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1년 12월 재임용 탈락(해임)된 세종대 회화과 김동우(54·조각가) 전 교수가 세종대 정문 앞에서 해고의 부당성과 사학재단의 민주화를 요구하며 1인시위를 벌인지 1년이 지났다.
지난 6일 오전 김 교수는 세종대 정문 앞에서 예정대로 두 시간에 걸친 1인시위를 전개하고 있었다. 지난 1인시위와 달리 그는 모자를 쓰고 있었고 사회과학서적으로 보이는 책을 열심히 읽고 있었다. 홀로 시위한 모습이 왠지 외롭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결코 외롭지 않았다. 세종대 측과 1년여 투쟁을 하면서 자신이 알지 못한 세상물정을 나름대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학교나 사회에서 배울 수 없는 세상 살아가는 법을 투쟁을 통해 많이 배웠다고 해야할까?
시위를 끝낸 김 교수는 기자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모자를 쓴 이유가 궁금하지요. 학교 눈치 때문에 동료 교수들이 저의 1인시위를 보고 눈 마주치기를 꺼려합니다. 제가 모자를 쓰고 책을 읽고 있으면 그들과 눈 마주칠 일이 없을 것 아닙니까."
그는 지난해 3월, 1인시위를 처음 시작할 때의 학교측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 등을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환한 웃음 속에서 여유로운 투쟁을 전개하고 있었다.
"복직을 해야 한다는 일념으로 싸우고 있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학교측에 부당하게 해고돼 싸우기보다는 사학재단에서 일어나고 있는 구조적 문제점들을 시정하기 위해 싸우고 있는 것이라고 해야 옳을 것 같습니다. 더 나가 우리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학 교육에 대한 모순을 개선하여 제대로 된 사회를 구현하자는 것이지요."
해고 직전까지 그는 예술가로서 아름다움이라는 본연의 가치를 추구해왔다. 하지만 세종대와 1년여 직접적 투쟁을 통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관념적 지식에 대한 오류 및 사회 제반의 구조적 문제점을 많이 깨달았고, 성찰을 하게된 계기가 됐다.
"50세가 넘어서야 세상을 제대로 알게됐습니다. 해임 사건이 저에게는 새롭게 인생을 출발하는 계기를 마련해 줬습니다. 싸움의 목적은 복직이 아닙니다. 복직은 부가적인 문제입니다. 이미 마음적으로 복직이 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대학에서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은 더나가 사회적으로도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지요. 예술에 홀려 세상물정 모르고 살았던 저에게 투쟁을 통해 그동안의 관념적 지식의 현실참여가 지식인의 나약한 태도였음을 깊이 깨닫게 됐습니다.
투쟁을 통해 많은 공부를 하게된 셈이지요. 저 개인의 범위 내에서 복직보다 교육(사학)개혁 투쟁을 통해 사회개혁에 일조를 할까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저의 투쟁은 교권사수투쟁이라기보다 인권사수 투쟁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맑스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을 새삼스럽게 그는 강조했다. "1년전 투쟁을 시작할 때만 해도 맑스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는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투쟁을 통한 저의 존재의 변화는 의식의 변화를 가져오게 됐습니다. 나의 저항행위가 나의 존재를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지식인의 사회비판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됐습니다."
그는 지난 2001년 12월 세종대측에 의해 재임용에서 탈락했다. 한마디로 해고된 셈이었다. 재단 이사장이 명한 모자상(이사장 모자상)이 이사장의 뜻대로 만들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가 해임의 사유가 됐다고 한다.
"모자상 제작이 거의 완성될 무렵 이사장이 모자상 사진을 가지고 오라고 해 갔지요. 머리 등 여기저기를 지적하며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머리 부분 등을 다시 깎아 8등신으로 제작을 하라고 했어요. 가지고 간 사진의 인체 비례가 5등신 밖에 안된다고 했습니다. 학생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조각을 한 예술가로서 기본양심을 가져야 된다고 다짐했지요.
거의 완성된 작품을 이사장이 이래라저래라 한다고 고치는 것은 저의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 때문에 이틀 간이나 고민을 했어요. 고민 아닌 고민을 했던 것입니다. 교수로서 예술가로서 양심을 지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겠어요. 그래서 그대로 학교 교정 안에 모자상을 설치했던 겁니다. 한마디로 재단 이사장의 말을 거부했다고 할까요. 바로 해고의 직접적 사유가 된 셈이지요."
몇 마디를 건넨 김 교수는 부랴부랴 어디론가 승용차를 타고 걸음을 재촉했다. 5월 가정의 달을 맞아 가나아트센터에서 지난 3일부터(6월1일까지) 열리고 있는 가족오락(家族5樂)그룹전시회에 자신의 조각 작품이 전시돼 있기 때문이었다.(황급히 발길을 옮긴 그를 뒤따랐다.)
그의 작품이 전시된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1층 전시장은 이름 석자만 들어도 누구나 알 수 있는 박수근, 이중섭, 황주리, 중광 등 40여명의 유명 예술가들의 작품이 김 교수 작품과 나란히 전시돼 있었다. 예술가로서의 그의 사회적 인지도(위치)를 한 눈에 파악할 수 있었다. 그는 가족오락 전시회에 4점의 작품을 출품했다. 모두가 가족 조각상이었다.
"제가 가족과 관련된 조각작품을 이전에 여러 점 출품했습니다. 그래서인지 가나아트센터에서 이번 전시회 기획을 맡은 사람에게서 연락이 왔어요. 승낙을 한 이상 작품을 출품해야 되지 않겠어요? 여기 전시한 4점의 작품을 전시하느라 지난 4월 한 달 동안 거의 하루 10시간 이상 노예 같은 노동으로 작품에 몰두했습니다.
새벽 2~3시까지 작업을 했습니다. 1인시위와 함께 병행하니까 그런지 코피도 나고, 거의 졸도 직전까지 같습니다. 작품은 여유로움이 있어야 하지만 현실이 현실이니 만큼 투쟁과 병행하니 너무 힘들었습니다."
이날 자신의 작품을 관람하려온 관람객들에게 자신이 만든 '가족상'에 대해 그는 자세한 설명을 곁들었다.
"관람한 사람들은 잠깐보고 느낀 점을 말하지만 작품을 만든 사람들은 여러 가지 생각들을 하고 작품을 전시합니다. 여기 가족상(사암)의 어머니 팔뚝이 크고 튼튼하다는 것은 건강성을 상징하지요. 모진 풍파나 세파(고생과 역경)를 이겨낸 어머니의 건강성을 통해 여성스러움보다 남성스러운 이미지를 구축했다고 할까요. 한마디로 어느 작품이든 망막적 감각·감성인식보다 이성적 분석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이번 가족작품전시회와 투쟁이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그는 전했다.
"제가 투쟁하고 있는 이유가 바로 가족처럼 생각하는 진실한 사회를 꿈꾸는 것입니다. 가족은 누구에게나 소중하고 따뜻한 공간입니다. 이번 전시작품의 가족상을 통해 가족이 따뜻한 것처럼 교육일선 구성원들은 물론, 사회 구성원들의 따뜻함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메시지가 전시 작품에 가미됐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는 학교측과 3건의 법정투쟁을 전개하고 있다. 학교측이 법원에 제기한 학교통행금지 가처분신청, 간접강제 소송(학교측에 의해 1인시위 문구와 관련 하루 100만원 손해배상청구 - 1심 학교측 승소, 2심 계류 중)과 그가 낸 복직 관련 행정소송 등 학교측과 3건의 법정싸움이 그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학교측은 S법무법인 소속 유력 변호사를 투입해 승소를 장담하고 있지만 그는 홀로 법정 소송에 임하는 당당함을 보이고 있다.
최근 들어 민교협, 교수노조, 전국미술대학교수, 일부 졸업생 등이 그의 투쟁을 지지하고 있다. 특히 230여명의 전국 미술대학대학(대학미술포럼 포함) 소속 교수들은 직접 서명한 '김 교수에 대한 부당해직 철회 및 원상회복을 위한 성명서'가 조만간 발표될 예정이다.
지난 2월 27일 헌법재판소가 선고한 사립학교법 53조2항 '대학 교육기관 기간임용제' 위헌판결은 그의 복직에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경기도 용인에서 노부모와 부인 그리고 세 명의 자식(총 6명)을 부양하고 있는 가장이다. 여섯 가족의 생존권을 책임져야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사학비리 투쟁을 통해 사회개혁을 이루겠다는 그의 의지가 하늘을 찌를 듯했다.
김 교수는 권진규 선생의 사사로 조각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조각 예술가로 작품활동을 하다 지난 98년 세종대 공채에 응시, 쉰이 다된 나이에 조소과 교수가 됐다. 파리8대학 조형미술학과를 수학했고 이태리 까라라 국립미술학교를 조각과를 졸업했다. 국내외에서 일곱 번에 걸친 개인전(현대화랑 전속)을 했고 국제전과 단체전에 수많은 작품을 전시했다.
2001년 세종대로부터 해임된 뒤 지난 2002년 3월부터 현재까지 세종대 정문 앞에서 복직 및 교육(사학)민주화를 위해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올초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김동우 교수의 세종대 사학비리 투쟁을 주제로 한 황철민 감독의 다큐멘터리 '팔등신으로 고치라굽소?'가 인기리에 상영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