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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비를 머금은 담뱃잎이 한창 기지개를 피고 있던 시골 큰집. 마을 제일 안쪽에 있는 우리 큰집 대문을 나서면 넓은 논을 지나 우람하게 버티고 서있는 산과 마주치게 된다. 내 기억으론 초등학생 시절 온 친척들이 다함께 등산을 했던 적이 있었던 산이다. 정상도 꽤 높고(약 700고지) 산세도 험해서 그 이후론 좀체 올라가 보지도 못했던 곳이다. 그 산을 지난 11일 일요일을 맞아 우연찮게 다시 올라갈 수 있었다.
어버이날을 맞아 서울에서의 백수생활을 잠시 접고 고향 진주로 내려갔다. 여러 날을 여전히 하릴없이 '몸보신'하고 있던 중 어머니가 시골에 산나물을 캐러 가신다고 했다. 마침 아버지가 테니스 대회에 출전하시는 바람에 어머니는 당신의 '전용기사'를 대동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
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예정대로라면 토요일 상경해서 일요일에 있을 동호회 야구시합에 나가야 했지만 한적한 시골길로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다는 매력적인 유혹이 생긴 것이다. 나는 과감한 제안을 던졌다. 내가 운전할 테니까 아버지 차의 키를 나에게 맡겨 놓고 가시라고.
완전 초보에 가까운 나지만 두번 정도 차를 몰고 서울바닥을 헤매고 다녔던 '경력'을 내세워 허락을 받아냈다. 그리하여 난 화창한 일요일 아침 어머니와 어머니가 손수 돌보시는 당신의 손주 녀석(형의 세돌 된 아들)을 태우고 큰집이 있는 합천으로 달렸다.
큰집에 무사히 도착하니 이미 큰 고모와 고모부가 부산에서 올라와 계셨다. 도시락을 꾸린 후 조카녀석을 증조할머니께 맡겨두고 큰아버지, 고모 내외와 함께 두 대의 차량에 나눠 타고 산으로 향했다. 예전 같았으면 엄두도 못 낼 일을 우리는 유유히 즐겼다. 바로 산 중턱까지 도로가 닦여있어서 꼬불꼬불 산길을 차로 올라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상처를 밟고 우리는 산으로 올랐다
산을 깎아 반듯한 도로가 생겼다는 점에서 그 멀던 산이 가까워졌다는 안락함을 만끽함과 동시에 인간과 가까워졌기 때문에 앞으로 겪게될 자연의 고난을 또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명 관광지 개발로 지방경제 활성화를 노린 관할 자치단체의 의도가 엿보였다.
계단식 논들이 경사면을 타고 차곡차곡 쌓여있는 길을 따라 산 중턱 마을까지 차를 몰던 우리는 시멘트 길이 끝나는 곳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비로소 등산 겸 산나물 캐기가 시작된 셈이다.
애초에 나는 산나물 캐기보다는 산뜻한 등산 그 자체를 즐기겠다는 심산이었다. 나의 이런 기대는 울창한 산 속으로 발을 들여놓는 그 순간부터 무너지고 말았다. 취나물에 눈이 먼 나의 동행들은 오솔길을 마다하고 산 속을 헤집고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따라 들어간 나는 산 다람쥐나 다녔을 법한 산 속에다 새롭게 길을 닦으며 힘겨운 한 걸음을 내디뎌야만 했다. 그 와중에 연유도 모르게 죽은 날카롭고 긴 이빨이 박힌 멧돼지의 머리뼈를 발견하기도 했다.
"제발 길로 갑시다"고 외친 나의 부탁에 큰아버지는 "젊은 녀석이 앞장서서 길을 개척하지는 못할 망정 그게 무슨 소리냐"고 핀잔을 주셨다. 그렇게 덤불 숲을 헤치며 다녔던 '나물 캐기를 빙자한' 산행의 시작은 나에겐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니었다. 물론 나의 동행들은 흥겨워하며 앞치마 가득 산나물을 담아나갔다.
일전에 읽은 '야생초 편지' 때문일까. 이 와중에서도 이번 산행 길에 만난 여러 풀들과 작은 꽃들이 새삼 살갑게 다가왔다. 꺾어서 향기도 맡아보고 씹어먹기도 했다. 당연하게도 내가 든 쌀부대는 취나물 몇 잎만이 들어있을 뿐 좀체 무게를 더하지 못했다. 구별은 할 수 있었지만 향긋한 산나물이 내 눈엔 쉽사리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의지도 많지 않았지만.
산은 자신을 낮춘 자에게만 그 속살을 드러냈다
나를 제외한 우리 일행은 취나물이 가득해지자 고사리를 찾아 점점 산 정상으로 훑고 올라갔다. 혼자 놀기도 조금은 따분해지던 나는 정상부근의 너른 철쭉나무 숲에서 본격적으로 고사리 캐기에 돌입했다. 큰어머니 말씀대로 세심하게 수풀을 뒤져보지 않으면 고사리를 발견하기란 쉽지 않았다. 허리를 숙이고 쪼그려 앉은 상태에서 철쭉나무 밑동을 자세히 살펴야만 하얀 솜털에 뒤덮여있는 수줍은 고사리 새순을 찾을 수 있었다.
산나물 캐기가 '부업'이었던 나의 이번 산행에서 기억에 남는 것을 꼽으라면 나지막한 나무들과 수풀들로 시야가 탁 트인 정상에서 언뜻 언뜻 보이는 인간의 모자와 서로의 위치를 확인하는 '야호' 소리였다. 고사리를 캐던 허리를 펴면 낮은 수풀 위로 모자가 언뜻 보였고 이제는 하산하자던 정겨운 부름이 정상의 산들바람에 묻어왔던 것이다.
정상에 선 나는 이런 장면들과 함께 산 아래로 펼쳐진 큰집 마을과 아버지가 나온 폐교가 된 초등학교, 산너머 이웃 마을, 물을 가득 가둔 여러 개의 보 등을 가슴 시원하게 바라봤다. 나에게 패러글라이더만 있다면 저 낮고 먼 곳으로 훌쩍 뛰어내리고 싶은 심정으로. 사진기를 미처 들고 오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더해갔다.
어느새 살포시 내려앉은 해를 등지고 한자리에 모인 우리는 각자의 수고를 풀어놓았다. 모두가 한 짐 가득 산나물을 내려놓는 게 아닌가. 대단한 집념이라고 밖에 할 말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내가 뱉은 말이라는 게 고작 "이거 시장에 내다 팔면 모두 얼마쯤 해요?"라는 냉혹한 질문이었다.
'값을 물어 무엇하랴'
그리고 안타까워했다. '산행과 어우러진 값진 노동과 가족을 위한 녹색 희망을 무식하게 계량화시켜야만 짐작할 수 있는 나의 근대적 시각을 어찌할꼬.'
우리는 각자 산이 준 은혜로 가득 찬 가방을 한 개씩 메고 마을로 내려왔다. 큰집에 도착해서는 앞마당에 모든 산나물을 풀고 다듬었다. 증손자를 보며 우리를 기다리던 할머니도 거들었다. 얼마쯤은 우리 차에 실었다. 초보 운전자는 그렇게 새삼 자신이 시골 처녀였음을 확인시켜준 어머니와 큰집의 너른 벌판을 좋아하는 어린 조카, 그리고 봄의 싱그러움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저녁부터 우리집 식탁은 얼마동안 녹색혁명의 현장이 되었고 나는 잠시 내가 초식 동물이 되어버렸다는 착각에 빠져들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