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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리핀 출신의 아랄마도 테디씨. 그는 지난 8일 문을 연 대구 이주노동자문화센터를 지키는 상근자이다.
필리핀 출신의 아랄마도 테디씨. 그는 지난 8일 문을 연 대구 이주노동자문화센터를 지키는 상근자이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이주노동자들의 인권 문제 등을 다루는 관련 단체는 전국적으로 여러 군데 있지만, '피부색'이 다른 외국인이 상근자로 일하는 곳은 드문 편이다. 그래서 테디씨가 문화센터 지킴이로 나선 사연은 세인들의 귀를 솔깃하게 한다. 개소식 준비에 한창이던 지난 5일 테디씨를 만나기 위해 기자는 문화센터를 찾았다.

테디씨가 처음 한국 땅을 딛은 것은 7년 전인 96년의 일이다. 당시 산업연수생 신분으로 한국을 찾았던 그는 2년여 가량 섬유공장 등을 전전하며 고된 이국생활을 겪었다. 그리고 비자기간이 만료돼 필리핀으로 귀국했다,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기를 3차례나 반복했다. 지금은 합법적인 체류자이지만 한때 그는 불법체류자로 생활을 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98년 한국 여성과 결혼…한땐 불법체류자 고초도

그러던 중 테디씨는 지난 98년에는 한국인 여성과 결혼해 한국과는 더 깊은 인연을 쌓게 된다. 현재 테디씨의 부인은 필리핀 현지의 미술학원에서 일하면서 생활하고 있다. 전처 슬하에 난 테디씨의 딸들도 필리핀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다.

"한국에서 혼자 생활하다보면 외롭다는 생각이 많이 들어요. 필리핀에 남아있는 가족들이 보고 싶을 때면 더 그렇죠."

하지만 정작 아내와 가족들이 기다리는 필리핀으로 돌아가기는 쉽지 않는 구석이 있었다. "필리핀은 아직도 경제적으로 사정이 넉넉하지 못하죠. 한국에서 생활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벌어가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한국에서 생활하기를 희망하고 있어요."

그러나 테디씨의 속내(?)는 딴 곳에 있는 것 같았다. 그는 벌써 '한국'과 '한국사람'에 흠뻑 빠져 있었다. 그는 한국에 대한 느낌을 "'정'이 많은 곳"이라고 설명했다. 테디씨가 한국에서 만난 '친구'들이 그에게 베푼 인간적인 정은 그를 한국이란 곳에 더욱 묶어 두고 있었다.

특히 테디씨가 한국 생활을 시작하면서 만났던 김경태 목사에 대한 신뢰는 다른 어떤 이들보다 뒤지지 않았다. 김 목사는 대구 외국인노동상담소 소장을 지내면서 대구지역 이주노동자들의 '대부'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인물이다.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저를 따뜻하게 대해 주셨어요. 특히 김 목사님이나 교회에서 일하시는 분들은 저에게 많은 도움을 주셨죠. 그래서 예전에는 많이 외롭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달라요. 그외에도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인간적인 정을 가진 것 같아요."

"정 많은 한국과 한국사람들 좋아"

테디씨가 김경태 목사와 함께 문화센터 개소식을 앞두고 센터 내를 치장하기에 바쁘다.
테디씨가 김경태 목사와 함께 문화센터 개소식을 앞두고 센터 내를 치장하기에 바쁘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문화센터를 꾸미겠다는 것은 테디씨와 김 목사의 '합작품'인 셈이다. 이주노동자들의 보금자리가 필요하다는 김 목사의 생각과 한국에서 일하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해 일하겠다는 테디씨의 바람이 잘 접목돼 만든 결정체인 셈이다. 차근차근 계획을 세우던 두 사람은 최근에야 재원을 마련해 문화센터의 문을 열게 됐다. 테디씨는 이 계획을 실현시키기 위해 한 달 전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문화센터는 앞으로 대구지역 인근의 필리핀, 스리랑카, 베트남 등지의 이주노동자들에게 각종 인권, 노동 문제 등을 상담하고, 자체 모임을 가지거나 이국 생활의 아픔을 달래는 문화활동 공간을 제공한다는 계획이다.

문화센터 곳곳에는 테디씨의 정성이 군데군데 확인할 수 있다. 그는 낡은 사무실을 아늑한 문화센터로 변모시키기 위해 직접 파란색 도배용지로 치장하거나, 창문에도 색지를 붙이면서 문화센터 꾸미기에 여념이 없었다. 하지만 피곤하거나 귀찮은 내색 하나 보이지 않았다. 쉰이 다 되어가는 나이의 테디씨는 일을 하면서도 연신 함박 웃음만 보였다.

"문화센터가 문을 연다고 생각하면 행복할 뿐입니다. 이런저런 일들도 많지만 피곤한 줄 몰라요. 저의 노력으로 다른 필리핀 사람들이나 이주노동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면 그만큼 좋은 일도 없죠. 그것 만으로도 행복한 일이죠."

문화센터에서 테디씨가 하는 역할은 한 두 가지에 그치지 않는다. 문화센터를 찾아오는 이들을 위해 음료수를 준비하고, 간단한 음식을 만드는 일도 테디씨의 몫이다. 그리고 한국 생활이 힘들어 찾아오는 이주노동자들의 상담 역할도 테디씨가 맡게 된다. 테디씨는 여기에서 나아가 앞으로는 이주노동자들을 위한 신문도 제작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하지만 테디씨가 문화센터에서 하는 가장 큰 역할은 가수로서 직접 무대에 선다는 것이다. 테디씨는 '프로급' 가수이다. '프로급?' 아니 '프로' 가수라는 표현이 더 적절할지 모르겠다.

한국말은 아직 서툴러도 한국가요만큼은 자신있다. 노래를 청하는 기자를 위해 테디씨가 기타 연주를 하면서 '사랑이여'를 부르고 있다.
한국말은 아직 서툴러도 한국가요만큼은 자신있다. 노래를 청하는 기자를 위해 테디씨가 기타 연주를 하면서 '사랑이여'를 부르고 있다. ⓒ 오마이뉴스이승욱
테디씨는 필리핀에서 12살 때부터 노래를 불렀다. 게다가 직접 작곡과 작사까지 하는 '싱어 송 라이터'로 자타가 공언하는 실력파이다. 필리핀에서는 여러 차례 공식 앨범을 만들기도 했다고 한다.

12살부터 노래 부른 '가수'... 한국말 서툴러도 한국노래는 'OK'

뿐만 아니라 필리핀 현지의 라디오 방송국에서는 자신만의 프로그램을 진행했던 경력도 가지고 있다. 한마디로 '만능 예능인'이다. 테디씨는 이러한 경력을 발판 삼아, 여건만 주어진다면 필리핀 현지 방송을 통해 한국에서 일하는 필리핀 이주노동자들의 애환을 들려주는 방송도 직접 맡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기도 했다.

한국말이 아직 서툰 테디씨지만 한국의 대중가요만큼은 서툴지 않았다. 어떤 한국 가요를 좋아하느냐는 질문에 손을 꼽으면서 말했다. "내사랑 내곁에, 사랑을 위하여, 사랑이여…"

한 곡 정도 부탁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흔쾌히 무대 위에 선다. "꾸-움처럼 아름다운 사랑이여 / 꾸-움처럼 행복했던 사랑이여 / 머물다-간 바람처럼 기약없이 흩어져 간 내 사랑아...."

문화센터 곳곳에는 테디씨의 정성이 박혀있다. 센터는 앞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를 상담하는 것 외에도 각종 모임과 간단한 음식까지 제공하는 등 이주노동자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한다는 계획이다.
문화센터 곳곳에는 테디씨의 정성이 박혀있다. 센터는 앞으로 이주노동자들의 인권문제를 상담하는 것 외에도 각종 모임과 간단한 음식까지 제공하는 등 이주노동자들의 보금자리 역할을 한다는 계획이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기타 반주에 맞춰 속칭 '꺾기'에서 마지막 소절에는 항상을 떨림을 주는 것까지 영락없는 한국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다. 테디씨는 "한국 노래는 리듬도 좋지만, 특히나 가사 내용이 너무 좋다"면서 "팝송이나 필리핀 가요도 많지만 한국 가요는 더 마음에 든다"고 말했다.

테디씨와 김 목사는 문화센터를 이주노동자들만이 아닌 한국인들이 함께 이용하는 곳으로 만들겠다고 한다. 김 목사는 "보통 이주노동자들의 문제라면 한국인들이 은혜를 베풀어 관심을 가져 주는 것 정도로 여기거나 이주노동자들만의 문제로 치부하기 쉽다"면서 "하지만 우리 사회 모두가 자신들의 문제로 다뤄야 하고, 문화센터도 한국인들에게 문호를 열어 이주노동자들과 함께 소통하는 곳으로 만들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주노동자와 한국인들 모두에게 열린 문화센터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주노동자들에겐 항상 열려 있어요. 물론 관심이 있는 한국인들에게도 문은 활짝 열려 있죠. 친구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여기서 함께 만날 수 있는 거죠. 함께 노래도 부르고 저의 노래 공연도 보실 수 있답니다." 그의 말처럼 테디씨의 얼굴에도 '활짝' 미소가 지어졌다.

테디씨에게 미래에 대한 '꿈'을 물어 봤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꿈 대신 한국인들에 대한 바람으로 말을 대신했다. 불법체류자로서 한국에서 생활해봤던 그였기 때문일까. 그는 이주노동자들에게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보장해주길 희망했다.

대구 중구 태평로3가 중구보건소 옆에 위치한 이주노동자인권문화센터 입구. 문화센터는 이주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문제를 고민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길 원하는 한국인들에게도 활짝 열려져 있다.
대구 중구 태평로3가 중구보건소 옆에 위치한 이주노동자인권문화센터 입구. 문화센터는 이주노동자들 뿐만 아니라 이주노동자 문제를 고민하고 그들과 친구가 되길 원하는 한국인들에게도 활짝 열려져 있다. ⓒ 오마이뉴스 이승욱
"지금 한국에는 많은 이주노동자들이 생활하고 있어요. 그들 대부분은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언제 붙잡혀 갈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여 있죠. 한국 정부는 그들을 불법이 아니 합법적 노동자로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그들에게도 일을 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으면 좋겠어요."

지금 어눌한 한국 말투에 검은 색의 피부지만, 한국 가요를 즐겨 부르고 이웃집 아저씨처럼 맘 좋은 테디씨를 만나 보기 위해 문화센터로 발걸음을 옮겨 보는 것은 어떨까.

그곳에 가면 테디씨의 '구성진' 노래와 후한 인정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거기다 덤으로 이주노동자들에 대한 고민도 함께 새겨 볼 수 있는 뜻깊은 기회를 가질 수도 있다.

"한국인들이나 필리핀 사람이나 노래를 즐겨 부르고, 음악을 좋아하는 점은 모두 같은 것 같아요. 잘 사는 나라, 못 사는 나라, 그리고 한국의 노동자와 이주노동자로 구분할 것이 아니라 함께 노래를 부르면서 하나가 될 수 있잖아요. 제가 일하는 문화센터에서 함께 이런 모습을 만들어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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