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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읍례를 하기 위해 줄지어 서있는 모습.
ⓒ 최연종

전남 화순 동복에 있는 도원서원(道源書院)에 춘향제(春香祭)가 열려 길을 나섰다. 도원서원은 신재(新齋) 최산두(崔山斗) 선생을 수좌(首座)로 석천(石川) 임억령과 한강(寒岡) 정구, 우산(牛山) 안방준 등 사현(四賢)을 배향(配享)한 사액서원으로 동복면 연월리 마을 뒤에 나지막한 산기슭에 있다.

동복면 소재지 시장 골목을 지나 다리를 건너면 서원으로 가는 길이 나온다. 마을 옆길을 따라 난 좁은 산길을 타고 올라가면 도원서원. 어느새 풀들이 파릇파릇 돋아나 싱그러운 여름을 재촉한다. 하지만 서원이 주는 이미지는 마을과 떨어져서인지 황량해 보인다.

▲ 서로 공손한 예를 갖추는 상읍례를 하고 있다.
ⓒ 최연종

서원에 이르자 후손과 지역 유림들이 네 분의 선비들을 기리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분주하다. 하얀 고무신을 신고 머리에는 검은 두건을 쓰는 등 제관복을 입은 40여명의 제관이 둥그런 원을 중심으로 섰다. 집례의 진행에 따라 상읍례(相揖禮)를 행한다. '상읍례'는 몸과 마음을 정갈히 하고 서로 공경하는 예를 갖는 의식.

▲ 서로 마주 보고 공손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
ⓒ 최연종

향교나 다른 서원에서는 좀처럼 보기 드문 광경이다. 수 백년째 도원서원의 전통으로 내려오는 독특한 의식인 것이다. 읍례에는 상읍례, 중읍례, 하읍례가 있는데 상읍례는 자기가 읍례를 했을 때 답례를 하지 않아도 되는 웃어른이나 의식행사에서 한다. 손을 공손하게 포갠 채 원을 중심으로 나아갔다 물러섰다를 몇 차례.

▲ 음식을 확인하고 있는 헌관들.
ⓒ 최연종

상읍례가 끝나자 헌관들이, 향사에 앞서 올릴 음식을 확인하는 의식이 이어진다. 이를 '제수확인'이라 하는데 곡물과 생 돼지고기 등 익히지 않은 음식을 준비한다.

도원서원은 크게 4위를 배향하는 사당(祠堂)과 강학(講學)공간인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로 이뤄졌다. 동재에는 숭의재(崇義齋), 서재에는 집성재(集誠齋)와 '도원서원'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서재는 강의를 했던 강당이요, 동재는 원장인 도유사(都有司)와 손님들이 묵은 방이다.

▲ 강학공간인 서재. 입구에서 볼 때 왼쪽에 있다.
ⓒ 최연종

그 동안 동서재 지붕이 시멘트 기와로 이어져 고풍스런 멋이 없어 아쉬운 감이 있었는데 지난해 가을 고풍스런 지붕을 새로 이어 옛 정취가 풍긴다. 서재 앞에는 큼직한 바위가 튀어나와 있어 눈에 띈다. 서원 주변에는 바위들이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서원을 세울 때부터 이 터에 바위가 많았다고 한다.

▲ 서재 뒤쪽에 있는 연못.
ⓒ 최연종

서재 뒤쪽에는 둥그런 연못이 있다. 비록 관리가 안돼 잡초만 무성하지만 처음 서원이 세워질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후손들이 당시를 재현해 다시 가꾼 것이다.

▲ 도원서원 묘정비. 뒤쪽에 내삼문이 있다.
ⓒ 최연종

도원서원은 바깥 출입문인 외삼문(外三門)과 사당으로 연결되는 내삼문(內三門)이 있다. 두개의 문 모두 맞배 솟을 삼문으로 내삼문에는 '규일문'(揆一門)이, 외삼문에는 '건공문'(虔恭門)이란 현판이 걸렸다.

▲ 4현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사당.
ⓒ 최연종

사당에는 신재 선생을 비롯 전 동복현감 석천 임억령과 한강 정구, 의병장을 지낸 우산 안방준 선생의 위패를 모셨다. 매년 음력 3월 10일이면 신재 선생을 주향(主享)으로 춘향대제를 지낸다.

▲ 신재 최산두 선생의 영정.
ⓒ 최연종

기묘명현(己卯名賢)이자 호남도학의 사종(師宗)으로 추앙받고 있는 신재(新齋) 최산두(1483∼1536) 선생. 신재는 광양 봉강면 부저리에서 태어나 15세 때에 주자강목 80권을 지고 석굴에 들어가 3년 동안 글을 읽는 등 문장과 필법에 뛰어났다.

▲ 석굴에서 3년 동안 글을 읽었다. 석굴 위는 학사대.
ⓒ 최연종

이때 석굴에다 '백류동학사대'(白流洞學士臺)라는 글을 손수 새겼는데 500년이 지난 지금도 뚜렷이 남아 있다. 석굴위에 정자를 세우니 학사대(學士臺)다.

중종 8년(1513)에는 문과에 급제하고 기묘년(1519)에는 의정부(議政府) 사인(舍人)의 벼슬에 올랐다가 사림파의 급속한 개혁에 불만을 품은 훈구파의 모함으로 기묘사화의 화(禍)를 입고 동복현에 유배됐다. 그의 나이 37세. 이때부터 14년간 동복에서 귀양살이하며 후진양성에 전념한다. 하서(河西) 김인후, 미암(眉岩) 유희춘 등은 신재의 뛰어난 제자들이다.

▲ 산 기슭에 있는 도원서원.
ⓒ 최연종

신재는 유배생활 중 마음을 다스리며 산천을 거닐다가 화순적벽의 빼어난 경치에 그만 넋을 잃고 만다. 푸른 강물 위의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소동파의 '적벽부'에 묘사된 진경(眞景)으로 보고 이 곳의 이름을 적벽이라 불렀으니 '화순적벽'이란 이름이 처음 명명된 것.

신재는 홍문관과 사간원에 머무르며 호탕한 필봉(筆鋒)으로 이름을 떨쳤다. 후대 사람들이 유성춘, 윤구와 함께 호남삼걸(湖南三傑)이라 부르며 그의 학덕을 칭송했다. 선생은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조광조 양팽손 기준과 더불어 기묘(己卯) 사학사(四學士)로 불린다.

▲ 중종으로부터 하사 받은 옥홀.
ⓒ 최연종

중종은 신재에게 옥홀(玉笏)을 하사했다. '옥홀'은 벼슬아치가 임금을 알현할 때 관복에 차는 부장품. 1974년 전남도 유형문화재 제40호로 지정됐다.

▲ 순천 송광면에 있는 부조묘.
ⓒ 최연종

신재는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한 채 54세 나이로 이곳 동복에서 생을 마치고 고향인 광양 봉강면에 안장됐다. 순천시 송광면 이읍리에는 신재 선생을 향사하는 부조묘(不祧廟)가 있다.

▲ 도원서원 전경.
ⓒ 최연종

도원서원은 신재가 사망한 뒤 133년만인 1668년(현종 9년)에 지역 유림들에 의해 세워져 1688년(숙종 14년)에‘도원'(道源)이란 사액을 받으면서 도원서원으로 불렸다. 이후 서원철폐령에 따라 훼철됐으며 신재 선생 후손들에 의해 1975년 유허비가 세워진데 이어 1977년 사당, 1978년 동서재가 복원됐다.

도원서원은 2001년 7월 화순군 향토문화유산 제4호로 지정됐으며 초계 최씨 대종회장인 최철규(한국스카우트 전남연맹장)씨가 향사를 주관하고 있다.

도학(道學)의 산실로 자리매김 해온 도원서원. 숱한 세월이 흘렀지만 선비들의 얼과 혼은 도원서원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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