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4 재보선 이후 민주당 개혁파 의원 중심으로 '개혁신당'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이 때문에 '개혁신당'이라는 키워드가 몇 개월만에 다시금 정치권의 최대 이슈로 떠오르고 있다. 이같은 논의는 표면적으로 민주당이 이번 4·24 재보선에서 참패한 결과로 불거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정계개편이라는 정치 화두는 이미 노무현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다만 시기와 강도의 문제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후보 시절부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기득권을 포기한 강도 높은 정치개혁을 주장했고, 이를 선거 공약의 1순위로 내걸었다.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중요한 동력 가운데 하나가 '낡은 정치를 버리고 새로운 정치를 하겠다'는 미래지향적인 비전 제시였다. 부패한 정치자금과 선을 긋는 '희망돼지 저금통'은 대표적인 상징이었다.
정작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고 취임한 지 두 달이 지난 시점까지 그가 약속한 정치개혁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 채 답보와 퇴행을 거듭했다. 이 때문에 민주당은 물론 노 대통령도 '과연 정치개혁의 의지가 있는 거냐'는 비판에 직면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신주류의 핵심인 천정배 의원은 '지구당위원장직 사퇴'라는 배수진을 쳤고, 신주류 일부도 '더 이상은 안된다'며 당 변화와 개혁을 압박했다.
일각에서는 이같은 노 대통령과 민주당 신주류의 '정중동(靜中動)' 행보는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였다고 해석한다. 그동안 노 대통령의 정치개혁에 대한 입장은 일관되게 "인위적인 정계개편을 할 생각은 없지만, 자연스럽게 요구되는 정치개혁은 결코 회피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소수 정권'의 한계 속에서 여론이 무르익기 전에 무리하게 나섰다가는 정치개혁 자체가 무위로 돌아갈 수도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최근 민주당 안에서 불거지고 있는 '개혁신당' 논의나, 개혁국민정당의 '범개혁세력연대' 주장은 이미 지난해 대선에서 당시 노무현 후보가 '선거 공약'으로 제시한 것이었다. 이번에 신주류가 중심이 된 '개혁신당' 논의에 '노심(盧心)'이 어느 정도 작용했는지는 몰라도, 이같은 정치개혁의 절박성에는 '노무현 코드'가 맞닿아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그런 점에 비쳐볼 때 최근 급물살을 탄 개혁신당이나 정계개편 논의는 대선 과정에서 제기됐던 문제의식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고 보여진다. 또한 대선 이후 중단되었던 정치개혁 의제가 다시금 본격적인 논의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고 할 수 있다. 이번 정계개편 논의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이 때문이다.
대선 D-2일, 노무현 "신당 창당 검토…전국통합정당 건설" 밝혀
"국민과 당원의 뜻을 모아 신당을 창당하는 방안도 적극적으로 검토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당의 문호를 전면 개방하겠다. 새 정치와 뜻을 함께 하는 젊고 유능하며 도덕성과 전문성을 겸비한 새로운 인재들을 적극 영입해서 당의 면모를 일신하겠다. 특정지역에 편중되지 않는 전국통합정당을 건설하겠다."
대선 D-2일인 지난해 12월 17일 당시 노무현 후보는 '낡은 정치 청산과 새로운 정치시대 개막'이라는 제목으로 기자회견을 자청해 신당 창당 가능성과 전국통합정당 건설을 주장했다. 노 후보는 12월 11일 '새 정치를 위한 기자회견'을 열어 정치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밝힌 지 5일만에 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 기자회견은 당시 민주당의 신주류가 주축이 된 정치개혁추진위원회(정개추)의 '작품'이었다. 정개추와 일부 노무현 지지 세력은 지난해 여름 '노무현 흔들기'로 지지율이 계속 떨어졌을 때도 신당 창당 등에 관한 고언(苦言)을 여러 차례 노 후보에게 전달했다. 당시 신기남 의원은 (고민하는 노 후보에게) "정치개혁에 대해 지지부진한 태도를 보이려면 왜 나에게 정개추 본부장을 맡겼느냐"고 강하게 항의(?)하기도 했다.
12월 17일 노 후보의 기자회견에서 정치개혁과 관련한 핵심 키워드는 두 가지였다. 대화 정치를 통해 소모적인 대결 정치를 지양한다는 것과 지역구도를 해소하는 새로운 정치 패러다임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전자는 현실 정치의 힘 관계를 인정하겠다는 의사 표시였고, 후자는 미래 지향적인 정치 환경의 씨를 뿌리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당시 노 후보는 이같은 기자회견 내용이 '영남 표심을 겨냥한 선거용이냐, 아니면 집권 후 청사진이냐'는 물음에 '둘 다'라는 뼈있는 답변을 내놓았다.
"그동안 다급해도, 진심으로 이것을 내가 책임지고 실행할 수 있는 것일 때 선거용으로 했다. 또한 선거에 상당히 불리하더라도 제 소신에 반하면 반대하고 채택하지 않았다. 그 두 가지를 일치시키려고 노력해왔다. 실행할만한 각오와 자신감을 가지고 말씀드리는 거다. 말하지 않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굳이 이 시점에서 말하는 것은 아직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날 기자회견을 통해 노 후보가 밝힌 정치개혁 구상은 여러 가지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는 대선기간 동안 발표한 정치개혁 구상 가운데 가장 구체적인 내용을 집권 가능성이 가장 높은 시점에 발표했다. 또한 '야당과의 대화' 등 일부 내용은 취임 후 대통령으로서 파격 행보라는 평가를 받으며 부분적으로 실천하고 있다. 단순한 '립 서비스'라고 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노 후보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직후인 지난해 12월 22일, 신기남·정동영·추미애·유재건·송영길·이강래 의원 등 민주당 초·재선의원 23명이 중심이 돼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주장하고 나섰다. 노 당선자가 후보 시절 밝혔던 정치개혁에 대한 화답(和答)이었다.
이들은 이날 성명을 통해 "낡은 정치의 청산과 새로운 정치를 열어가기 위한 민주당의 발전적 해체를 제안한다"고 밝혔다. 또한 이들은 "노무현 대통령 당선은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이 아니"라며 "노무현의 승리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주도하여온 낡은 정치 청산을 요구하는 국민의 승리"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최근 4·24 재보선 결과를 놓고 신주류 일부가 "민주당이 정치적 사망선고를 받은 것"이라는 말도 이미 4개월 전인 12월 22일 23명의 서명파 의원들 입에서 나왔던 이야기다. 서명파 의원들은 당시 "민주당은 (2002년) 6·13 지방선거와 8·8 재보선에 참패하였음에도 아무도 책임지지 않음으로써 국민으로부터 이미 사망선고를 받았다"며 "국민들의 간절한 정치개혁요구를 수용하여 기존 낡은 정치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기다렸다는 듯이 불거져 나온 '개혁신당론'
그로부터 네 달이 지난 4월 하순. '노무현 코드'와 맞는다는 민주당의 신주류·개혁파 의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개혁신당'을 화두로 한 정계개편 논의에 불을 붙였다. 이들이 4·24 재보선 직후 정계개편 논의를 수면 위로 떠올린 것은 잠시 중단된 정계개편 논의를 재개하기에 '지금이 적기'라는 판단 때문이다.
개혁특위에서 제출한 당 개혁안이 계속 짜깁기되며 본래의 형태를 유지하기 힘든 상황에 놓였고, 4·24 재보선 결과도 민주-개혁당의 단일 후보만 당선됐을 뿐 사실상 참패로 나타났다. 따라서 부분적인 정당 개조로 안일하게 대처한다면 내년 총선 때까지 당내 분란은 분란대로 이어지면서 명분도 상실하는 최악의 경우를 맞을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이런 와중에 28일 오전 이상수·이해찬·신기남·이재정 의원 등 친(親)노무현쪽 10여명의 인사들이 모여 5월초에 개혁의원모임 전체회의를 열어 개혁세력을 응집할 수 있는 신당 창당 등 세부적 논의를 진행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이날 낮에는 재야출신 의원들이 오찬 회동을 가졌고, 지난해 12월 22일 민주당 해체를 주장했던 서명파 의원들도 이날 저녁 모임을 통해 '개혁신당' 등 정계개편에 대한 논의를 할 예정이다.
이들 의원들이 한결같이 '개혁신당'을 화두로 삼고 있는 건 우연의 일치가 아니다. 이심전심이건 사전협의건 간에 정계개편에 대해 정면돌파 할 시기라는데 공감대를 이뤘기 때문이다. 실현 가능성 유무를 떠나 지금 이 시기를 놓치면 내년 총선 전에는 신당에 대한 논의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날 서로 다른 조찬·오찬 모임에 노 대통령의 핵심 측근인 이강철 당 개혁특위 위원이 연이어 모습을 비친 것도 여운을 남기는 대목이다.
이날 오전 모임을 가진 친노무현쪽 인사들은 '민주당의 환골탈태'와 '개혁세력 단일대오'에 대해 입을 모았다. 참석자 가운데 한 사람인 이해찬 의원은 '(이날 모임이) 신당 창당을 의미하는가, 리모델링을 의미하는가'라는 질문에 "민주당의 틀로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라며 '민주당 개조론'이 아닌 새로운 대안 모색임을 강력히 시사했다.
추미애 "개혁신당의 정신과 철학이 무엇이냐" 회의론 제기
그러나 '개혁신당 논의가 현실화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정치권 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정치적 명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현실적인 힘의 역학관계로 볼 때 개혁신당이 탄생하더라도 폭발적인 추동력을 얻기 어렵다는 회의론에서부터, 개혁파 의원 일각에서도 '개혁신당의 철학이 무엇인지 모르겠다'고 지적하고 있다.
지난 27일 추미애 의원은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개혁신당을 한다는 사람들에게 신당의 정신과 철학이 있는지 들어보지 못했고, 고민하는 사람들도 없다"며 "신당은 민주당의 자존심과 정체성·혼을 갖고 가야 한다"고 개혁신당론에 대해 정면으로 문제제기를 하고 나섰다.
또한 추 의원은 "바겐세일 한 상품을 믿고 샀더니 점포를 폐쇄하고 다른 가게로 옮겨 사장을 바꾸고 신장개업을 하면 물건에 하자가 생겼을 때 소비자는 누구한테 하소연하느냐"며 "민주당 지지자들이 정권재창출하라고 표를 줬더니 신당을 하면서 버리고 가면 무엇으로 지지세력한테 표를 얻을 수 있느냐"고 반문했다. 지난해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에 앞장섰던 추 의원의 이같은 지적은 개혁신당 논의에 불이 지피는 의원들에게는 적잖은 부담이다.
지난해 노무현 후보의 핵심 참모였던 민주당의 한 지구당위원장도 "지역구민들의 바닥민심과 지금의 개혁신당 논의와는 다소 동떨어져 있다. 개혁이라는 명분만큼이나 지지 기반을 공고히 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민주당의 해체를 전제로 한 개혁신당에 부정적인 반응을 내비쳤다.
민주당 활용론을 제기하는 쪽도 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리하게 정계개편을 추진하면 죽도 밥도 안될 수 있다"며 "새로운 인물들을 불러들여 총선 전에 국민과 당원들이 심판하게끔 하는 게 순리에 맞는 당 개혁"이라고 주장했다. '물리적인' 분리보다는 '화학적인' 통합 효과를 노리는 게 낫다는 것이다.
어쨌든 '개혁신당'을 매개로 한 정계개편 논의는 특정 개인이나 집단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거대 담론으로 몸집을 키워가고 있다. 현재 정치권에서 논의되는 여러 갈래의 방안들도 모두 정계개편을 핵심 쟁점으로 삼고 있다. 그 누구도 내년 총선을 1년도 채 안 남긴 상태에서 '정치판의 새로운 변화'를 요구하는 국민 여론을 무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