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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호성 서강대 교수.
박호성 서강대 교수.
예로부터 색깔은 정치와 뗄 수 없는 관계를 맺어왔다. 예컨대 위계적 신분질서가 지배하던 사회에서는 지위의 높고 낮음과 직책의 같고 다름을 몸에 걸치는 관복의 색깔 차이로 구별하곤 했다. 그러나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과 더불어 화려하게 개막된 이른바 '이데올로기의 시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색깔은, 특정한 사상과 이념을 상징하는 정치적 도구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예를 들어 빨간 색은 혁명이나 공산주의를 일컫는다는 식으로.

이 이데올로기의 시대에는, 어떻게 국민대중의 가치판단에 영향을 주고, 어떻게 그들을 특정의 이념체계로 끌어들이며, 어떻게 그러한 특정한 주의-주장을 대중의 이름으로 합리화하고 정당화할 것인가가 항상 급박한 정치적 과제로 떠오른다.

서로 이질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 구호와 정책을 내세우면서도, 모든 정치인들이 국민의 이름을 독점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벌이는 우스꽝스러운 난투극을 대하게 되면, 이런 가슴앓이는 쉽게 이해될 수 있다. 그리하여 정치인들은 지극히 간단명료하게 자신의 이념적 입장을 압축함으로써 가장 효율적으로 대중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방편이 무엇인지를 두고 골머리를 썩이곤 한다. 구호, 의상, 노래, 깃발, 색깔 등등이 그 방편의 주요 품목들이다.

무엇보다도 이런 대중 동원수단의 대표 격은 역시, 무언지 모르게 늘상 국민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창공에 펄럭이는 국기와 하늘에 장엄하게 울려 퍼지는 애국가라 할 수 있다. 그 중 우리에게 가장 널리 알려진 것이 청-백-적색의 프랑스 국기와, 처음에는 반 혁명군 타도를 외치는 군가였다가, 나중에 프랑스 국가가 된 '라 마르세예즈'라 할 것이다. 이것들은 물론 프랑스 혁명의 직접적 산물이며, 혁명과 공화국을 수호하려는 프랑스 인민들의 피끓는 열정을 상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거기에도 이미 색깔이 등장했다.

자유민주주의와 냉전시대의 유물

우리 나라에서도 요즘 또다시 색깔선풍이 불고 있다. 지난 4월 22일 열린 국회 정보위원회의 인사청문회가 바로 이 색깔돌풍의 진원지다.

몇몇 시대착오적인 위원들이 국가정보원장으로 선임된 고영구 변호사와 서동만 교수 그리고 신임 KBS 정연주 사장에 대해서 "사상이 불순"하다느니, "친북 좌파"라느니 하며, '사상 검증'의 포문을 연 것이다. 그들에게는 학문과 사상의 자유니, 양심의 자유니 하는 것들이 다 지상의 낙원에서나 있을 법한 잠꼬대 같은 소리로 들리는 모양이다.

'색깔론'이 우리 나라의 경우 어쩔 수 없이 음험하고 공포스러운 색조를 띠는 이유는 사상의 자유와 이념에 대한 판정이 지금껏 항상 지배세력의 자의에 따라 좌우되어 왔기 때문이다. "당신, 사상(색깔)이 수상해!" 하는 한마디 말이 당사자의 가슴을 얼마나 무거운 바위로 짓눌러 왔던가. 왜냐하면 이 말은 곧 "당신, 맛 좀 봐야 되겠어"로 통했고, 곧 이어서 주위 사람들에게까지도 소위 '연좌제'에 의해 처절한 박해와 참담한 고난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색깔에 대해 '자신만만해' 하는 세력들은, 지난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굽힘없이 싸워온 개인이나 집단들을 색깔을 빌미로 혹독히 탄압해본 전력이 있는 세력들일 가능성이 짙다.

이러한 색깔론은,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옛말처럼, 스스로 구린 사람이 오히려 선수를 쳐서 보무당당히 한번 면피해보자는 계산된 정치적 술수에서 비롯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은 스스로 검증 받고 탄핵 당해야 마땅할 수구적 공안 인물들이 솔선수범하여 색깔론을 연출함으로써, 자신은 마치 '백의의 천사'며 '정의의 사도'라도 되는 것처럼 위세를 떨치려 하고 있는 것이다. 가공할 위장취업이다.

따라서 이러한 냉전 수구적 정치인들이 벌이는 소위 '사상 검증'이란 작태는 '방귀 뀐 놈-이데올로기'의 발로이며, 또한 자신의 불순과 무지를 스스로 폭로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단지 야구장에서만 볼 수 있는 '우익수'

한 정치인이 정신병원 환자들에게 연설하도록 초대받은 적이 있었다.

그 정치인이 연설을 시작한지 10분 정도 지나자 뒤쪽에 앉아 있던 환자 하나가 벌떡 일어서더니 고함을 질렀다.

"이봐, 당신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나 있는 거야? 게다가 쓸 데 없는 말이 너무 많아. 이제 그만 입 닥치고 앉지 그래!"

그러자 그 정치인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아서, 병원장에게 소리질렀다.
"저 사람을 끌어낼 때까지 기다리겠소."
"끌어내다니오?"
병원장이 대꾸했다.
"절대 안 되오. 저 불쌍한 친구는 여기 8년 동안 있었지만, 제 정신으로 말한 것은 이게 처음이오".

아마도 이 정치인은 바로 박물관에나 들어가야 어울릴, 냉전시대의 유물과 다를 바 없는 이들 몇몇 정보위원회 위원들 중의 하나 아니었을까?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에서는 전통적으로 '좌파'의 일방적 타도만이 절규되어 왔을 뿐이다. 예컨대 '좌익수'만 있고, '우익수'는 단지 야구장에서만 찾아볼 수 있을 따름이다.

오늘날 이른바 '좌파'의 자세를 아우르며 과격하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영어 '래디칼'(radical)의 어원은 '뿌리 채 파고든다'는 의미를 가진 '라딕스'라는 라틴어다. 말하자면 뿌리까지 파고들어 속속들이 따지고드는 단호한 태도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에게도 옛적부터 이러한 '급진적인' 정신이 전통처럼 살아 숨쉰다. 예컨대 발본색원(拔本塞源)하는 정신이야말로 우리들의 고고한 자랑거리 아니었던가. 우리 조상은 원래 '좌파'를 사랑했다.

으레 대한민국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라 말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과 배치되거나 모순되는 역리 현상이 빈번히 발생하는 것이 우리의 안타까운 현실이다. 아직도 우리 나라는 소위 '색깔론'을 불지피고 있다. 이것은 논쟁이 아니라 어린애 불장난이다.

월간조선의 '최장집 교수 왜곡보도 사건'이라든가, YS 집권 초기에 김정남 수석과 한완상 통일원장관에 가해진 이데올로기적 폭력행사 문제도 이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자유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어느 정치학 교수는 한국정치학회 학술상을 수여 받은 그의 한 저서에서 자유민주주의의 본질적 원칙의 하나로서 '관용'(tolerance)을 들고 있다. 한마디로 "관용은 국가, 사회, 또는 개인의 편에서 볼 때, 자신이 선택한 대로 믿고 행동할 수 있는 타인의 평등한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 비록 어떠한 행위나 신념이 마음에 들지 않고 동의할 수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을 인정하고 훼방놓지 말아야 할 의무"를 일컫는다. 말하자면 공적인 일에서나 개인적 사안에서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견해나 신조를 절대적인 것으로 고집하지 않는 태도가 곧 관용인 것이다 그러므로 관용의 적(敵)은 바로 광신이다.

이렇게 볼 때 국회 정보위원회의 입장이나 견해는 과거 공안당국의 몸짓처럼 오히려 '광신'에 가까운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미성년자의 행로

우리의 지난 역사를 비판적으로 파헤치는 것은 학자라면 반드시 수행해야 할 책무라 할 수 있다. 그를 통해 우리는 잘못된 과거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을 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가령 북한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론가도 있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북한을 꾸짖고 단죄하는 것 역시 학자로서의 당연한 자세라 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연구를 위한 학자의, 특히 사회과학자의 접근방법은 다양할 수 있다. 이러한 학문적 방법론은 학자의 개인적 신념이나 세계관에 따라 자유롭게 선택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다. 그러므로 어떠한 방법론만이 최고, 최상의 것이라는 주장은 지극히 비학문적이고 독단적인, 그리고 반 자유민주적인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헌데 우리는 언제쯤 정치적 미성년자의 틀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이 지상의 어느 누구도 인간의 신념과 양심을 신(神)처럼 절대적으로 판정내리고, 그리고 그 판단을 반드시 추종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것은 독단과 교조가 난무하는 전체주의 사회에서나 가능한 일이라 할 수 있다. 왜 '학문과 사상의 자유'가 저 프랑스대혁명 이래 자유민주주의의 꽃으로 기능해왔는가 하는 것을 곰곰이 생각해볼 일이다.

내 눈에 티가 들어가면 견딜 수 없어 하고 이빨 사이에 조그만 찌꺼기 같은 게 끼어도 참을 수 없어 안달하면서도, 정작 내 마음속에 돋아난 그 많은 가시를 두고서는 오히려 태연하지 않은가. 예컨대 한나라 당과 '조-중-동'은 스스로에게 준엄히 물어볼 일이다.

분명히 국회 정보위원회 위원들이 충심으로 흠모해 마지않을 미국에도 버젓이 공산당이라는 것이 있다. 허나 우리는 아직도 현대판 분서갱유나 일삼으려 하고 있으니 어쩔 것인가. 어떠한 종류의 폭력도 사회로부터 추방당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질적 사상과 이론에 대한 폭력 또한 철저히 거부되어야 한다. 그것이 실은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길이다.

이들, 구시대적 만행에 몰두하는 정치인들에게는 오로지 양자택일의 길밖에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요컨대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동참하든지, 아니면 자발적으로 자신들을 박물관용으로 박제화 시켜버리든지 하는 것이 그것이다.

다른 한편 우리의 젊은 노 대통령은 매사에 신경질적인 정공법으로 일일이 대응함으로써 귀중한 정력을 함부로 낭비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깊은 물은 소리 없이 흐르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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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1년 오마이뉴스 입사 후 사회부, 정치부, 경제부, 편집부를 거쳐 정치팀장, 사회 2팀장으로 일했다. 지난 2006년 군 의료체계 문제점을 고발한 고 노충국 병장 사망 사건 연속 보도로 언론인권재단이 주는 언론인권상 본상, 인터넷기자협회 올해의 보도 대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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