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 5월 1일 오후 5시30분>
대통령과 '이적단체' 대표자가 만났다. 노무현 대통령은 5월 1일 밤 정재욱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이하 한총련) 신임 의장과 약 10여 미터 거리를 두고 만나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서울 여의도 MBC 100분 토론 스튜디오 안에서다.
노 대통령이 특별 출연한 MBC 100분 토론. 방청객 질문 시간에 몇사람의 방청객 질문이 오간 후 사회자 손석희 아나운서는 한 방청객에게 다가가 "혹시 대통령께서는 이 학생을 아는가"라고 물었다. 노 대통령이 기억을 더듬으려는 듯 한참을 보다가 "잘 모른다"라고 답하자 손 아나운서는 "한총련 의장"이라고 소개했다. 한 국가의 대통령과 그 국가가 이적단체라고 규정한 단체의 대표자와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이 장면은 공중파를 통해 전국에 생방송됐다.
두 사람의 '만남'은 MBC 측에 의해 마련됐다. 당초 지난 2월, 대통령 출연 토론을 준비하던 관계자들은 '새로 시작하는 사람들'이라는 프로그램 컨셉을 정하고 그에 맞게 방청객을 섭외했다. 정씨도 연세대 신임 총학생회장으로서 그중 한명이었다. 하지만 이 토론회는 대구 지하철 참사로 연기됐고, 그 후 정씨는 한총련 의장에 당선됐다. 5월 1일로 다시 토론이 잡히고, MBC 측은 논란이 있었지만 정씨의 출연을 그대로 진행했다.
MBC 측은 한총련 의장의 토론 참여를 청와대측에 미리 알리지 않았다. 100분 토론 관계자는 "한총련 의장이 방청객으로 와서 질문한다는 것을 청와대에 미리 알리지는 않았다"면서 "다만 경호상 신원조회를 위해 사전에 방청객의 이름과 주민등록번호 등을 청와대측에 넘겼기 때문에 청와대측에서 조회하던 도중 알아냈을지 여부는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한총련 의장을 소개받은 노 대통령은 패널들에 가려 잘 안보이는 듯 "어느 분이죠?"라며 "서서 한번…"이라고 말했다. 정재욱 의장은 자리에서 일어나 마이크를 들고 "반갑습니다. 저는 대학생이고요, 연세대학교 총학생회장입니다. 지금은 또 신임 한총련 의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있기도 합니다"라고 자신을 소개한 후 노 대통령에게 한총련 합법화 문제에 대해 질문을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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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 대통령께서 한총련 문제에 대한 언급을 한 이후에 한총련 합법화와 수배 해제에 대한 문제가 사회적인 공론의 장으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며칠 전에 제가 이 자리에서 토론을 하기도 했는데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170여명의 수배 학생들이 있고, 어제는 안타깝게도 수배 4년차, 시력을 잃어가는 한 학생이 연행되기도 했습니다.
한총련이 이미 더 많은 참여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학생운동을 표방하고 있는 마당에 대통령께서는 한총련 합법화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그리고 한총련 문제에 대한 사회적인 공론의 장을 마련하기 위해서 한총련과 시민사회단체, 법무부 등 관계부처와 대통령이 함께 만나는 자리를 제안드릴까 하는데 어떠신지요.
질문을 받은 노 대통령은 "<한겨레21>에 올라와 있는 우리 회장의 '대통령에게 드리는 공개 편지'를 읽어봤다"며 입을 열었다. 노 대통령은 그 글을 읽고 "안도감을 느꼈고 느낌이 좋았다"고 말했다.
"일부 보도나 사회 일각에서 말하듯이 그렇게 단순히 어떤 사상에 경도 되어서 우리 사회에 대해서 철없는 공격 행위를 하는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편지 속에서 확인했습니다. 그런 사람이 아니라, 여러가지 사회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스스로의 조직의 현실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했기 때문에 저는 안도감을 다시한번 느꼈습니다. 느낌이 좋았습니다. 좋았구요, 고맙게 생각하는 것은 문구 중에 (이라크전) 파병 결정을 결코 동의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그 결정을 할 때의 고뇌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이해하는 듯한 한마디 언급, 그것이 제게 참 고맙게 와서 닿았습니다. (한총련 문제가) 잘 풀리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노 대통령이 "참 고맙게 와서 닿았다"고 말한 부분은 정 의장의 '공개편지' 중 맨 마지막 부분이다. 정 의장은 이라크전 파병에 대해 동의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당시 저지 투쟁을 벌였다면서 "하지만 한총련은 대통령의 국회연설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대통령의 연설문 속에 녹아 있는 비통한 심정을 한총련은 알 수 있었다"고 적었다.
노 대통령은 한총련 의장에 대해 호의를 표했지만, 대통령·법무부·시민사회단체·한총련이 만나는 자리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보였다.
"지난 법무부 보고를 받을 때 제가 법무부 장관에게 '한총련 이거 언제까지 이렇게 둘거냐'라고 조금 짜증섞인 목소리로 이야기를 했었습니다. 그런데 법무부 장관은 역시 법무부의 소관이기 때문에 '이 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서 기존 검찰의 견해와 입장도 있고 하니 법무부 장관이 책임지고 풀어갈 생각이니까 대통령께서 앞서서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모든 문제에 관해서 대통령이 일일이 나서는 것보다 법무부 장관이 아주 전향적으로 풀어나가려는 노력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저는 서로 마음을 열고 대화해 갔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립니다."
노 대통령이 답변하는 동안 정 의장은 간간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두 사람의 대화는 이렇게 짧게 끝났다.
토론이 끝난 후 정 의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구체적인 이야기가 나오기는 어려운 자리 아닌가"라며 "어느정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그는 "노 대통령은 (한총련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반면 사실 검찰과 경찰은 상당히 부담스러워 한다"면서 "청와대나 법무부가 좀더 나서야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고 말했다.
정 의장은 <한겨레21>에 기고한 '공개편지'에서 "이 편지는 한총련 의장이 대통령에게 보내는 첫 편지가 될지도 모르겠다"면서 "대통령에게 편지를 쓴다는 것 자체가 학생운동에서는 금기였고 정부에겐 상상도 못한 일이었을 것"이라고 적었다. 그로부터 약 열흘 후, 두 사람이 직접 만나 짧은 대화를 나누는, 학생운동과 정부 양쪽에 더더욱 '상상도 못한 일'이 벌어졌다. 이에 따라 한총련 합법화 및 수배자 해제 문제가 급물살을 탈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분위기가 대통령과 한총련 사이에 돌고 있다.
한편 이날 밤10시부터 두시간 넘게 진행된 토론회에는 손호철 서강대 정외과 교수, 서명숙 시사저널 편집위원(이상 정치분야), 김윤자 한신대 국제경제학과 교수, 김상철 MBC경제부 기자(이상 경제분야), 김영희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이상 통일외교분야) 등이 패널로 참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