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의 꿈이 묻혀 있는 곳, 5ㆍ18 묘역에서 영혼의 숨결을 느낄 수 있었다.
80년 5월 27일까지 계엄군에 의해 학살된 시신 중 126구가 청소차에 실려 폭도의 이름으로 묻혔다고 한다. 그리고 80년 5월 장례식 이후 독재정권은 유족의 제사도 허용하지 않았단다.
5ㆍ18 구묘역에는 5월 영령들 이외에도 수많은 민주화 운동 열사들이 안장되었고, 97년 신묘역 조성 이후에도 현 묘역에서 역사의 현장을 그래도 지키고 있다.
'민주 성지'라고도 불리는 이곳에는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맞서 싸우다 고문사, 정치적 타살, 분신, 할복, 투신 자결을 한 열사들의 울부짖음이 고스란히 묻혀 있다.
묘지 입구에는 전두환이 쿠테타 이후 담양을 다녀가면서 세운 비석을 통째로 뜯어다가 땅바닥에 묻어 놓았다. 학생들이 비석을 발로 밟으면서 입장하는 모습은 '피의 역사'를 만든 전두환 전 대통령을 역사적으로 심판하는 예인 것 같기도 하였다.
<민주주의 배움터>의 한 대학생은 열사의 묘지에 묵념과 헌화를 하였다. 역사의 한 획을 긋기 위해 기꺼이 목숨을 내 놓았던 열사들의 민주화 정신은 23년이 흐른 뒤에도 계속되었으며 모두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개별 열사를 참배하기 위해 찾은 여러 곳의 묘지에서는 부서진 유리관과 거꾸로 돌려진 초상화들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보관과 관리가 소홀하여 생긴 문제들이다.
5ㆍ18은 단순히 5월만의 행사가 아닌데, 특정 날짜, 특정 시기에만 관심을 갖는 일반 시민들에 의해 민족열사의 정신이 퇴색되어 가는 듯 해 유감스러웠다. 깨진 유리관 사이로 보이는 초상화에는 비와 눈을 이겨낸 한 민족 열사의 얼굴이 빛바래 있었다. 또한 거꾸로 뒤집힌 초상화는 목숨을 바친 민족 열사를 소외시키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신묘역은 구묘역으로부터 15분 정도 떨어져 있다. 5ㆍ18 광주항쟁 운동에서 운명하신 열사들을 구묘역에서 신묘역으로 이장하였는데, 이는 열사들의 살은 썩어서 구묘역에 있고, 뼈는 신묘역에 묻혀 있음을 의미한다.
신묘역은 넓고 깨끗하였으며 개인 열사 묘지 앞마다 추모 꽃과 편지들이 고스란히 놓여져 있었다. 하지만 신묘역의 한 구석에는 안타까운 현장이 남아 있었다. 이는 시신을 찾지 못한 열사들의 묘에 비석만 세운 것이다.
돌아가신 분들의 영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계기였다. "진실을 말하지 않고,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한다. 그분들은 돌아가셨지만 우리의 가슴 속에는 민주화에 대한 그들의 처절한 몸부림과 열망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매년 묘지를 찾는 사람이 줄어든다고 한다. 몇 명이 죽었고, 어디에 묻혔는지를 우리가 밝히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또한 이러한 사실을 공론화시키는 것도 우리의 역할일 것이다.
당시 현장을 기록하는 사진들을 사진 자료 전시실에서 볼 수 있었다. 참혹한 현장과 시민군들의 하나된 목소리, 같은 민족끼리 총을 들이대며 대치되어 있는 아이러니컬한 상황. 모두 우리가 처한 과거의 역사의 한 순간이라는 것이다.
망월동 5ㆍ18 국립묘지 순례를 마치자 구묘역에서 신묘역 방향으로 진혼제를 위한 행렬이 이동하였다. 하얀 관을 들고 이동하며 풍악을 울리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기리는 엄숙한 제례의식 같았다.
5ㆍ18은 그들의 영혼을 기리는 추모제이기도 하지만, 기형적인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 영원한 역사적 과제를 남겨주는 계기이기도 하다.
아직 역사적 재조명과 함께 진실 규명이 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들의 영혼만을 기린다는 것은 민주주의를 위해 쓸쓸히 죽어가던 그들의 영혼의 명맥을 이어가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광주학생운동에서의 의문사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부상자의 배상문제, 기념사업 등 5ㆍ18 중요 현안들이 조속히 해결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살아남은 우리가 다시 나설 때이다. 역사 재평가를 통한 과거 청산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는 철저한 진상규명, 선별없는 명예회복에 적극적인 참여를 하여야 할 때이다.
5월은 계속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