 돌탑들이 무척 서민적이고 파격적인데서 연유한 것으로 보여진다. 특히 황석영의 소설 <장길산>에서 와불 이야기로 마무리를 하면서 미륵신앙의 성지로 부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역시도 석연치 않다. 운주사가 창건된 시기는 고려시대인데 장길산은 조선 숙종때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끝으로 고려를 침략한 원나라에 의해 대몽항쟁기인 1270년경 세워졌다는 설이 있다. 이는 국립중앙박물관 소재구 학예연구원의 주장으로 고려시대불교유적과 다른 점을 들어 설명하고 있다.

먼저 몽골인들은 티벳 불교의 영향으로 형성된 라마불교의 신봉자들로 다탑 조성의 관습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운주사에 무더기로 돌탑과 돌부처를 조성했다는 점이 한국 전통 불교 양식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또 하나 운주사 돌부처들이 천편일률적으로 길쭉한 타원형 얼굴에 긴 코와 손 모습에서 이국적 형상을 드러내고 있는 점이다. 돌탑의 경우도 원반형 탑, 계란형 탑과 같은 라마풍의 낯선 모양이 나타나고 돌탑장식에 나타나는 마름모형, X자형 등의 무늬는 몽골식 도안과 관련이 있다는 점을 들고 있다. 이러한 운주사의 돌탑 모양이나 장식이 우리나라 사찰에서는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운주사 입구 9층 돌탑. 산등성이에 공사바위가 보인다.
운주사 입구 9층 돌탑. 산등성이에 공사바위가 보인다. ⓒ 이재성
이는 원나라 군사가 진도, 제주도에 있는 고려 삼별초군에 맞서기 위해서 운주사 천불천탑을 조성하고 병사들의 무운(武運)을 빌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화순은 인근 나주평야에서 군량미를 동원할 수 있어 당시 국제 항구였던 영산강의 포구를 통해 중국과 교류가 수월해 군사 주둔지로는 제격이었다는 주장이다.

소재구 학예연구원의 주장은 비교적 학문적인 신뢰를 받고 있다. 그러나 이 설 역시 이를 뒷받침 할 만한 구체적인 유물이나 유적이 확인되지 않아 좀 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이외에도 통일신라 말 호족들이 세웠다는 설, 고려 승려 혜명이 창건했다는 설 등이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 명확하게 운주사를 누가, 언제, 왜 창건했는지 학설로 정해지지 않고 있다. 그래서 인지 운주사를 다녀오면 가슴속에 바람 가득 든 풍선을 담고 온 듯도 하고 아주 힘겨운 사랑을 시작한 것 같기도 하다.

발길이 머무는 곳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어디 가고 돌부처72기와 돌탑12기만이 천불천탑의 전설을 안고 쓸쓸함을 풍길 뿐이다. 입구에 9층 돌탑부터 공사바위에 이르는 골짜기까지 크기도 모양도 다양한 돌탑과 돌부처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기도 하고 삼삼오오 모여 있기도 하다. 독특하면서도 다양한 얼굴을 하고 소곤대고 있다.

입구에 들어서면 먼저 9층 돌탑이 보인다. 일명 손님맞이 탑이다. 돌탑을 자세히 보면 층마다 특이한 무늬가 있다. 소재구 학예연구원이 말하는 마름모형, X자형, V자형 등의 무늬를 볼 수 있다. 운주사는 풍수지리상 배형국이라 했는데 9층 돌탑은 그 중에 돛대 역할을 한다고. 그 만큼 이 탑은 운주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볼 수 있다.

운주사 입구 오른쪽, 양지바른 곳에서 해바라기를 하고 있는 돌부처들은 영화 '아제아제바라아제'에도 나왔다고 한다. 이 돌부처들 중 주존은 입상으로 운주사 돌부처 중에서 가장 키가 크다고 한다. 그 산등성이 위에는 다듬지 않은 돌덩이를 크기순서대로 올려놓은 일명, 동냥치 탑, 거지 탑으로 불리는 돌탑도 볼만하다.

9층 돌탑을 지나 계속 가게되면 가운데쯤에 석불감쌍배불좌상이 나온다. 이는 돌로 전각을 짓고 그 속에 돌부처 두기가 등을 맞대고 앉아 있는 독특함 엿볼 수 있다. 남향한 불상은 결가부좌하고 오른 손을 배에 댔으며 북향한 불상은 옷 속에서 두 손을 모으고 있다. 석불감쌍배불좌상은 <동국여지승람>이나 기타 문헌의 운주사를 언급한 내용에서 늘 다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는 석불감쌍배불좌상이 운주사의 여러 불상 중에서 주목받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석불감쌍배불좌상 뒤로 둥근 얼굴을 내밀고 있는 원형타층돌탑이 보인다. 일명 호떡 탑, 도넛 탑이라고 불린다. 기존의 탑에 대한 고정관념을 완전히 깨뜨린 모습으로 큰 키에 어울리지 않게 동글동글한게 귀엽다.

바로 뒤에 대웅전이 있다. 이어 실패 탑, 항아리 탑 등으로 불리는 돌탑들이, 돌부처들이 마애여래좌상까지 줄을 섰다. 공사 바위를 오르다 보면 바위 아래쪽에 마애여래좌상이 눈에 띈다.

마애여래좌상은 운주사의 유일한 마애불로 비교적 반듯한 이목구비와 불꽃무늬 광배가 있는 등 다른 돌부처에 비해 제법 부처로서의 형식미를 갖추고 있다. 나무가 우거져 시야도 가리고 이끼도 많이 껴 상했지만. 나무 사이로 은근히 들어 나는 마애불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햇빛에 따라 명암을 달리 하는 얼굴의 자연스러움을 읽을 수 있다. 그 곳에 서게 되면 왜 토테미즘이 자리를 잡았는지 알게 된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이 모아지니 말이다. 그리고 빌었겠지.

서산 매애삼존불은 누각 안에 들어가면서 자연적인 아름다움을 잃어버렸다. 보호는 받을지 모르지만 이미 생명을 잃어 버렸다. 박물관에 박제되어 앉아 있는 것 같았으니 말이다. 그런데 마애여래좌상은 살아있다. 선운사 도솔암 암각여래상처럼. 그러나 자연적인 이 아름다움을 지키면서 유적을 보호하는 일. 이것이 후손들의 숙제라는 생각이 든다.

여기서 좁은 산길을 따라 좀 더 올라가면 공사바위가 나온다. 운주사의 모든 전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공사바위에서 정면을 보면 우리가 지나쳐왔던 9층 돌탑, 호떡 탑, 석불감쌍배불좌상, 대웅전, 항아리 탑이 보인다. 나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보인다. 그리고 모든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듯한 착각에 빠지게 된다. 운주사가 손바닥처럼 훤히 내려다보이므로.

한숨 돌리고 나면, 그냥 쭉 나오지 말고 왼쪽 소나무 숲으로 올라가라. 그 곳에서 그 유명한 와불을 만날 수 있다. 와불은 실제로 와불이 아니라고 말한다. 일으켜 세우려 했음으로. 만약 일으켜 세웠다면 단연 운주사의 중심불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와불이 일어나면 세상이 바뀐다는 설화가 있다. 와불을 만나러 가는 길에도 돌탑과 돌부처들을 만날 수 있다. 그 중에 발길을 붙잡는 돌부처가 있다. 일명 머슴부처라고 하는 시위불(侍衛佛)이다. 외롭게 혼자 서서 와불을 보좌한다.

와불을 보고 내려오다 보면 왼쪽 산등성이에 칠성바위가 있다. 커다랗고 동그란 7개의 평평한 바위다. 그 모습이 마치 하늘에 떠있는 북두칠성과 비슷해 보인다. 그래서 칠성바위인 모양이다. 칠성바위는 칠성신앙이 고려시대에 불교에 수용되었다는 사례로 볼 수 있다. 늦은 가을 날 가게되면 누우런 솔잎 이불을 덥고 있는 둥글 넙쩍한 바위들이 볼만하다.

이렇게 때 지난 답사기를 쓰고 있는 건, 단순히 저 비 때문이다. 지루하게, 아주 느리게 내리는 비. 봄 비 때문이다.

운주사의 아름다움과 전설을 가슴에 안고 집으로 오는 길. 휘파람이나 풀피리를 불어보라. 해바라기하고 있던 돌부처의 이마 위에 햇살을 위하여. 혼자 외로이 서 있던 머슴부처를 위하여. 일하기 싫어하던 동자승을 위하여. 저 미완의 도장을 위하여. 해가 있을 때나 없을 때나 나를 따라다니는 그림자를 위하여. 운주사 곳곳에 피어났을 제비꽃, 양지꽃, 현호색을 위하여. 구름을 위하여. 바람을 위하여. 이 지루한 봄비를 위하여. 휘파람이든 풀피리든 하모니카든 불어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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