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권을 합쳐 1500페이지 가량 되는 두터운 책입니다. 하지만 그 두께가 주는 압박감과 달리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신선한 공기가 머리 속에 불어오는 듯 합니다. 낯설게 느껴지는 개념들, 낯선 이름들, 낯선 얘기들이 머리를 어지럽히기도 하지만 깨달음은 책 속이 아니라 그 책을 읽고 있는 우리에게 있겠지요.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으며 다 이해하겠다는 욕심을 떨치고 읽으면 의외의 재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연구공간 너머+ 수유연구실에서 진행된 강연을 모은 것이기에 하드(hard)한 책의 표지와 달리 내용은 소프트한 설명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사실 이진경이라는 이름만으로도 책에 대한 호기심이 생깁니다. <철학의 모험>,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 등 그의 이름이 박힌 책은 항상 새로운 뭔가를 던져주었거든요. 이진경 선생은 ‘유목주의’이라 번역되는 ‘노마디즘(nomadism)’이라는 제목으로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사실 <노마디즘>은 들뢰즈와 가타리가 함께 쓴 <천의 고원>이라는 책을 다시 썼다(re-writing)고 할 수 있습니다. 책 속에 나오는 표현을 빌면, 이진경 선생이 들뢰즈-되기, 가타리-되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되기’가 뭐냐구요? 되기란 ‘생성의 철학’을 설명하는 한 요소로 어떤 확정된 정체성, 동일성을 뛰어넘는 것, 경계의 문턱을 넘는 현실적인 변화를 말합니다.
“되기는 새로운 분자적인 성분을 만들어내는 창조요 창안이라고 할 수 있으며, 따라서 모든 되기는 분자적이며 분자-되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노마디즘 2권>, 111쪽)
| | 지은이 소개 | | | | 1982년 서울대 사회학과 입학했고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철학과 굴뚝청소부>, <필로시네마 혹은 탈주의 철학에 관한 7편의 영화>, <철학의 탈주>, <탈주의 공간을 위하여>, <탈주선 위의 단상들>, <근대적 시․공간의 탄생>, <근대적 주거공간의 탄생>, <수학의 몽상> 등 많은 책이 있다.
이진경이라는 필명이 알려진 것은 1987년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이라는 책을 통해서였다. 그 후 선생은 서점에서 구할 수 없는 지하 선전물인 <현실과 과학>, <노동계급>에 종종 출현했지만 1990년 ‘노동계급’사건으로 구속되었다. 출소 후 선생은 집필 활동에 몰두하고 있고 ‘연구공간 너머+수유연구실’이라는 꼬뮨을 만들어 세미나와 강의를 하고 있다. | | | | | |
꼬리를 무는 의문이군요. 분자는 뭘까요?
“‘몰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는 분자적 움직임의 다양성을 환원하고 제거하여 하나의 거대하고 단일한 통일체로 귀속시키는 경우를 말하고, ‘분자적인 것’이라고 말할 때는 그런 몰적인 단일성으로 환원되지 않는 고유한 움직임과 흐름, 욕망 등을 지칭하는 경우를 말합니다”(<노마디즘 1권>, 228쪽). 물론 몰적인 것과 분자적인 것이 완전히 구별되는 건 아닙니다. 때론 분자적인 것이 몰적인 것으로 변하기도 합니다.
왜 이런 되기를 해야 할까요?
“되기란 무어라 명명할 수 없고 무언지 명확하게 지각할 수 없는 분자적인 것을, 특개적인 것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노마디즘 2권>, 117쪽). 그런 움직임은 철저히 소수자가 되려 할 때, 다수자가 지배하는 몰적 구성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소수자가 되려할 때 가능합니다. 들뢰즈와 가타리의 표현을 빌면,
“되기는 소수적이며, 모든 되기는 소수-화(devenir-minoritaire)일 수밖에 없다”(<노마디즘 2권>, 118쪽)고 합니다. 그렇게 끊임없이 소수자가 되려는, 소수화하려는 노력 속에 유목주의가 자리잡고 있습니다. 거대한 동일성으로 휩싸이는 세계화 시대에 고유한 흐름과 욕망을 지키려는 유목주의는 갑갑한 세상을 탈주하게 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 책에서 이진경 선생은 들뢰즈-되기, 가타리-되기를 시도하고 있습니다. 되기는 그냥 따라하는 흉내내기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진경이라는 개인과 들뢰즈, 가타리라는 개인의 경계를 넘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겁니다. 리좀, 기관없는 신체, 강밀도, 분열분석, 지질학적 역사유물론, 영토화, 탈영토화, 반음계주의, 클리나멘, 리토르넬로, 전쟁기계, 야금술, 스톡 같은 낯선 개념들이 때론 음악과 영화를 통해, 때론 무협지나 홍콩영화에 등장할법한 내공, 무공에 관한 얘기들을 통해 설명되고 있습니다.
맨 마지막 장인 “15장 무아의 철학과 코뮨주의”에서 선생은 코뮨주의를 ‘상생의 윤리학’으로 풀어냅니다. 그것은
“이질적인 것들을 향해, 나와 다른 모든 차이를 향해, 따라서 가능한 모든 것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열고, 그것을 상으로, 적어도 자신과 상생가능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노마디즘 2권>, 724쪽)입니다. 선생은
“‘주체도 대상도 없는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이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랑하는 것, 모든 타자들에 대해 평등하게 마음을 여는 것을 뜻할 겁니다”(<노마디즘 1권>, 404쪽)라고도 얘기합니다.
마지막 장을 읽다 보면 종로거리 지하철을 거닐다 “도를 아십니까”라는 말을 들은 것 같은 느낌을 받기도 합니다. 사실 철학에서는 이분법을 극복하고 유체의 흐름을 가지는 게 쉬울 수 있지만 현실에서는 그런 흐름을 가지기가 어렵습니다. 우리의 일상은 아주 소소한 일에서조차 양자택일을 강요당하곤 하니까요.
현실에서는 ‘결단’이 필요할 때가 많습니다. 더구나 사회 속의 약자라면 그런 결단을 내려야 할 때가 더 많습니다. 안락한 집을 불지르고 천막을 짊어지며 떠나고 싶지만 어깨를 누르는 무게가 너무 무거워 주저앉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세상에서 벗어나는 탈주가 아니라 세상을 탈주케 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요? 우리 각자가 찾아야 할 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