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나 자신에 대해서 소개를 하여야겠습니다. 나는 2000년 11월 중순까지 서울의 모 여자고등학교에서 전교조 분회장을 맡고 있다가, 교장 공채 과정을 통하여 한성여자중학교에 부임을 한 사람입니다.
송두율 교수가 자기 자신을 ‘남과 북의 경계인’이라고 하였는데, 저야말로 글자 그대로 ‘전교조와 교장의 경계’의 자리에 있는 입장입니다. 이런 입장은 양쪽을 보다 정확히 알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양쪽에 대하여 더 큰 왜곡된 시각을 가질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압니다.
따라서 제가 쓰는 이 글에 대해서도 양쪽이 호의를 가질 수도 있겠지만, 정반대로 양쪽으로부터 혹독한 비판과 비난을 받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의 사태를 안타까움과 긴장된 마음으로 지켜보면서, 저와 같은 경계인의 입장에서 무언가 의사 표시를 해야 되겠다 싶어 몇 번 글을 쓰기도 했지만 발표는 하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었는데, 이제는 더 이상 침묵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되어 이 글을 씁니다.
@ADTOP1@
교장단 결의대회 참가 요청 공문
5월 6일 화요일, 오후 5시쯤인가 교장실을 비웠었는데 서무실로 전화가 왔었답니다. 초등학교 교장회의 한 분이 5월 11일 오후 2시까지 시청으로 반드시 나오라는 말을 전하라고 했다고 합니다. 5월 7일 수요일, 아침에 공문 결재를 하다 보니 교장단 결의 대회에 반드시 참여하라는 공문과 함께 호소문도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기어이 그 ‘결의 대회’를 한다는 말인가? 마음이 섬뜩해졌습니다. 그리고 곧 우리 교육계의 상상력과 대응력, 문제 해결 능력이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것인가 하는 실망감에 빠졌습니다. 이건 아닌데... 아니, 이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얼마 전 전국 교장 협의회 대표되시는 분들이 하는 기자회견 기사를 읽으면서 답답한 마음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이분들이 얼마나 분하고, 얼마나 여러 번 사무치게 당하였으면 저렇게 살벌한 용어까지 사용했겠는가 하는 생각도 했습니다만, 실제로 집회까지는 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해왔던 것입니다. 설마 그런 집회를 할 리가 있겠는가라고 생각을 했었던 것입니다.
건국 이래 처음 있는 집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자연히 반만년 역사 이래 처음이라 해도 맞는 것이겠지요. 그런데 왜 이리 뒤가 켕기고 무언가 부끄러움에 휩싸이는 듯한 느낌, 불결한 상황에 빠져 들어가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되는 걸까요?
교장 선생님들이 사상 처음 갖는 집회가 국가나 민족이 수모를 겪고 있는 사안 때문도 아니고, 우리 교육이 심각한 위기에 처했다는 이유도 아닙니다. 또 입시 교육에 시달리는 우리의 제자들을 살리자는 것도 아니고, 부당한 교육 정책을 자행하는 교육 당국의 오만을 규탄하자는 뜻도 아니지 않습니까?
직접적인 동기는 한 분의 교장이 자살을 한 것이고, 자살의 원인을 제공한 것이 한 교원 단체라는 것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전교조가 밉고, 그 전교조에 의해 교장이 죽었으니까 그제서야 뭔가 하는 것이 되는 그런 모양새가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껏 수많은 문제 상황들이 있었는데도 반세기가 넘게 침묵만 지키고 있다가 한 분의 교장이 죽으니까 총궐기를 하는 모습이니, 그게 과연 얼마나 설득력을 지니겠는가 하는 의문이 났습니다.
교장단이 전교조 박살낸다고 승리를 만끽할 수 있을까요
교장이 죽었는데, 교장을 죽였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으란 말이냐? 전교조로부터 이렇게까지 지속적으로 당해 왔는데 어찌 침묵하고 있으란 말이냐? 그 말씀 맞습니다. 물론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누가 해결해줄 사람도 없고, 도와줄 단체도 없습니다. 교육부까지 손놓고 있는 형편이니 그냥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지요.
그러나 서울 한복판에서, 국민들에게 다 공개된 자리에서 이런 방식으로 해서는 분풀이는 될지언정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더구나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교장단이 또 하나의 집단의 힘과 논리로 전교조를 박살내었다 하더라도 그 승리를 만끽할 수만은 없다는 것입니다.
박남수의 ‘새’라는 시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포수는 한 덩이 납으로
그 순수(純粹)를 겨냥하지만
매양 쏘는 것은
피에 젖은 한 마리 상(傷)한 새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우리 교장 선생님들은 투쟁의 대상, 증오의 대상, 규탄 대회의 대상을 잘못 짚었다는 것입니다. 이길수록, 통쾌하게 이길수록 더욱 큰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는 싸움, 이런 모순과 역설이 이 속에 있다는 것입니다.
교장 선생님들이 전교조를 이겨서 얻어지는 것은 전교조 박살이 아니라, ‘상처받은 우리 교육’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젊은 교사들의 기를 꺾었을 뿐이요, 우리 교육의 무기력화와 퇴화라는 심한 상처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나는 전교조의 출발이나 지금까지의 흐름을 우리 교육의 역사적 전개에 필수적인 과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교육이 겪고 있는 혼란과 상처는, 따라서 이런 변화 과정에서 겪어야 하는 아픔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변화의 물결은 우리가 어쩔 수 없이 견뎌내고 감당해야 할, 건너야 할 강물인 것입니다. 거부하고 미워하는 것으로는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고, 해결되지도 않습니다.
전교조가 결성된 후 우리 교육은 사실 많은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전교조는 우리의 학교 현장을 엄청나게 많이 변화시켰고 변화시켜가고 있습니다. 물론 그 변화는 전교조만의 힘으로 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전반적인 변화 욕구와 맞물려 있었고, 또 그 변화가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에게 상처를 준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히려 전교조 역동적인 에너지를 '교육살리기'에 활용해야
그러나 전교조의 교육 운동은, 그 운동의 에너지는 우리 교육계에 변화의 핵으로 굳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에, 지금의 우리 교육계는 그 역동적인 에너지를 어떻게 교육 살리기에 활용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것이 우리 교육 과제가 되고 화두가 될 때, 우리 교육은 새로운 힘을 얻을 수 있다고 봅니다.
즉, 박살낼 대상이 아니라, 소중한 에너지로 긍정적인 에너지로 활용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에너지는 에너지 자체가 선이고 악은 아닙니다. 에너지는 가치 중립적인 것이므로 활용하는 사람에 따라 선으로도 악으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전교조를 무조건 악이라고 몰아붙이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을 근자에 실감했습니다.
홍수가 일어나 호되게 당한 사람의 경우는 물을 볼 때마다 자연히 소름이 끼치니 물을 ‘악의 축’이라고 말한다고 할 때 아주 틀린 말이라고 할 수 없는 것이지요. 그러나 그것은 맞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물인데 어찌 선과 악이 있겠습니까?
전교조의 에너지도 나는 이렇다고 봅니다. 미운 짓도 많이 했고, 특히 전교조의 반대말이 교장이고, 교장의 반대말이 전교조인 것처럼 극단적으로 부딪치면서 비생산적인 상처를 주고, 또 서로 상처를 받은 적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런데 그 원인 중에는 교장 선생님들이 전교조의 소행을 예의없고, 이기적이고, 폭력적이라고만 보았지, 에너지로는 보지 않은 까닭도 분명히 있었습니다. 많은 교장 선생님들이 아직도 전교조를 보는 시각에 서슬 푸른 칼날을 품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다시 앞의 내용으로 가겠습니다.
이번의 결의 대회는 명분도 부족하고, 결단과 결의가 단호할수록 상처를 받는 것은 전교조가 아니라 ‘우리 교육’이요, 나아가 ‘우리 국민’들이라는 것을 명심해 주십시오. 이런 비유가 어울릴지 모르겠습니다만, 만약에 학생들이 학교 수업 시간에 선생님들을 무시하고, 더구나 선생님들에게 폭력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고 해서 모든 선생님들이 서울 한복판에서 학생 규탄 궐기 대회, 제자 규탄 궐기 대회를 열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래서 얻어진 승리의 결과가 무엇인가를 생각해보면 등줄기에 땀이 날 뿐이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교장 선생님들이 오래 전부터 전교조로부터 겪은 수모와 울분이 있었음에도 침묵으로밖에 나타낼 수 없었던 것도 사실 이런 까닭에서였을 것입니다.
서승목 교장 선생님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깝고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서 교장 선생님이 왜 죽음을 선택했어야 했는가에 대한 원인은 그 진상이나 진실이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추측해 보면, 한 교원 단체에게만 책임을 지우기에는 너무나 복합적인 원인이 내재해 있다고 생각됩니다.
내가 보기에는 교육계에 관련된 많은 이들이 자신과 자신이 속한 조직의 입장만을 고수하면서 서승목 교장 선생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것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육계에 관련된 사람들은 그 누구도 그분의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서 교장의 자살... 교육 현실 자체가 공범
교육 현실 그 자체가 공범이요, 잘못된 관행도 공범입니다. 그리고 특히 교장 선생님들 자신도 책임을 일부 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깊이 돌이켜보면, 서 교장 선생님은 차라리 우리 교육계가 서로 증오로 맞서는 현실에 분노해서, 그것을 준엄하게 고발하기 위해서 죽음을 선택했다고 봅니다.
그런데 교장단에서 그분을 ‘순교자(殉敎者)’로 표현한 것에 대해서는 어떤 숨은 의도 있는 것 같아 도저히 동의할 수 없습니다. 숨은 의도라는 것은, 내가 생각하기에는 전교조를 비방하고 ‘악의 축’으로 몰기 위해 그분을 순교자로 격상시킨 것은 아닌가 묻고 싶습니다.
그런 의도라면 서승목 교장 선생님은 교육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교장단(校長團)을 위해 죽음을 선택한 것이 되기 때문에 순교자(殉敎者)가 아니라 ‘순교자(殉校者)’라고 불러야 옳을 것입니다.
서 교장 선생님의 죽음으로 인하여 우리 교육계가 증오를 더욱 확대 재생산하게 된다면 오히려 그분은 엄청난 오명을 쓸 수도 있습니다. 그분의 죽음을 진정한 ‘순교(殉敎)’로 만드는 것은 전적으로 살아 있는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분의 죽음을 계기로 우리 교육계가 깊이 반성하여 크게 하나가 되고, 서로를 배려하는 아름다운 공동체가 된다면 그분은 그제서야 비로소 순교를 하신 것이고, 순교자(殉敎者)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육계의 묵은 병폐와 갈등을 치유하고, 생명의 교육을 펼치게 하기 위하여 귀한 목숨을 바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교육계의 갈등과 증오가 더욱 확산된다면, 그분의 죽음은 우리 교육사에 씻지 못할 죄를 짓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입니다.
‘결의 대회’를 치르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하시고, 이 대회를 주관하시는 교장 선생님들께 간곡히 당부합니다.
드러누워서 침을 뱉으면 자기 얼굴에 떨어집니다. 침을 세게 높이 뱉을수록 더욱 세게 내 얼굴에 떨어집니다. 교장단에서는 지금 우리 교육의 얼굴을 향하여 침을 뱉고 있고, 더욱 세게 침을 뱉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모든 국민들이 다 보는 앞에서 말입니다.
더 이상 반목과 증오의 자리를 만들지 마십시오. 우리들은 얼마나 많이 증오의 판을 만들어 왔습니까? 이제는 다른 판, 새로운 판, 생명의 판을 함께 펼쳐야 합니다. 교장 선생님들은 어른들이시니까, 어르신네들이 먼저 그 판을 만들어 주십시오.
차라리 교장 선생님들이 참회하는 자리로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 후배들을 잘못 가르친 일, 정말 외쳐야 할 수많은 상황에 침묵으로 일관했던 일,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섬기지 못했던 일, 공교육의 붕괴에 대해 아무런 대책도 없었던 일, 서 교장 선생님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일에 일조했던 일 등을 뼈아프게 반성하는 자리로 만들어 주십시오.
차라리 서울 시청 집회를 교장 참회의 장으로 만들어 주시길
교장 선생님들께서 미워하시는 전교조 선생님들의 예상을 확 바꿔놓아 주십시오. 새로운 충격을 주는 자리로 만들어 주십시오. ‘우리 교장 선생님’이란 말이 나오게 해 주십시오. 전교조 선생님들이 스스로 잘못했음을 가슴으로 느끼게 하는 자리로 만들어 주십시오.
참석한 사람들이 모두 감동을 하고, 그리하여 국민을 감동시키는 교장 선생님들이 되어 주십시오. 우리 교육에 아직 희망이 있다는 메시지를 주십시오. 국민들이 교육계에 대해 냉소하는 눈빛을 거두게 하시고, 교육에 대한 맺힌 한을 조금이라도 풀어 주는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어둠으로는 어둠을 지울 수 없습니다. 미움과 저주로는 증오를 없앨 수 없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가슴이 벅차오르는 감격의 판, 새로운 생명의 자리를 만들어 주십시오. 엄청난 발상의 전환과 결단이 없이는 어려운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한 어른들이라면 그런 일을 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