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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희열
27일 오후 서울 성수동 성수공단 내 한 작은공원. 문화제를 준비하는 일꾼들의 분주함과 함께 이를 알리는 대형 플래카드들이 시선을 잡아끌었다. 공원 여기 저기에서는 시대를 호흡하려는 젊은 지성들의 담론과 잠들어 있는 우리의 정체성을 흔들어 다그치는 사자후가 간혹 터져 나왔다.

오후 5시. 경희대 한의대 풍물패 '어울패'의 길놀이를 따라 한 무리의 행렬이 떼를 지어 들어왔다. 이들은 우리와 피부색이 다른 이주노동자들이었다. 4월의 태양은 여전히 푸르렀으며 신록의 반짝임에 눈이 부셨다.

113년 전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 거리로 나선 노동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투쟁을 기념하고 정당한 귄리 쟁취를 위해 전세계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확인하는 메이데이에서 우리는 피부색, 국적과 상관없이 모든 노동자는 하나임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사회자의 여는 말이 끝나자 이곳에 모인 200여 노동자들이 일제히 내지르는 함성과 함께 이주노동자 문화제 '인터내셔널(International)'의 막이 오르며 대학 새내기들의 마임공연 '처음처럼'이 펼쳐졌다.

이날 이주노동자 문화제는 한국대학생과 이주노동자 2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3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이날 이주노동자 문화제는 한국대학생과 이주노동자 200여 명이 참가한 가운데 3시간 동안 진행되었다 ⓒ 석희열
덕성여대 노래패 '솔바람'이 나와 '세상을 바꾸자', '인터내셔널가'를 연달아 부르자 분위기는 금방 달아올랐다. 이주노동자들은 이들과 함께 합창하며 즉석에서 자신들의 민속춤을 선보이며 화답했다.

특히 이날 문화제에서는 성수지역 이주노동자들과 한국의 대학생들이 짝을 이룬 마임공연과 합동 노래공연이 잇따라 펼쳐져 눈길을 끌었다. 참가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삼삼오오 어깨동무를 하여 어깨춤을 추고 허밍을 하며 흥겨워 했다.

96년 방글라데시에서 산업연수생으로 한국에 들어와 지금은 용인의 한 산업용 박스공장에서 일한다는 꼬빌(27)은 "오늘 문화제에 참가하기 위해 친구들과 함께 왔는데, 오길 잘했다"며 연신 흥얼거렸다.

그러나 흥겨운 한마당이 펼쳐지는 가운데서도 이주노동자들의 절규는 끊이지 않았다. 이들의 바람은 소박하고 단순했다. "사람답게 살고싶다. 노동비자를 달라"는 것이 전부였다. 장시간 노동, 인권 유린, 저임금과 임금체불로 멍이 든 이들의 울부짖음은 한국사회에 대한 항의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성수동의 섬유공장에서 일하는 방글라데시인 아노아르는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문화제를 개최하고 함께 단결하며 연대해준 한국 대학생들에 대한 고마움을 평생 잊지 못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서툰 한국말로 '투쟁! 투쟁!'이라는 말을 연거푸 외쳤다.

미란잔다스(45·왼쪽)가 방글라데시 전통음악 '터부락'을 연주하고 있다
미란잔다스(45·왼쪽)가 방글라데시 전통음악 '터부락'을 연주하고 있다 ⓒ 석희열
아노아르는 투쟁발언을 통해 "한국정부는 고용허가제를 준비하면서 3년이 지난 이주노동자들은 모두 나가라고 한다"면서 "많은 돈을 들여 한국으로 들어와 그동안 힘들게만 살아 왔는데 이제와서 나가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며 노동비자를 내줄 것을 한국정부에 요구했다.

아노아르는 "한국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고용허가제로는 불법체류자를 절대로 줄일 수 없다"며 "우리는 기계도 아니고 물건도 아니다. 한국정부는 노동허가제를 실시하여 이주노동자들도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 "우리는 노동비자 쟁취하고 단속추방 박살내기 위해 길거리로 나왔다. 이제부터 한국의 학생들과 단결해서 한 목소리로 싸울 것"이라며 "Stop crackdown! Stop crackdown!(단속추방 박살내자)"을 절규하듯 외쳤다.

평등노조 이주노동자지부 이윤주 지부장은 "이주노동자들은 특별한 사람이 아니다. 그냥 보통 평범한 사람들이다"면서 "이들은 기본적인 인권마저 저당잡힌 채 일하고 있다. 이들은 단지 노동자로서 당연한 권리를 인정받고자 하는 것 뿐"이라며 이주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당부했다.

초청가수로 참가한 문화노동자 연영석씨가 '간절히'를 열창하고 있다
초청가수로 참가한 문화노동자 연영석씨가 '간절히'를 열창하고 있다 ⓒ 석희열
이윤주 지부장은 또 "정부는 이주노동자 관련 정책을 하루 빨리 수립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하고 "이미 한국에 들어와 있는 노동자들은 모두 합법 신분으로 만들어 줘서 최소 5년 기한의 노동비자를 발급, 이들의 노동권을 보장해줘야 한다"며 고용허가제가 대안이 될 수 없음을 강조했다.

이날 문화제를 기획하고 주최한 113주년 4.30 메이데이 이주노동자 학생 투쟁 기획단 'Solidarity Forever'의 한 간부도 "사업장을 자유로이 선택하거나 이동할 권리가 없는 고용허가제를 도입하면서 노동 3권을 준다고 말하는 것은 기만"이라며 "사업장과 직업선택의 자유가 실질적으로 보장되는 노동허가제가 현실적인 대안"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노동하는 노동자입니다. 우리는 외국인노동자, 불법체류자, 미등록노동자라는 딱지를 달고 노동하고 있습니다. 피부색이 달라서 언어가 달라서 차별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더 이상 못사는 나라에서 온 이방인이 아닙니다. 우리는 한국인과 똑같이 노동하며 살아가는 당당한 노동자입니다.

 우리는 하나다!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동안 무대 위에선 'WE ARE ONE'이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우리는 하나다!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는 동안 무대 위에선 'WE ARE ONE'이라는 글씨가 새겨졌다 ⓒ 석희열
이날 행사는 '단속추방', '산업연수생제도', '차별과 멸시'를 찢어버리는 퍼포먼스와 함께 "깨어라 노동자의 군대 굴레를 벗어던져라"로 시작되는 인터내셔널가를 부르며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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