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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8기자클럽제공
예우법에 관한 시행령을 놓고 보면 5·18유공자나 국가유공자 모두 교육, 의료, 대부 등에서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으나 실생활에서 5·18유공자들이 겪는 차별은 크다.

예를 들어 장해를 입은 5·18유공자는 보철용 차량을 구입할 때 국가유공자 상이자에게 적용되는 혜택을 받을 수 없다. 국가유공자 상이자는 차량 구입시 등록세, 취득세, 자동차세 등 지방세와 특별소비세 감면과 도시철도 채권 매입을 면제받지만 장해등급을 가진 5·18유공자는 이런 혜택을 받을 수 없다.

또 LPG차량을 구입할 때도 국가유공자 상이자는 지원을 받지만 5·18유공자는 지원을 못 받는다. 고속도로를 이용할 때도 유료도로법 시행령에 의거해 국가유공자는 무료지만 5·18유공자에게는 해당사항이 없으며, 시내·고속버스를 이용하더라도 국가유공자 상이자는 등급에 따라 감면 또는 할인혜택을 누릴 수 있지만 5·18유공자는 그럴 수 없다.

5·18유공자가 국가유공자와 동일하게 받는 혜택은 광주시와 전남도가 운영하는 공공주차장 요금을 감면받고 관공서와 공사, 용역, 물품납품을 계약할 때 사야하는 지역개발 공채 매입을 면제받는 정도이다.

결국 국가적 차원에서 이뤄지는 혜택은 전무한 채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 지원혜택이 가능한 부분만 존재해 '유공자'라는 타이틀이 무색할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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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유공자들은 상황이 이렇게 된 까닭을 '중앙부처간 편의주의와 5·18항쟁에 대한 몰이해'로 꼽는다. 지방세 감면은 행정자치부가 지침을 마련해 각 자치단체에 전달해야 하고 고속도로 무료통행은 건설교통부가, 특소세 감면은 재정경제부가 나서서 해결해야 하지만 그렇지 않고 있다는 것.

주무부처인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우리도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관계 부처에 협조공문을 보내고 직접 만나서 협의하고 있다"며 "현재 행자부에서 특소세, 지방세 감면 등을 조례규정에 포함시키기 위해 긍정적으로 검토중에 있다"고 밝혔다.

이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5·18유공자 혜택을 협의하던 중 일부 부처에서 '장애인 복지법에 의거해 혜택을 받으라'는 입장을 보여 보훈처에서 강력히 반발, 긍정 검토로 선회한 적이 있다"고 귀띔해 5·18항쟁을 바라보는 일부 중앙부처의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시사했다.

국가보훈처는 "지금 각 사안별로 관계부처에서 검토하고 있어 시간이 소요되고 있다"며 "모든 장해등급자가 혜택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다"고 향후 방침을 밝혔다.

상당수 5·18유공자 노령으로 실질 혜택 없어

또한 광주민주유공자 예우법 시행령에는 국가유공자와 마찬가지로 교육과 취업에 관한 지원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예우법은 당사자인 5·18유공자들에겐 별다른 혜택을 주지 못하고 있다. 5·18유공자 대부분이 이제는 사회생활의 일선에서 물러나야 할 나이에 들어섰기 때문이다.

5·18유공자인 이세영씨(44)는 "항쟁 후 20년이 지나서 법안이 통과됐는데 그 동안 피해자들의 부모님도 많이 돌아가시고 자식들도 학교 나와서 취직한 경우가 상당수다"며 "장해등급을 받아 몸도 성치 않고 나이 또한 50대 중반에서 60대 중반인 유공자들이 많은데 어떻게 취업이 될 수 있겠나"고 쓴소리를 했다.

자녀들의 대학특별전형도 문제가 많다는 불만의 소리가 높다. 김후식 (사)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이사장은 "국가유공자 자녀의 경우 전국의 모든 대학에서 1급부터 7급까지 있는 상이등급에 상관없이 특별전형의 기회가 부여되지만 5·18유공자 자녀의 경우 전국 모든 대학이 아닌 전남대와 조선대 등 일부 대학에서만 특별전형을 실시하고 있으나 그나마 장해등급에 제한을 둬 5·18유공자 사이에 위화감을 조성한다"고 밝혔다.

5·18유공자들이 기막혀 하는 일이 또 있다. 광주민주유공자 예우법 시행령에는 5·18유공자들이 집을 장만하거나 생활안정자금을 저리에 대출 받을 수 있는 '대부' 규정이 있다.

경기가 나빠져 생계가 곤란한 5·18유공자들에게는 생명수 같은 혜택이지만 '그림의 떡'일 뿐이다. 지난해 국회에서 법을 통과시켜놓고 지금껏 예산책정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대부혜택을 누렸다는 5·18유공자는 눈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비교적 잘 되고 있다는 의료지원 역시 문제점은 있다. 5·18항쟁 부상자들은 보훈병원에서 무료 치료가 가능하다. 국가유공자들의 경우 진단에서 투약까지 모든 과정이 보훈병원 내에서 이뤄진다.

그러나 5·18부상자들은 처방전을 받고 나면 병원 밖 약국까지 가야 한다. 6차선 도로를 건너 오르막길에 있는 약국은 대부분 늙고 병든 5·18부상자들이 찾아가기에는 험한 길이다.

때문에 병원에서 택시를 타고 집 근처 약국을 찾기도 하지만 처방전에 적혀있는 약을 동네 약국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경우가 허다하다.

5·18유공자들 "연금 또는 생활수당으로 최소한의 생활 보장을"

기실 5·18유공자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따로 있다. 바로 국가유공자들이 받는 연금혜택이다. 국가유공자는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5·18유공자는 '광주민주유공자 등 예우에 관한 법률'의 적용을 받는다.

'망월동'이라 부르던 항쟁 희생자들의 묘역은 이제 '5·18국립묘지'가 됐다.
'망월동'이라 부르던 항쟁 희생자들의 묘역은 이제 '5·18국립묘지'가 됐다. ⓒ 강성관
법 명칭에서 알 수 있듯이 국가유공자는 '지원' 즉 연금에 대한 사항을 보장받는 반면, 5·18유공자는 '지원'이 빠져 있어 연금혜택을 받을 수 없다. 원인은 90년에 보상금을 일시불로 수령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금에 관한 의견은 조심스럽게 개진하고 있지만 5·18유공자들도 할 말은 있다. 과거 실시된 보상에서 '목돈'을 쥐지 않았냐는 지적에 대해 5·18유공자들은 "사실이 왜곡됐다"고 항변한다.

김후식 (사)5·18민주화운동부상자회 이사장은 "4차까지 진행된 보상접수에서 1차에서 받지 못한 사람들이 2, 3, 4차까지 신고해서 중복수령으로 수억을 탔다는 오해가 정설로 굳어져 발생한 헛소문이다"고 밝혔다.

김 이사장은 "과거 호프만식으로 계산된 보상금은 정년인 55세까지의 소득을 80년대 임금인 월 21만8천원으로 계산해 장해 정도에 따라 차등 지급됐다"며 "수령자 대부분이 10여년 동안 '폭도'로 규정돼 직업을 가질 수 없어 빚으로 생활했는데 빚잔치가 끝난 후에 수중에 남은 돈은 거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나마 5·18항쟁으로 인한 사망자중 55세가 넘은 경우에는 보상금 없이 위로금만 지급됐다. 결국 보상금 또는 위로금을 수령한 지 13년이 지난 오늘날 생활이 원점으로 돌아간 경우도 많다고 한다.

5·18유공자인 이종남씨(51)는 "사회에 나와 기반을 잡아가는 시기에 5·18을 겪어 과거에는 '폭도'여서, 지금은 늙고 병들어서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까지 정상적인 생활을 못하고 술과 진통제에 의존하는 피해자들이 의외로 많다"며 한숨을 쉬었다.

그렇다고 5·18유공자들이 원점에서 연금혜택을 달라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김 이사장은 "90년에 정년인 55세까지 보상받았기 때문에 55세를 넘은 사람들에게 생활수당이나 연금혜택을 주는 게 대다수 5·18유공자들의 간절한 소망"이라고 소개했다.

다른 국가유공자들과 형평성이 맞지 않느냐는 지적에 대해 김 이사장은 "국가유공자들은 꾸준히 연금을 받아 지금은 더 많이 받는다"며 "거꾸로 우리가 형평에 맞지 않다"고 주장했다. 김 이사장은 "사람답게 살자는 것도 이제는 바라지 않는다"며 "최소한의 기초생활만이라도 보장됐으면 한다"는 바람을 덧붙였다.

우리를 되돌아본다

'최소한의 생활 보장'을 요구하는 5·18유공자들은 자신들의 요구가 외부에 어떻게 비칠까를 상당히 의식한다. '가짜 5·18' 파동과 이권개입 등 일부 5·18항쟁 당사자들의 도덕적 해이 때문이다.

한 5·18유공자는 물의를 일으킨 관계자들이 "백번 죽어도 싸다"면서도 "주변에서 관심을 가져줬다면 그렇게까지는 안 됐을 것이다"며 안타까워했다.

5·18 도중 총상을 입어 하반신이 마비됐다는 그는 "진통제가 효과가 없을 때는 병원에서 마약성 주사까지 맞는다"면서 "이런 고통 속에서 자포자기 심정으로 유혹을 이기지 못해 잘못된 길로 들어선 경우도 많다"고 덧붙였다.

지난 4월 14일 5·18국립묘지에서는 신모씨의 장례식이 있었다. 대학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던 신씨는 항쟁당시 길을 걷다 계엄군의 살인적인 진압을 목격하고 항의하던 중 공수부대원이 휘두른 곤봉에 맞아 머리를 크게 다쳤다.

그 후유증으로 신씨는 1급 정신지체장애자로 분류될 정도로 정신분열증을 앓았다. 병세가 깊어질수록 사회와 격리된 신씨의 고통은 가족들에게도 커다란 아픔이었다.

결국 오랜 투병생활에서 얻은 합병증과 장파열로 4월 13일 한 많은 45년의 생을 마감했다. 결혼도 못하고 부모보다 먼저 떠난 '죄인'이 된 신씨는 3일장도 못 치르고 사망 이틀째 되는 날 쫓기듯 5·18국립묘지에 안장됐다.

신씨의 경우처럼 5·18항쟁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사람들의 고통은 대개 개인의 문제로 한정돼왔다.

이제 지난 20년간 5월 정신을 지키는 의무를 피해자들인 항쟁 당사자에게만 지우지는 않았는지 되돌아볼 때다.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한다. 그러나 기자는 5·18유공자들에게 아프게 묻고 싶다. "5·18유공자 여러분, 세상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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