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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성장 초입의 모습
횡성장 초입의 모습 ⓒ 최성수
비탈 밭을 하얗게 뒤덮은 메밀꽃이 강원도 평창과 횡성의 독특한 풍경인 때가 있었습니다. 이효석의 소설에 나오는 표현대로, 달밤에 보면 소금을 뿌려놓은 것 같던 그 풍경을 이제는 찾아보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내 고향 안흥도 한때는 산비탈의 손바닥만한 틈만 있는 곳이면 메밀을 심었는데, 이제는 아무도 메밀을 심지 않습니다. 그저 어쩌다가 메밀 음식을 전문으로 내는 식당 주변에 '우리 식당에서 재료로 쓰는 메밀이 이렇게 생겼습니다' 하는 전시용으로 심어 놓은 것 정도가 눈에 띌 뿐입니다.

평창에 가면 제법 넓고 큰 메밀밭을 구경할 수 있지만, 그것도 예전처럼 아무 곳에나 가도 구경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닙니다.

요즘 들어 메밀이 성인병 예방에 좋다느니, 건강식품이라느니 하는 연구들 덕분에 메밀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고는 있다고 합니다만, 그래도 메밀 음식을 찾아 먹으려면 일부러 발품을 팔아야 가능한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난 6일, 고향에 갔다 오다가 횡성 장에 들렀습니다. 마침 장날이라 구경 삼아 들린 것이지요.

평소에는 주차장과 도로인 곳을 막고, 장날이면 노점상이 빼곡하게 들어찹니다. 사람들도 발 디딜 틈도 없이 많습니다.

“횡성 장이 이제 이 근동에서는 가장 큰 장일 거야. 장사도 제일 잘 된다더라.”

집에서 수확한 것인지, 온갖 잡곡을 오밀조밀 늘어놓은 노점상
집에서 수확한 것인지, 온갖 잡곡을 오밀조밀 늘어놓은 노점상 ⓒ 최성수
지난번에 횡성 장 이야기를 꺼냈더니 아버지께서 그런 말을 하셨는데, 그 말씀대로 횡성 장은 정말 장 다운 맛이 납니다.

초입에 마늘을 산더미같이 쌓아 놓고 손님을 부르는 사람이 있고, 집에서 농사지은 것을 가지고 나왔는지, 주먹만큼씩의 잡곡들을 봉지봉지 담아놓은 할머니도 계십니다.

항아리 가득 된장을 담아 놓고, 큼지막하게 ‘조선 된장’이라고 써 붙여 놓았지만, 정작 파는 사람은 보이지 않습니다. 직접 족발을 만들어 파는 냄새와, 구수한 김을 구워 내는 냄새가 시장 가득 퍼집니다.

직접 만들어 파는 족발
직접 만들어 파는 족발 ⓒ 최성수
생선을 파는 총각은 연신 “자, 싸요. 싸. 갈치가 거저”를 외치며 투박한 칼로 생선 토막을 치고 있고, 늦은 아침인지 아니면 이른 점심인지, 국수를 시켜 먹는 아주머니들도, 벌이가 괜찮은지 웃음이 얼굴 가득합니다.

한 켠에는 횡성의 특산인 더덕이 한 무더기 놓여 있습니다. 횡성은 한우가 유명한데, 그 한우에 더덕 껍질을 먹여 고기 맛이 더 좋다고도 합니다. 더덕을 보니 향긋한 더덕내가 풍기는 것 같습니다.

“내가 거의 다 먹었다니까.”

어떤 아주머니가 곁을 스치며 그런 말을 합니다. 힐끗 보니, 아주머니가 손에 든 종이 봉지에 오디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아주머니의 입 부분에는 검붉은 오디 물이 배어 있습니다. 아마도 시장 어디쯤에서 파는 오디를 사 먹으며 아주머니는 어린 시절 뽕나무에 올라가 오디를 따던 추억에 젖었을 것입니다.

ㅁ자로 거슬러 장 풍경을 구경하는데, 우리 늦둥이 진형이 녀석이 갑자기 제 손을 잡아끕니다.

“아빠, 메밀 총떡 먹으러 가야지.”

메밀 총떡을 만들기 위해 얇게 메밀 전을 부치고 있다
메밀 총떡을 만들기 위해 얇게 메밀 전을 부치고 있다 ⓒ 최성수
녀석은 지난 번, 할아버지 팔순 때 횡성 시장에서 사 간 메밀 총떡을 기억하고 있었나봅니다.

그때, 시장 안 가게에서 직접 부친 메밀 총떡을 한 상자 사다 친척 분들께 대접했는데, 모두들 다른 음식보다 메밀 총떡에 젓가락이 바삐 움직였었습니다.

“그래, 우리 메밀 총떡 먹고 가자.”

나도 메밀 총떡 맛을 떠올리며 녀석이 끄는 대로 따라 갑니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서자 녀석이 또 아는 체를 합니다.

“메밀촌도 있는데, 여기 말고 우리가 가는 데는 일미 반찬이야.”

할아버지 팔순 때 사간 집을 기억하고, 꼭 그 집으로 가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간 곳은 반찬 가게 앞에서 상호도 없이 메밀전과 총떡을 부쳐 파는 집입니다.

아주머니는 연신 메밀 부침을 부쳐 내면서도 반갑게 맞아 주십니다. 아버지 팔순이 벌써 석 달도 전의 일인데 우리를 기억하고 계신 듯 합니다.

“메밀 총떡 주세요.”

진형이 녀석이 대뜸 총떡을 시킵니다.

“부침도 주시고, 감자 부침도 하시네요. 그것도 한 장 주세요.”

아주머니는 날랜 솜씨로 메밀을 얇게 펴서 부치더니, 속을 넣고 돌돌 말아 냅니다. 뜨겁지도 않은지, 맨 손으로 철판 위의 메밀을 살살 눌러 붙이고, 들어내더니 서 너 조각으로 잘라 줍니다.

가지런히 쌓아 놓은 메밀 총떡
가지런히 쌓아 놓은 메밀 총떡 ⓒ 최성수
우리는 얼른 한 조각씩 집어 맛을 봅니다. 진형이 녀석도 얼른 한 조각을 입에 넣더니 뜨거워서 헉헉거립니다. 그래도 뱉지 않고 참아내더니, 조금 식었는지, 맛나게 씹어 먹기 시작합니다.

부드러운 메밀 부침 속에 감싸인 속의 맛이 일품입니다. 메밀 총떡의 첫 맛은 구수하기 그지없습니다. 메밀의 구수한 맛입니다. 뜨거운 메밀 총떡을 입에 넣고 후후 불며 식히면 구수한 메밀 맛이 입 안 가득 풍깁니다. 그 맛은 결코 자극적이지 않습니다. 무덤덤하고 심심한 것이 꼭 강원도 사람 심성을 닮은 맛입니다.

그러나 속맛은 결코 만만하지 않습니다. 메밀 총떡 속은 씹으면 아삭아삭한 것이, 소리도 좋고 맛도 매콤합니다. 처음에는 그저 적당히 매콤하다 싶어 그냥 씹는데, 씹으면 씹을수록 매운 맛이 더해집니다. 그래서 물을 찾기 마련입니다. 덤덤하고 심심하면서도 매콤함, 그 대조적인 맛이 한 음식에 섞여있으니 참말 독특할 수밖에 없습니다.

메밀 총떡의 속은 무를 채친 것이 기본입니다. 동치미 국물에 잠겨 있던 무면 더 좋습니다. 그 무를 채 치고, 거기에 매운 고춧가루 양념을 합니다. 그것과 함께 당면을 삶아 넣은 것이 메밀 총떡의 속입니다. 겨울에는 만두 속처럼 두부를 함께 넣기도 합니다.

메밀 총떡의 속을 넣는 모습
메밀 총떡의 속을 넣는 모습 ⓒ 최성수

도르르, 속을 넣고 메밀 전을 말면, 메밀 총떡이 완성된다
도르르, 속을 넣고 메밀 전을 말면, 메밀 총떡이 완성된다 ⓒ 최성수
집사람은 거기에 정말 만두처럼 돼지고기를 볶아 넣기도 하는데, 그것은 또 그것대로 독특한 맛이 있습니다. 식성에 따라 다양한 속을 넣어 만들어 먹는 재미도 총떡에서는 가능하지요.

터키에 가면 케밥이라는 것이 있다는데, 메밀 총떡처럼 둘둘 말아 만든 음식이라고 하더군요. 터키의 케밥이 그 나라의 독특한 음식이듯, 메밀 총떡은 우리나라의 독창적인 음식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다만 어디서나 먹을 수 없고, 일부러 찾아가 먹어야 하는 불편이 이 음식을 널리 보급할 수 없게 하는 문제지요.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면, 일부러 찾아 먹어보는 재미도 쏠쏠한 것 아닐까요?

시장 귀퉁이, 직접 만든 된장을 파는 항아리가 정겹다
시장 귀퉁이, 직접 만든 된장을 파는 항아리가 정겹다 ⓒ 최성수
메밀 총떡과 부침, 감자전가지 먹고 나니 배가 부릅니다. 늦둥이 진형이 녀석은 매운 총떡 속 탓인지, 입술 주위가 빨갛게 되고, 물을 몇 잔이나 마셨지만, 그래도 맛있다며 다음에 또 먹자고 합니다.

김치를 제일 좋아하는 녀석이니, 매운 총떡도 입맛에 맞나봅니다. 장을 나오는 길, 아내는 막 구운 김 두 봉지를 사들고 좋아라 합니다. 맛난 것도 먹고, 반찬거리도 사니 이거야말로 돌 하나로 두 마리 새를 잡은 격이라는 생각이 드나봅니다.

우리 가족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남은 시장 길을 걸어 돌아왔습니다.

이제 오일장의 풍경은 찾아보기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고향 안흥의 장날도 예전 같지 않게 시들합니다. 그저 봉평이나 대화 장에서 옮겨온 튀김 파는 사람과 생선 장수들이 스러져가는 풍경을 지키고 있을 뿐입니다.

그래도 횡성 장에는 옛날 장의 흥겨움과 신명이 남아있어 추억에 잠기게 합니다.

“아빠, 메밀 총떡 정말 맛있지?”

집으로 돌아와서도 늦둥이 녀석은 메밀 총떡의 맛을 잊지 못하나봅니다. 1일과 6일에 열리는 횡성 장, 올 방학에는 하루 날 잡아 횡성 장에서 늦둥이 녀석과 온갖 구경과 맛 순례를 해 볼 생각입니다.

그 생각만으로도 벌써 입에는 군침이 고입니다. 물론 메밀 총떡이 당연히 그 순례의 한 자리를 차지할 것입니다.

횡성 특산인 더덕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주인은 어디갔나?
횡성 특산인 더덕을 무더기로 쌓아놓고, 주인은 어디갔나? ⓒ 최성수

마늘로 쌓은 성?
마늘로 쌓은 성?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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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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