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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제 40년의 궤적을 돌아보고 금융시장의 현주소를 진단한 저서 <제로시대, 성장신화는 끝났다>가 일반 독자들에게는 잔잔한 파문으로, 정책 관계자나 금융 전문가들에게는 근래에 보기 드문 '폭탄'으로 눈길을 끌고 있다. 특히 최근 금융대란의 '시한폭탄'으로 클로즈업 되고 있는 삼성, LG, 국민은행 등 메이저 카드사 부실의 뒷이야기, 추악한 실태를 정면에서 파고들었다는 점이 신선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제로금리, 제로성장, 제로취업, 제로시계(視界)로 가시화되는 '제로시대에 으뜸 지혜는 "고정관념을 깨고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이 생존 전략"이라고는 충고가 짙게 깔려 있다. 인플레 습성에 젖어온 성장시대는 부동산에 '돈을 박아놓고' 인내심만 유지하면 재산의 절대 액을 경제성장률이 자동으로 키워주었으나 경기 쇠퇴기에는 '디플레'가 가시적인 현상이기 때문에 '휘발성이 높은' 실물자산은 더 이상 이재수단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한 마디로 규모의 확대보다 상대적인 가치보존에 힘쓰라는 주문이다. 공급과잉에 따른 산업의 붕괴, 지나친 노사갈등, 지속적인 경제정책 부재, 환란과 카드채(債)가 몰고올 금융대란, 초저금리, 늘어나는 청년실업, 소비자의 구매력 상실과 극심한 소비위축 등 당장 화농(化膿)이 깊어지고 있는 악재, 즉 우리가 피부로 느끼고 있는 불안요소들을 손금 보듯,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숨가쁘게 쏟아놓는다.

저자가 응시하는 초점은 "금리는 왜 떨어질 수밖에 없고, 취업은 왜 안 되는가"하는 문제로 요약된다. 여기에 동원된 비유가 '먹이사슬' 이론이다.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의 경계(칸막이)를 없애버린 세계화가 지구촌 경제혼란과 실업증가의 근본 원인이라는 것이다. 야수성을 지닌 육식 금융자본주의가 초식성 집단주의, 즉 산업 자본주의를 급격히 대체하는 과정이라는 것.

신자유주의경제로 세계 금융지배에 나선 월가(wall street)의 금융자본주의자들이 사자나 하이에나라면 산업자본주의에 머물고 있는 한국은 초원에서 풀을 뜯는 사슴의 운명에 비유된다. 따라서 금융자본주의가 활동반경을 넓혀갈수록 지구촌의 부익부 빈익빈 심화는 피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한일 청구권자금, 광부와 간호사들의 서독 파견, 베트남전 파병, 중동 특수, 중화학공업 육성, 중국 수출, 지식정보화 산업 등 한국 경제의 견인차로 작용했던 사건들을 이해득실을 따져 알기 쉽게 간추린 솜씨도 돋보인다.

초가집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되었다가 다시 아파트 단지로 바뀌는 과정, 막걸리가 소주에서 맥주, 양주로 발전하고 와인으로 탈바꿈하는 현대화 과정에서 가치판단마저 일방적으로 미국화를 추종하는 젊은 세대에게는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보도록 하고 장년층에게는 의식의 환골탈태와 패러다임의 전환을 촉구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저자는 인터넷 시대에 '경제와 금융'이 이미 전문가들의 전유물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지난 40년 동안 서민들이 목격하고 체험한 금융사건 사례들을 인용해서 '경제와 금융이 어떻게 정치에 유린되어 왔는지' 낡고 병든 관치경제와 정경유착의 베일들을 냉혹한 시각으로 파헤치고 있다.

'논 팔아먹은 큰아들, 집 팔아먹은 작은아들'이라는 비유를 통해 비리 재벌, 부도덕한 정책 당국자, 그리고 여기에 기생한 파렴치한 금융기관 경영자들을 고발하고 있다. IMF 환란과 '대우채권'이라는 미증유의 사태를 겪었으면서도 다시 '카드채'라는 복병을 만나 엉거주춤하고 있는 노무현 경제팀에게 저자는 "고름이 살 되지 않는다"는 결단촉구도 서슴지 않는다.

코스닥 광풍이 몰아쳤던 1999-2000년, 신용카드로 빚잔치를 치렀던 2001-2002년의 내수경기 살리기 거품이 지금 어떤 결과를 빚어내고 있는지 '눈 있는 사람은 보고, 귀 있는 사람은 들으라!'고 외치는 대목은 차라리 절규에 가깝다.

카드회사의 대주주(재벌)와 은행들이 끝모를 금융혼란의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는 상황을 직시하고 모든 경제주체가 현실을 똑바로 파악하라는 호소다. 개인이나 국가나 막연한 '환상'을 버리고 마이너스 성장시대에 사고의 틀 자체를 송두리째 바꾸어야 한다는 소중한 충고가 아닐 수 없다.

제로시대 - 성장 신화는 끝났다

유경찬 지음, 씨앗을뿌리는사람(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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