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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용미리 시립 묘지전경
ⓒ 이형웅
지난해 서울시의 화장률이 57.1%를 넘어섰다. 화장의 장묘법이 이제는 모두에게 자연스레 선택되어지는 것 같다. 지난 90년대 초부터 정부와 시민단체, 언론사 등이 주도한 국토의 효율적 이용 측면을 강조한 화장장려운동으로 이제는 화장이 국민들의 인식 속에 “죽으면 당연히 화장해야되지 않겠느냐“식의 풍조가 정착되어 가고 있는 듯 하다.

흔히들 화장장려운동을 말할 때 “산 자도 차지할 땅이 없는데, 죽은 자가 차지하는 땅이 너무 넓다”는 식의 주장으로 현대는 화장의 장묘법만이 유일하고 올바르다는 이분법적인 생각으로 일관되게 주장되어 왔다. 그런데 내게는 그러한 주장들이 지난 70년대의 ‘가족계획사업’을 연상하게 만든다.

다들 알고 있듯이 ‘잘 키운 딸 하나 열 아들 안 부럽다‘로 시작된 가족계획사업은 너무 급진적으로 진행되었고, 우리 삶의 모습을 변화시키는데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으며 현재에 이르러 깊은 파장을 남기고 있다.

당시 1명의 자녀를 가진 사람은‘문화인’이라 칭했고, 2-3명의 자녀를 가진 사람은 미개인, 야만인이라는 우스개 소리가 떠돌 정도였다. 물론 지금 이 말은 아주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지고, 현재는 출산율 저하 때문에 또 난리북새통이다.

전세계적으로 사회 구성원의 출생과 사망에 대해 어느 정도 통제를 시도하지 않는 나라는 없었다. 그러나 이 중차대한 문제를 행정 차원의 규제 문제로만 환원시키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더구나 우리가 현재의 장묘 문제를‘가족계획사업’처럼 또 다시 계몽과 미몽(迷夢), 선과 악 내지는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구도로 끌고 가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다는 생각이다.

"죽음에 대한 인식과 그것과 관련된 사회적 행위들은 아주 천천히 변화하기 때문에 유의미한 변화양상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천 년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죽음의 역사’ 필립 아리에스)

작금에 우리가 행하고 있는 극단적인 화장문화추진운동은 우리의 전통적인 죽음에의 인식과 그 변화추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아주 오랫동안 변하지 않았던 또는 지극히 느린 속도로 변화해오던 우리의 죽음 인식이 이분법적 사고의 화장문화전파운동으로 요 몇 년사이에 급진적으로 변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도대체 인간의 인식이라는 것이, 더구나 죽음에 대한 인식이라는 것이 이렇게 빨리 변화될 수 있는 것인가?

▲ 용미리 옥외벽식 납골단
ⓒ 이형웅
우리가 장례의식에서 죽은자에 대해 예의를 갖추는 것은 본디 산 자를 위한 것이었다. 망자 자신을 위함보다 살아있는‘나’와 ‘우리’를 위한 것이다. 유한한 인간의 존재적 한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우리의 남아있는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몸부림인 것이다.

죽음에 대한 의미 부여가 물론 장묘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며, 그 방법이 꼭 매장이나 화장이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특정한 방법의 문제라기보다는 죽음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시선과 보다 더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요즈음 우리 사회를 달구고 있는 화장 논의는 과연 얼마나 이런 문제의식과 관련되어 이루어지고 있는가 자문해 볼일이다.

이미 90년대 초 화장장려운동이 본격화하기 이전부터 화장률은 지속적으로 증가하고 있었다. 물론 이 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된 이후 화장률은 훨씬 더 가파른 상승세를 타고 있고, 최근의 각종 조사에서는 화장에 대한 선호도가 매장에 대한 그것을 앞지르고 있다. 이런 현상은 화장장려운동가들이 보기에는 아직도 충분하지 않은 것일 수 있겠으나, 필자가 보기에는 상당히 급격한 변화이다.

언론이 어떤 계몽적 의도를 가지고 캠페인을 하는 것은 자유이겠으나, 만약 그것이 극히 복잡한 의식(意識) 차원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면, 너무나 분명한 선언적 캠페인은 자칫 보다 깊이 침잠해있는 중요한 문제들을 잠재워 버리고, 이를 단순하게 정책적 차원, 시민운동 차원으로만 환원시켜 버리는‘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낳을 수 있다. 더구나 언론이 장묘문제와 관련해서 화장을‘도덕적 우위’로 포장하고 있는 데 대해서는 강하게 문제 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과연 우리는 왜 화장을 선호해야 하는가? 좁은 땅만이 진정 문제의 핵심인가? 땅이 문제라고 한다면, 매장 반대가 필연적으로 화장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된다.

우리의 전통적인 매장법 자체가 원흉이라기 보다는 그의 운용이 많은 문제를 낳고 있기 때문이다. 난립되고 관리되지 않는 개인묘지, 축적된 무연고 묘지 그리고 일부 계층의 호화분묘 등이 먼저 해결되어야 한다.

전체묘지의 70%가 넘는 것으로 보이는 (불법)개인 묘지와 40%정도로 추정되는 무연고 묘지만 정리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리고 묘지 시한부 사용제 등을 통해 묘지면적의 증가를 막을 수 있다면 상당정도의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를 정부, 시민단체, 언론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화장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주장되는가? 필자가 생각하기에 그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불법 묘지와 무연고 묘지의 정리라는 것이 묘지 자체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선행되기 전에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데 있는 것 같다.

묘지에 대한 우리의 전통적 인식은 예를 들어 건설공사 중 묘자리가 발견되면 모든 공사를 중지하고, 후손을 찾아내서 이장(移葬)을 하도록 하고, 고사를 지내는 정도라 하니, 과연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성격의 문제는 아니다 할 것이다. 즉 한번 설치한 분묘는 손대기를 금기시하여, 국가에서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데 그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동안의 화장 장려 운동이 가져온 중요한 파생적 결과 중 하나는 바로 이 불법 묘지와 무연고 묘지에 대한 처리가 상당히 용이해진 것일 것이다.

어쨌든 이제 우리는 정말 ‘환경보전과 국토의 효율적 이용‘을 위해 화장을 선호하게 되었는가? 그도 아니면 우리는 조상들을 보다 자주 찾아 뵙고, 잘 섬기기 위해 화장을 선호하게 되었는가? 물론 “매장을 한다고 해서 자손들이 더 돌보고 납골을 한다고 해서 소홀히 하는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매장할 때보다 ... 아무래도 더 자주 찾아뵐 수 있을 것”같다는 말도 수긍하기 어렵다.

‘환경보존과 국토의 효율적 이용’이라는 대의명분을 넘어 “후손들이 묘지 관리를 제대로 할 것인지에 대한 우려가 확산되고 있고, 나아가 편리하고, 간단하고, 관리도 쉽고, 돈도 덜 들기 때문에 화장을 한다”면 말이다.

▲ 용미리에 조성중인 산골공원(추억의 동산)
ⓒ 이형웅
나아가 필자는 우리가 화장을 선호하게 된 또는 쉽게 받아들이게 된 이유 중 중요한 것 하나는 지극히 현세적인 사고와 그에 따른 죽음에의 의미부여 감소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살아서, 건강해서 내 몸이 중요한 것이지, 죽은 몸은 아무 쓸모 없는 몸이라고 한다면, 남은 과제는 보다 깨끗이 사라지는 일뿐인 것이다.

어느 초등학생의 아버지가 오래 전부터 나중에 화장해주길 원한다고 말씀하신다기에, 그 이유를 뭐라 하시더냐 물었더니, 그 초등학생의 명쾌한 대답은 이러했다. “저희 아버지가 원래 심플한 걸 좋아하시거든요!”

조선시대 이전에도 화장이 있었다는 걸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그 당시의 화장과 오늘 우리가 주장하는 화장이 동일한 논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조금만 솔직해진다면, 오늘의 화장이 죽은 자에 대한 또 다른 예의를 갖추는 방식이며, 죽은 자가 이 사회에 남길 수 있는 마지막 기여라는 식의 주장을 강하게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화장시설을 갖고 있을 뿐, 안타깝게도 떠나는 자와 남는 자가 서로 화해하고, 순화된 마음으로 이별할 수 있는 화장의례의 장은 아직 갖고 있지 못하다.

그래서 “자연훼손을 걱정해서도 비좁은 땅덩어리를 걱정해서도 후손들의 부담을 걱정해서도 아니다. / 죽은 이들은 무덤으로 이 세상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아닌 그 삶으로써 흔적을 남기는 것. 그 삶 또한 흔적없이 거둬갈 수 있다면 더욱 좋은 일이라고 언제부턴가 일찍 그런 생각을 지니게 되었다”는 시인의 이야기는 훨씬 더 진실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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