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권위주의와 국회의원들의 무책임한 지각 습관을 꼬집은 유시민 개혁국민정당 의원의 편지글이 화제가 되고 있다.
'국회 본회의장의 조금은 이상한 풍경'이라는 제목의 이 편지글은 국회 권위주의에 대한 비판을 담은 국회 대정부질문 후기글 성격으로 지난 14일 유 의원이 직접 작성해 홈페이지(
www.usimin.net)에 올려졌다.
유 의원은 이 편지글을 통해 "신문 방송을 보면 잡아먹을 것처럼 싸우는 의원들이 본회의장이나 휴게실에서 마주치면 웃는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나눈다"며 '속과 겉'이 다른 국회의원의 이중적 태도를 비꼬았다.
유 의원은 또 국회의원의 습관적인 '무더기 집단 지각'을 행태를 "본회의장 시계는 보통 30분 늦게 간다"는 말에 빗대면서 미리 입장해 기다리고 있는 "총리와 국무위원들이 허비하는 30분을 돈으로 따지면 만만치 않을 것"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유 의원은 국회의원과 국무위원 간의 호칭, 인사관례, 회의장내 시설물의 차이, 질의·답변 태도 등을 일일이 비교한 뒤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은 국회의원들이 '홈그라운드'에 장관들을 불러들여 일방적으로 혼내는 곳"이라며 국회 권위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끝으로 그는 가을 정기국회에서 대정부질의를 신청할 것이라고 소개하면서 "총리와 장관들에게 저를 '의원님'이 아니라 '유시민 의원'으로 불러달라고 청해서 그렇게들 하시면 저도 '님'자를 붙이지 않겠지만 저를 '의원님'이라고 하면 저도 '장관님'이라 할 생각"이라며 국회 권위주의 '청산'에 나서겠다고 약속하기도 했다.
다음은 유시민 의원의 편지글 전문이다.
국회는 참 재미있는 곳입니다. 일 자체가 재미있다기보다는 사람과 분위기가 그렇습니다. 신문 방송을 보면 잡아먹을 것처럼 싸우는 의원들이 본회의장이나 휴게실에서 마주치면 웃는 얼굴로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때로 이해관계가 충돌하긴 하지만 '동업자'들끼리 나누는 최소한의 공감대는 있는 모양입니다.
본회의장 제 자리는 제일 '나쁜 곳'입니다. 의장석에서 내려다볼 때 왼쪽은 민주당 의석이고 가운데부터 오른쪽까지가 거대 한나라당 의석입니다. 비교섭단체는 맨 오른쪽 가장자리이고 제 자리는 맨 끝 앞에서 두 번째입니다. 바로 앞자리는 발언자 대기석이고 통로 바로 건너편이 국무위원 자리입니다. 제 자리가 '나쁜' 이유는 눈에 잘 띄기 때문입니다. 카메라가 답변하는 총리와 장관들을 잡으면 어깨 너머로 함께 잡히는 자리입니다. 결석을 하면 자리가 비어서 노출되고 자리에 있을 때는 졸면 안됩니다. 그렇긴 해도 총리와 장관들을 근거리에서 볼 수 있고 국회의장이나 발언자들의 행동을 자세히 볼 수 있다는 장점은 있습니다.
국회는 이번 주 내내 본회의를 열어 대정부 질문을 했습니다. 그런데 며칠 꼼꼼하게 살펴보니 이상한 점이 하나둘이 아닙니다. 몇 가지만 소개해 드릴까요?
첫째, 본회의장 시계는 보통 30분 늦게 갑니다. 10시 회의는 10시 반, 오후 2시 회의는 2시 반 정도 되어야 시작됩니다. 의원들이 늦게 와 의사정족수가 차지 않기 때문입니다. 총리와 장관들은 물론 제 시간에 정확하게 입장해서 기다립니다. 본회의 입장을 독촉하는 안내방송이 10여 회 나가고 나면 그제야 의원정수의 1/4이 입장하고 그 때에야 회의가 시작됩니다. 총리와 국무위원들이 허비하는 30분을 돈으로 따지면 만만치 않을 것입니다. 저도 언제나 늦게 시작하기 때문에 아예 늦게 간 적이 있습니다. 반성하고 앞으로는 예정시간에 정확하게 입장하도록 하겠습니다.
둘째, 본회의장 인사는 일방통행입니다. 답변하러 나오는 국무위원들은 의장을 향해 한번, 질문하는 의원을 향해 또 한번 허리를 굽힙니다. 하루 대정부 질문을 받는 동안 총리는 수십 번 허리를 굽힙니다. 그런데 의장의 답례는 뒷머리가 의자 등받이에서 5cm 정도 떨어졌다 원위치로 가는 정도가 고작입니다. 불러낸 국회의원들이 고개를 숙여 답례하는 경우는 거의 보지 못했습니다.
셋째, 경칭 역시 일방적입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국회의원들은 총리나 장관 직함 뒤에 '님'을 붙이지 않습니다. "총리 답변하십시오", "장관 해명하십시오", 뭐 그런 식입니다. 그런데 답변하는 장관과 총리는 대부분 아무개 의원'님'이라고 합니다. 강금실 장관이 김문수 의원에게 '김의원께서' 라고 한 것이 제가 목격한 유일한 예외입니다.
넷째, 발언대가 다릅니다. 국회의원 발언대는 버튼만 누르면 자동으로 높낮이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의원들은 자기 키에 맞게 발언대 높이를 조절합니다. 그런데 국무위원 발언대는 고정되어 있습니다. 키가 큰 고건 총리와 남자 국무위원들은 마이크 높이만 조절하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그런데 키가 작은 강금실 법무장관, 특히 키가 작은 지은희 여성부 장관이 발언대에 서면 얼굴이 보이지 않습니다. 질문하는 의원은 지은희 장관의 이마만 보고 질문하고 국회 텔레비전 중계 화면에도 장관의 얼굴이 잘 잡히지 않습니다.
다섯째, 국회의원과 국무위원은 자세도 다릅니다. 의원들은 팔을 발언대 위에 올려놓고 체중을 앞으로 싣기도 하고 한쪽 다리를 꺾어 교차시킨 다음 구두 끝을 땅에 댄 상태로 발언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국무위원은 언제나 꼿꼿이 서서 답변합니다. 자세가 비딱하면 당장 욕을 먹기 때문이겠죠.
여섯째, 국회의원은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언성을 높이거나, 심지어는 고함을 쳐도 됩니다. 그러나 답변하는 국무위원은 절대 그렇게 하지 않고 언제나 공손한 어조로만 답변합니다.
일곱째, 대정부 질문과 답변을 듣는 국회의원들은 답변이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똑바로 해" 등등 고함을 지르고 질문이 마음에 들면 끝난 후에 "최고 잘 했어" 등등의 말을 큰 소리로 합니다. 하지만 다른 장관의 발언을 듣는 국무위원들은 아무리 모욕적인 발언을 들어도 절대 그렇게 하지 않으며 다른 장관의 답변을 칭찬하는 말도 하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풍경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좀 이상야릇하다고 생각합니다. 장관과 국회의원들이 국정문제에 대해서 대등한 위치에서 치열한 논리대결을 펼치는 것이 정상적인 국회 풍경이라고 봅니다. 그런데 본회의장의 시설도 그렇고 국무위원과 의원들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도 그렇고, 우리 국회 본회의 대정부 질문은 국회의원들이 '홈그라운드'에 장관들을 불러들여 일방적으로 혼내는 곳입니다. 분위기, 전통, 그 모든 것이 몹시도 권위주의적입니다.
가을 정기국회 본회의가 열리면 저도 사회복지정책에 대한 대정부 질문을 할 생각입니다. 비교섭단체라 허락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박관용 국회의장님께 잘 부탁드려서 한 번 해 보겠습니다. 총리와 장관들에게 저를 '의원님'이 아니라 '유시민 의원'으로 불러달라고 청해서 그렇게들 하시면 저도 '님'자를 붙이지 않겠지만 저를 '의원님'이라고 하면 저도 '장관님'이라 할 생각입니다. 다만 정책에 관한 비판만은 분명하게 하겠습니다.
오늘은 대한민국 국회 본회의장에서 제가 느낀 소감을 말씀드렸습니다. 앞으로도 종종 본회의나 상임위원회 풍경에 대해 미주알고주알 보고를 드릴까 합니다. 건강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