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대통령과 김대중전대통령이 22일 오후 청와대에서 만찬을 하기에 앞서 환담하고 있다. ⓒ 청와대
[기사 대체 : 22일 밤 11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22일 저녁 이취임식 이후 56일만에 만난 노무현 대통령에게 세가지 조언을 했다.
첫째, 북핵 문제에 대해서다.
"북핵 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풀어야 한다.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막아야 한다. 7000만 국민의 생사가 달린 문제이다. 그 문제에 관한 한 어떤 경우에도 한국이 평화적 해결 원칙을 반드시 지켜나가고 주도해 나가야 한다"
둘째, 한미관계와 남북관계에 대해서다.
"한미관계와 남북관계는 병행해서 잘 풀어나가야 할 것이다. 그래야 우리의 자주적인 입장이 강화될 것이다."
셋째, 현재 진행중인 대북 송금 특검에 대해서다.
"현대의 대북 송금이 크게 보아 사법적 심사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소신에는 변화가 없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저녁 6시부터 7시30분까지 약 1시간30분간 진행된 비공개 만찬 이후 만찬장에 들어온 송경희 청와대 대변인 등 비서진에게 이 세가지를 불러줬다.
이날 두 사람의 만찬은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주변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다는 점, 대북송금 특검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 노 대통령의 방미를 앞둔 시점이라는 점, 4·24 재보선 이틀 전이라는 점 등 때문에 만남 자체가 큰 관심을 모아왔다. 이 자리에서 과연 어떤 이야기가 오갈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만찬 이후 김 전 대통령은 궁금해하는 시선을 향해 위 세가지를 말했다.
물론 1시간30분 동안 두 사람이 나눈 대화가 이것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청와대 2층 백악실에서 진행된 이날 만찬은 노 대통령 내외와 김 전 대통령 내외, 네명 만이 참석한 비공개 만찬이었다. 통상적으로 이런 비공개 만찬은 주인공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비서진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식사를 하며 대기하다가, 모두 끝나면 들어가 구술을 받아 적어 언론에 공개한다. 따라서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자세한 사항은 비서진도 알지 못한다.
오간 이야기 전체는 알 수 없지만, 김 전 대통령이 공개한 세가지는 모두 대북 문제와 관련된 것이다. 이는 노 대통령에 대한 조언으로 볼 수 있지만, 듣기에 따라서는 질책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북핵 문제에 있어서 '한국의 주도적 역할' 강조나, 한미-대북 관계에서 '자주적인 입장 강화'를 강조한 부분이 특히 그렇다.
송 대변인에 따르면 노 대통령은 첫번째 북핵 문제 평화적 해결문제 대해서 "지당하신 말씀"이라며 "반드시 그렇게 해 나가도록 하겠다"고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하지만 나머지 문제에 대해서는 의견을 경청하고 주로 말을 듣는 입장이었다고 송 대변인이 전했다.
송 대변인은 "만찬 분위기는 대체로 김 전 대통령께서 여러 국정 현안에 대해 주로 말씀을 많이 하고 노 대통령은 주로 경청하는 입장이었다"면서 "매우 반갑게 식사를 하시고 많은 이야기를 진지하게 나눴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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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와대
"5년간 건강을 갉아먹고 살았다" 수척해진 DJ
지난 5년간 생활했던 청와대를 56일만에 다시 찾은 김 전 대통령은 무척 수척해져 있었다. 김 전 대통령은 비서들의 부축을 받으며 차에서 내렸으며 지팡이를 짚고 만찬장으로 향했다. 노 대통령과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아 차를 한모금 마신 후에 말을 잇기도 했다.
노 대통령이 "지난 번 병원에 가신 것은 특별히 증세가 있어서가 아니라 검사받으러 가신 거죠"라고 묻자, 김 전 대통령은 "관절이… 가서 미리 상의할 겸…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건강이 다 좋다고 할 수는 없죠"라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일주일 동안 체크해 보니 5년 동안 건강을 갉아먹고 살았다"고 말했다.
텔레비전을 통해 김 전 대통령의 수척한 표정을 접한 네티즌들은 "2개월여만에 어떻게 저렇게 변하셨나..."하고 놀라움을 나타내기도 했다. 이날 국민들 앞에 나타난 DJ의 모습은 그가 퇴임후 어떤 나날을 보냈는지에 대해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다.
동교동의 적막 : 이희호 여사와 단둘이 식사
김 전대통령은 지난 2월 25일 퇴임과 함께 동교동에 돌아온 후 계속 이희호 여사와 단 둘이 식사를 했다. "인사차 온 손님들과 식사를 한 적이 한 차례도 없다"고 한 측근은 말했다.
임인택 전 건설부장관 등 국민의 정부 장관들과 신기남, 추미애 의원 등 민주당 국회의원들이 동교동을 방문한 적이 있지만 이들과 함께 식사를 하지는 않았다. 식사준비를 도와주는 '주방 아주머니'가 두 사람의 식사를 지켜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동교동 주민들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 부부는 가끔 사저 주변의 식당에서 삼계탕이나 복어지리 등을 시켜먹었다고 한다. 식당으로 외식을 가지 않고 배달을 시켜먹은 것이다. 가급적 바깥 사람과 만나지 않으려는 것으로 비쳐졌다.
이렇게 단출한 식사를 한 것에 대해 주변에서는 이런 저런 추측이 잇따랐다. 건강이상설, 심기불편설 등이 그것이다. 국민의 정부의 한 비서관은 "식사를 잘 하시는데 왜 건강이상설이 자꾸 나오는지 모르겠다"고 소문을 수습하려고 애썼다. 그러나 그런 수습 노력이 있던 직후인 지난 주, 김 전 대통령은 건강검진을 받으러 1주일간 병원에 입원했다.
무엇보다 기력이 많이 떨어진 것이다. 출판계와 언론계에서는 국민의 정부 시절을 회고하는 회고록을 집필해보는 것이 어떻느냐는 제안을 측근들에게 했지만 "지금은 회고록 쓰실 기운이 없다"는 말만 들었다고 한 언론계 인사는 말했다.
"청와대로부터 특검법 공표 사전 연락 없었다" 섭섭
김 전 대통령은 지난 3월14일 대북송금 특검법이 통과되면서부터 기운이 더 떨어졌다고 측근들은 말한다. 특검법이 논란이 되고 있을 때, 김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이 특검법을 거부할 수도 있다는 일부 언론보도에 대해 일종의 희망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국민의 정부의 한 수석은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갖고 특검법 공표 여부를 최종적으로 논의하고 있을 때 한 언론사 간부에게 전화를 걸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느냐"고 물었다. 이 언론사 간부가 "청와대에서 동교동으로 어떤 연락이 없었느냐"고 되묻자 "우리는 끈이 떨어졌다, 답답해서 물어본다"고 말했다.
노 대통령이 3월 14일 오후 엎치락뒤치락 끝에 특검법을 원안대로 공표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한 측근은 "(김 전 대통령이) 언론에 보도된 것보다 훨씬 더 섭섭해했다"고 전했다. 김 전 대통령 측이 가장 섭섭해한 것은 특검을 공표할 때 청와대 쪽으로부터 아무런 사전연락을 받지 못했다는 점이다. "어찌 그럴 수 있나"는 말이 한 측근으로부터 나왔다.
이 즈음 동교동쪽에서는 체념섞인 말들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흑백을 쥔 사람이 아닌 훈수꾼에 불과하다. 칼자루를 쥔 것이 아니다"는 말도 나왔다. 그러면서 한쪽에서는 "YS에게 우리도 당해봤지만... 전직 대통령이 잘해야 나라가 편하다"는 의미깊은 말도 나왔다.
김 전 대통령 측은 이번 특검에 대해 "결국은 김대중 특검이다"고 보고 있다. 국민의 정부의 한 비서관은 "한나라당의 전략은 이번 특검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을 '김대중의 양자'로 만들어 다음 총선에서 이기려고 한다"고 특검배경을 분석한다.
김 전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노 대통령을 만났을 때 어떤 말을 건넸을까? <오마이뉴스>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 측은 노 대통령 측에 인수위 시절 다음과 같은 조언을 전해줬다. 그 조언은 크게 'DJ와 노무현의 4가지 조건의 차이'에 대한 것이었다.
"첫째, 국민의 정부 초기는 경제위기였다. 그런데 참여정부 초기는 안보위기다. 경제위기때는 대통령의 리더십이 자동으로 형성되지만 안보위기때는 그렇지 않다. 보수세력에게 기회를 주는 국면이기 때문이다.
둘째, 국민의 정부 초기에는 민주당이라는 확고한 당이 있었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민주당과 약하게 연결돼 있다.
셋째, 국민의 정부는 자민련과의 공동정부였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단독정부이고 그나마 당과의 긴밀한 연대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
넷째, DJ는 카리스마가 있었다. '준비된 대통령'이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통했다. 그러나 노무현은 대통령으로서는 좀 가볍다는 인식이 있는 게 사실이다.
이렇게 크게 네가지 점에서 조건의 차이가 있는만큼 이 점을 간과하지 말고 초기에 국정을 잘해야 한다."
김 전 대통령이 1시간30분동안의 만남에서도 이런 비슷한 이야기를 해줬는지는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DJ가 주로 조언을 해줬고 노 대통령은 극진하게 예우를 하면서 경청을 했다는 것이다.
ⓒ 청와대
노 대통령, DJ에 극진히 예우
노 대통령 내외는 청와대 본관 현관 바로 안쪽까지 나가 김 전 대통령 내외를 맞이했다. 현관 밖에는 문희상 비서실장과 유인태 정무수석이 대기하며 차에서 내리는 김 전 대통령을 맞았다. 김 전 대통령이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미리 기다리고 있던 노 대통령은 몇 발자국 걸어 나가며 "어서 오십시오"라고 인사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권양숙 여사는 이희호 여사에게 먼저 타라고 권했다. 이 여사가 먼저 오르고 이어 권 여사가 들어갔다. 김 전 대통령은 노 대통령을 향해 "먼저 가십시오"라고 말했지만, 노 대통령이 다시 "먼저 타십시오"라고 양보했다. 김 전 대통령이 엘리베이터에 올랐고 노 대통령이 제일 마지막에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만찬 장소가 마련된 2층, 김 전 대통령이 엘리베이터를 내려서 먼저 걸어나가자 노 대통령은 조금 걸음을 빨리해 나란히 보조를 맞춰서 백악실에 들어섰다.
백악실 자리에 앉자 노 대통령은 "지난번 병원에 가신 것은 특별히 증세가 있어서가 아니라 검사 받으러 가신 거죠"라고 물었다.
김 전 대통령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자 차를 한모금 마신 뒤) "관절이… 가서 미리 상의할 겸…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건강이 다 좋다고 할 수는 없죠."
노 대통령 "분주하면 분주한 대로, 쉬면 쉬는 대로 긴장이 풀어지니까…."
김 전 대통령 "일주일 동안 체크해보니 5년 동안 건강을 갉아먹고 살았어요."
노 대통령 "저희는 50일 정도 됐는데 답답합니다. 큰 감옥에 사는 기분인데, 대통령은 어떻게 지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김 전 대통령 "익숙해지면 그것대로 지낼만 합니다. 대통령이 총명하니까 잘 할 것입니다. 몸에 무리를 안해야…. 오늘 신문을 보니 우리나라 기온이 급속히 올라간다는데 생태계가 변하고 전염병이 생기고 있습니다."
노 대통령 "계절이 참 빨리 변하는 것 갔습니다. (창 밖을 바라보며) 낙엽만 있었는데 금방 이렇게 신록이 파랗게…."
만찬은 이렇게 시작됐다. 기자들에게는 여기까지만 공개됐다. 이후에는 기자들도 비서진도 물리친 채 아무런 배석자도 없이 네 명의 시간을 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