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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이 5월18일 오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5월18일 오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해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해마다 5월이면 많은 사람들이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찾지만 올해는 좀 유별난 듯하다. 지난 5월9일에는 '미스 코리아' 후보 56명이 국립 5·18 묘역을 참배하더니, 5월15일에는 부산지역 한나라당 국회의원 10여명과 시의원들이 5·18 묘역을 방문해 민주화 영령 앞에 집단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뿐이 아니다. 기념일이 다가올수록 '높으신 분'들의 참배행렬이 줄을 이어 5월17∼18일 이틀 동안은 대한민국 행정·입법부를 5·18 묘역으로 옮겨놓은 듯했다. 그 고개 빳빳한 분들이 민주 영령 앞에 고개 숙인 '속뜻'이야 저마다 다를망정 그 정성마저 나무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미스 코리아' 후보부터 한나라당 의원들까지 집단 참배

'눈치 없는' 한총련 학생들 탓에 '뒷문 출입'이라는 수모를 당하기는 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미국 방문길의 여독(旅毒)이 채 풀리기도 전에, 대통령에 취임한 뒤 처음으로 광주를 찾아 흔들리는 호남 민심 달래기에 나섰다.

민주당 구주류와 '선혈이 낭자한' 주도권 싸움을 앞두고 있는 정동영 상임고문과 천정배·신기남 의원 같은 이른바 신주류 인사들은 지난 5·16에 서울에서 '신당 쿠데타'를 일으킨 뒤 5·18에 광주에서 '신당 창당보고' 의례를 가졌다. 신당이 5·18의 정통성을 계승한 '적자'(嫡子)임을 내세우려는 의도이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여야 정치인들.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여야 정치인들. ⓒ 오마이뉴스 이종호
5월17일 박희태 대표가 당직자들과 함께 참배한 데 이어 5월18일에는 최병렬·이재오 의원이 참배하는 등 한나라당 지도부와 당권 주자들이 광주로 총출동했다. 다음달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는 한나라당의 당권 주자들이 한 표가 아쉬운 판에 너나 할 것 없이 광주를 찾는 데는 이른바 '수구보수'니 '영남당'이니 하는 이미지를 씻어내기 위한 차별화 경쟁 속에서 호남민심의 변화 가능성을 탐색하려는 뜻이 담겨 있다.

23년 전 5월 광주시 금남로 1가 상무관에서 들려나온 시신을 담은 관들이 청소차에 10개씩 실려가 시립공원묘지 제3묘역에 미리 파놓은 100여개의 뻘건 황토 구덩이에 묻힐 때만 해도 유족들조차 숨죽여 울어야 했던 그 망월동이다. 그 후로도 몇 년은 용기 있는 자들만이 찾을 수 있었던 그곳에 '미스 코리아'도 한나라당 의원들도 기꺼운 마음으로 참배하는 세상이 왔으니 이는 대동(大同) 세상을 꿈꾼 5·18 정신의 '전국화'라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다.

'고립무원의 섬'에서 '전국화' 해원(解寃) 이룬 광주 5·18

사실 5월 광주는 오랜 기간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섬'이었다. 23년 전 5월18∼27일에도 광주는 안으로는 해방이었지만 밖에서는 절대적인 극한 고립을 맛보았다. 6·10 항쟁이 성공해 6·29 항복선언을 받아낼 때까지 광주는 지역과 편견 그리고 사상에 의해 '포위된 섬'이었다.

그때까지는 광주의 진상을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80년대 당시 내 친구 하나는 단지 고향이 광주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대구 출신의 장인·장모자리로부터 '퇴짜'를 맞았다. 광주 출신이라는 지역적 편견은 내 친구가 고시에 합격한 뒤에야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슬며시 거두어졌다.

또 다른 내 고교 동기는 "대구 처가집에 가서 80년 5월 광주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아무리 설명해도 안믿는다"며 내가 하숙방에 숨겨서 갖고 있던 '빨간책'(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 펴낸 빨간 표지의 '광주사태' 사진기록집)을 빌려간 적이 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계엄군의 잔학상이 담긴 그 '빨간책'으로 처가집 식구를 설득했는지를 내 친구에게 물어보진 못했다. 다만 노무현 대통령이 지역주의 타파와 통합을 역설한 5월18일 전남대 강연에서 밝힌 '연대의식'에서 그 희망을 찾을 수 있다.

"부산에서 구속된 학생들을 변론하면서 민주화운동에 한 다리를 걸치게 됐는데, 학생들에게 당시 '왜 잡혀왔느냐'고 물어보니 광주 학살의 진상을 부산 시민에게 전파하려고 노력했다는 게 가장 큰 죄목이었다. 그때부터 광주는 '우리'의 문제가 됐다."

88년 총선에서 처음 국회의원에 당선된 노무현은 5공 청문회에서 광주 학살의 진상을 부산 시민에게 전파하고 광주 문제를 '우리'의 문제로 인식시키려고 애썼다. '증인 전두환'에 대한 물샐 틈 없는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로 떠오른 이 부산 출신 의원은 전두환 증인에게 명패를 던지는 모습으로 광주 시민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러나 한국 사회 정치권의 '주류'는 그와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노재봉, "광주사태는 김대중씨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정치기술'"

전두환에 이어 노태우 정부가 집권하는 동안에도 광주항쟁 음모설은 이른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재판 결과에 상관없이 친체제 세력들에 의해 신봉되었다. 그 대표적 사례는 1988년 서울대 교수였던 노재봉이 민정당 초청 모임에서 광주사태는 김대중 총재가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정치기술'을 발휘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이라고 발언한 이후 정부 요직에 기용된 것이다(노재봉씨는 노태우 대통령 정치특보로 기용된 이후 비서실장을 거쳐 국무총리까지 지냈다).

그것은 호남에 대한 정치적 '고립무원 작전'의 시작을 알리는 '예광탄'이었다. 곧 이어 우리 사회의 '주류'와 일부 야당은 1988년 총선 민의가 선택한 이른바 여소야대(與小野大) 구도를 인위적으로 깨뜨린 '3당합당'으로 다시 한번 김대중과 광주를 고립시켰다. 90년 3당합당은 정치권의 야합을 넘어서 다시 한번 호남을 포위하고 고립시키는 지역패권주의의 완성을 의미했다. 80년 5·17이 총칼에 의한 쿠데타였다면, 그것은 호남을 포위한 정서적 고립을 정치적 고립으로 전변(轉變)시킨 '정치적인 5·17 쿠데타'였다.

정치인 노무현은 이 정치적 쿠데타에 가담하지 않고 분연히 맞서 싸웠다. 그는 자신에게 금배지를 달게 해준 YS와의 결별을 선언하면서까지, 지역대결구도를 고착시킨 이른바 양김 시대 반독재투쟁의 '필요악'을 초월하는 원칙과 비전을 내걸었다. 그것이 형극(荊棘)의 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원칙 때문에 그는 바보스럽게도 부산에서 4번(시장 선거 포함)이나 출마해 낙마했다. 물론 그 우직한 낙마 때문에 광주시민은 민주당 경선에서 노무현을 선택했고, 그 '기적'의 결과로 오늘날의 대통령 노무현이 된 것이다.

국민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국민경선에서 승리한 노무현 민주당 대통령 후보.
기적처럼 국민경선에서 승리했을 때 민주당 대통령후보 노무현은 분명히 이렇게 외쳤다.

"저는 민주당과 운명을 함께 해왔습니다. 민주당의 발전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해 왔습니다. 제가 가는 길은 바로 민주당의 길입니다.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치겠습니다. 12월 19일, 제16대 대통령선거, 승리를 여러분께 바치겠습니다."

신당의 '탈(脫)호남' 전략은 '광주를 버리는 카드'?

그런 그가 이제는 민주당을 버리려 하고 있다. 척박한 부산의 정치풍토에서 무소속도 아닌 민주당 간판으로 네 번이나 출마해 낙마했고 그 가시밭길을 묵묵히 걸은 '바보 노무현'을 상품으로 해서 대통령이 된 그가 '바보 노무현'을 버리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노무현은 5월18일 광주에서 이렇게 다짐했다.

"저는 다시 지역주의 때문에 실패하지 않겠다는 간절한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90년 (3당 합당) 이후 정치적 격변에 마음에 담아뒀던 화해와 통합, 이 목표는 결코 내가 포기하지 않을 것이고 결코 실패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가사의한 것은 지금의 정치환경은 90년 3당합당 이후보다 훨씬 더 좋아졌는데 대통령 노무현은 자신이 정면 돌파했던 '가시밭길'을 버리고 신당이라는 '쉬운 길'을 선택하려고 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총선 승리를 위해서라면 적어도 이해할 수는 있을 터인데 정작 대통령 노무현은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와 총선 승리 목적의 신당은 아니라고 말한다. 그래서 국민은, 특히 광주 시민은 헷갈리는 것이다.

특히 구주류로 표현되는 동교동계 인사들에 대한 신당 참여 배제 움직임과 구주류 인사들이 나라종금 퇴출저지 로비의혹 사건으로 줄줄이 엮이는 사정 분위기 그리고 '동남풍'(東南風)으로 표현되는 민주당 조직을 대체하려는 부산-경남발(發) 정치개혁 조직 띄우기는 지역성과 함께 정치적 진보성을 가진 광주 민심을 더 헷갈리게 한다.

노 대통령의 방미 중 '변신'도 광주 민심 이탈 가속화

광주 민심이 미묘한 이탈 조짐을 보인 것은 '믿었던 노 대통령'이 대북 송금에 관한 특검 수사를 수용한 뒤부터였다. 이어 중앙부처 고위직 인사를 계기로 이른바 호남 소외론이 고개를 들 때만 해도 그것은 긴가 민가 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정치개혁을 표방한 신당 추진이 본격화하는 가운데 동교동계 인사의 구속과 인위적 배제 움직임이 이어지자 많은 시민들에게 신당의 '탈(脫)호남' 전략은 '광주를 버리는 카드'로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이런 일이 생기면 늘 그렇듯이, 그 배후에는 노심(盧心)이 있다고 의심하는 사람도 적지 않다.

뜻밖에도 광주에서 당한 '수모'가 시사하듯, 노 대통령이 이번 방미에서 보여준 언행도 광주 민심의 이탈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더구나 '여자의 변신은 무죄'라지만 노 대통령의 급작스런 변신에는 분명한 해명이 있어야 했다. 그런 해명 없는 노 대통령의 "5월 정신이 참여정부의 뿌리이며 5월 정신을 이어받아 지역갈등을 극복하고 국민통합을 이뤄나가자"는 호소는 공허할 뿐이었다.

요즘은 누구나 5·18 묘역 앞에서 '5월 정신'을 들먹이지만, 5월 광주가 반공주의의 틀에 갇힌 한국 사회의 미국에 대한 인식의 지평을 확대한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리고 정치인 노무현은 미국 땅을 밟기 전까지만 해도 대미 인식에서 어느 누구보다도 광주와 '코드'가 맞는 정치인이었다.

광주 518 묘역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대미 '저자세 외교'에 항의한 한총련 학생들.
광주 518 묘역 앞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대미 '저자세 외교'에 항의한 한총련 학생들. ⓒ 안현주
그러나 이번 방미 활동에서 보여준 노 대통령의 대미 '저자세'는 아무리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이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라고 하더라도 광주 시민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처신이었다. 그것은 노무현 후보에게 경선승리의 분수령을 만들어준 광주의 정치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자 5월 광주의 기대를 배신한 것이었다.

신당 창당은 노무현의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정치기술'?

'동남풍'으로 표현되는 신당의 영남 공략과 맞물린 노 대통령의 특보단 임명 움직임도 호남 민심에는 마뜩찮은 대목이다. 이를테면 신당 창당 및 대구-경북 민주당 '물갈이'에 앞장서고 있는 영남 신주류 대표격인 이강철 민주당 조직강화특위 위원, 신주류와 합당을 추진중인 김영대 개혁당 사무총장, 역시 신당 합류가 예상되는 울산 개혁그룹의 송철호 변호사 등의 면면을 보면, 이는 영남지방에서 민주당 조직을 대체하고 내년 총선에서 영남을 공략하려는 포석임이 분명해 보인다.

특히 노 대통령의 오랜 '정치적 동지'이자 측근인 이강철 위원은 19일 신당 참여를 배제할 인사로 정균환 원내총무 등 구주류 5명의 실명을 거론함으로써 불과 3일 전의 신당 워크숍에서 합의한 '인적 청산은 없다'는 통합형 개혁신당 결의를 사실상 번복해버렸다. 심지어 민주당 외곽의 신당 추진체인 부산정치개혁추진위(정개추) 주변에서는 "부산에서 민주당은 거추장스런 외피일 뿐이고 '정개추'가 사실상 정당"이라는 호언(豪言)이 공공연하게 나돈다.

이런 발언들은 신주류 강경파의 인적 청산론이 여전히 유효할 뿐만 아니라 '노심'을 반영한 것 아니냐는 의심을 사기에 별로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그래서 '동남풍'을 주축 동력으로 한 신당 창당은 노무현 대통령이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정치기술'을 발휘한 것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물론 1988년 노재봉씨가 지적한 김대중의 '노련한 정치기술'과 2003년 노무현의 '노련한 정치기술'은 다른 차원의 것이다. 그러나 신당 창당으로 발휘된 노무현의 '노련한 정치기술'은 김대중과 광주를 고리로 연결돼 있고 그 고리를 끊기 위한 광주 민심의 선택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에서 비슷한 차원의 것이기도 하다.

'외곽을 때리는 노련한 정치기술'은 정치개혁의 제1과제인 당·정분리의 원칙과 제2과제인 당원이 주인인 정당구조 사이의 모순적 상황논리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 점에서 신당은 또 다른 현실적 모순을 타개하기 위한 카드이기도 하다.

신당 창당은 광주의 '희생' 강요하는 '승리 이데올로기'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신당 창당과 관련해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민주당 후보로 출마해 승리한 것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다. 심지어 현재의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민주당 지지도는 한나라당을 한참이나 앞서고 있다. 그런데도 왜 신당, 특히 개혁신당 창당론자들은 "민주당으로는 안된다"면서 "분당도 불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대선과 총선은 다르기 때문이다. 대선은 명분이 좋으면 득점하기도 유리하지만, 총선은 명분보다 실리가 중요한 '땅 따먹기' 게임이다. 이를테면 민주당의 경우 대선에서는 영남에서 적은 표를 얻더라도 수도권에서 만회가 가능하지만 총선에서는 영남의 선거구가 호남의 선거구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에 현재의 지역구도 하에서는 아무리 주판알을 두들겨도 제1당 되기는 어려운 현실이다. 그래서 '호남당'으로 낙인찍힌 민주당을 버리고 '영남당'으로 변신한 '신당 카드'를 쥐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민주당으로 안된다'는 논리는 기본적으로 '영남에서는 민주당으로 안된다'고 하는 것이 정직한 표현이다. '정개추' 같은 대체조직이 수도권보다는 영남이라는 민주당의 '변방'에서 활발한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지역주의 논리와는 거리가 있다. 현재의 양당 지역구도 하에서 민주당이 영남에서 1석을 빼앗아 오는 것은 2석을 얻는 효과가 있다. 그것은 지역주의라기보다는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내건 '승리 이데올로기'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나는 '알을 깨는 아픔' 운운하면서 신당 창당이 5·18 정신을 계승하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논리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5·18 정신의 '무임승차' 쪽에 더 가깝다. 그것은 5·18 정신을 판 명분 싸움이요, 궁극적으로는 당권을 잡기 위한 주도권 싸움일 뿐이다. 그 점에서 "신당은 민주당의 희생 위에서 탄생하지만 5·18 정신을 더욱 빛낼 것"이라느니, "지역 구도와 낡은 정치의 틀을 깨는 데 민주당이 앞장서 부서질 때 새 정치 질서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정동영 의원의 주장은 차라리 '솔직'하다.

다만 풀리지 않는 의문은, 그 '승리 이데올로기'라는 것은 왜, 그리고 늘 역사의 고비마다 '발전적 해체' 운운하면서 광주에게만 '희생' 혹은 '선택'을 강요하느냐는 것이다. 그 의문은 '신당 대세론'에도 불구하고 내가 선뜻 신당에 손을 들어주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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