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나를 이끌어 준 책을 말해보라고 한다면, 그 중 하나가 <장자(莊子)>이다. 20여 년 간 어줍잖은 목회를 해오는 동안 세상은 거대한 맘몬과 바벨에 의해 모든 가치는 혼재되어 개판 오분 전으로 돌아가고 나 역시 삶의 무게중심을 잡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그래도 똑바로 서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다행히 그때마다 나를 붙들어 주며, 지켜준 책이 바로 <장자>이다.
장자의 이름은 주(周)로 BC 370-285년경 중국 송나라 사람이었다. 장자가 활동하던 시절 중국 철학은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개인적 주관주의로 전락, 모든 것을 자기중심에서 보고 의미부여를 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백가쟁명을 학술적 개방이라고는 하나 제자(諸子)들은 각기의 문호를 폐쇄하고 남의 주장을 거부하여 오히려 극단적인 대립과 분열을 가져왔다.
일반적으로 범한 당시의 철학적 과오는 국부적인 것에 치우쳐 전체를 보지 못하는 편집(偏執)과, 세상사를 인간중심, 자기위주로 보려는 망념, 권위의식에 빠져들어 자연의 진면목은 여러 가지 가상(假想)에 가려졌으며 여러 가상을 더듬어 생긴 지견(知見)은 다시 인간본성을 흐리게 만들어 놓았다.
이 미망(迷妄)된 인간들이 가상과 오식 사이에서 벌이는 시비 논쟁은 자연 평행선을 달리어 수습될 수 없었다. 장자철학은 그러한 가상과 가식, 편집과 편지(片知)를 철저히 타파, 자연과 적나라한 인간을 직접 빈틈없이 만나도록 함으로써 모든 문제를 문제 이전으로 환원시키고 인생의 가장 순탄하고 자유로운 삶을 되찾도록 하는데 그 취지를 두었다.
그는 편집과 망념을 해소하는 철학적 기조로 자연의 정체성(整體性), 만유의 형평성(衡平性), 개체의 단위성(單位性), 그리고 모든 시비의 상인성(相因性) 등을 내세웠다. 장자에 의하면 세계는 개체들의 공능(功能)이 회현(會顯)하는 총화장(總和場)이며, 또 자연 외에 그 무엇이 있어 조물주제(造物主祭)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의 변화는 출렁대는 자연계의 일환일 따름이다.
그러므로 개체는 고립할 수 없고 서로 교섭 조화해야 한다. 장자가 나는 천지와 공생하고 만물과 공존한다(제물론)고 한 것이 그것으로 ‘천일합일(天一合一)’과 ‘물아무간(物我無間)’을 깨달은 말이다. 자연과 내가 둘이 아니라는 것을 알 때, 자연은 영원한데 나는 왜 단(短)한가 하는 비교에서 나오는 생사(生死), 화복(禍福) 등의 고뇌가 씻어지고, 나와 남이 의존관계에 있다고 볼 때, 어느 것은 위대하고 어느 것은 졸렬하다는 차등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일체는 자재(自在)요 평등일 뿐이다. 이러한 자연관에서 폐쇄된 소아(小我)가 개방되고 무분별한 무차등의 대아(大我)가 탄생한다. 장자의 달관된 인생관은 이러한 대아(大我)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다. 장자의 인생관의 요지는 자연에 순응하라(全性), 항상 자기를 겸허하게 하라(保眞), 피차의 처지를 바꾸어서 시비를 보라 즉 전관보조(全觀普照)하라, 유용(有用)과 무용(無用) 사이에 처신하라(虛己) 등 네 가지로 집약된다.
전성(全性)하려면 타고난 그대로 살아라. 오리발이 짧다고 잡아 늘이고, 학(鶴)의 목이 길다고 짧게 줄이면 오히려 제 구실을 못한다. ‘감관(感官)이 없는 혼돈(混沌)에게 일곱 구멍(感官機能)을 파놓고 보니 혼돈은 죽었더라(應帝王)고’한 장자의 비유처럼 있는 것을 다르게 개조하거나, 없는 것을 인위로 만들어내면 자연의 상태가 파괴되고 형평이 깨져서 자연과 만유는 다같이 피해를 보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장자는 인위를 가지고 자연을 파괴하지 말라고 외쳤다.
다음 보진하려면 욕심을 버리고 간편에 말려들지 말라. 욕심은 욕심을 낳고, 간편은 간편을 추구하여 정신이 쉴 새 없고 육체가 지친다. 이른바 ‘기심기사(機心機事)’가 바로 그것이다. 또 자아를 늘 텅 비게 그리고 개방하라. 배를 산속에 감추고 산을 또 못 속에 감추었는데 한밤중에 도적이 와서 이를 훔쳐갔다. 그러니 천하를 천하에 감추지(결국 내놓은 것이 된다) 않으면 지켜지지 않는다.(大宗師) 이와 같이 없는 것을 억지로 가지려는 마음, 있는 것을 언제까지나 지키려는 행위에서 벗어나야 속박에서 풀려난다.
세상의 혼란은 피차의 시비에서 비롯된다. 앞의 자연관에서 본 것처럼 너와 나는 다같이 자재요 평등이다. 본래 너 잘나고 못난 것이 없다. 그런데 자기만 옳은 양 남을 용납하지 않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자기한계를 알아라. 하루살이가 밤낮을 알리 없고, 여름벌레가 겨울을 경험했을 리 없다. 즉 편지(片知)는 전체를 알 수 없다. 그런데 자기 기준으로 모든 것을 규정하니 시비가 생길 수밖에 없다.
모든 시비는 피차의 처지을 고집 하는데서 생기므로 그 처지를 바꿔 놓고 생각하지 않으면 무한히 계속된다. 그러니 피차 자기를 초월해서 전면을 함께 보고 두 면을 합해서 판단하라. 이것을 ‘도추(道樞), 환중(環中)’ 또는 ‘양행(兩行)’(薺物)이라고 했다. 끝으로 장자철학의 실용 면은 양생과 처세에 있다. 자연과 마찰 없이 사는 것이 양생법이다.
즉 자기의 자유를 잃지 않고 모든 주위와 융통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자기를 너무 들어 내지 않고 겸허해야 바람을 맞지 않는다. 이 세상에는 쓸모없어서 꺾이는 것도 있고 쓸모가 있어 베이는 것도 있다. 그러기에 장자는 유용(有用)과 무용(無用) 사이에 처하라(山木)고 했다.
내일이 여름 더위가 시작되는 단오(端午)이다. 세상만사 모든 근심 따위 잊어버리고 아침 저녁 녹차라도 한잔 하면서 장자의 잠언(箴言)에 귀를 기울이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