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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23일 열린 유림들의 호주제 폐지 반대 집회.
지난 5월 23일 열린 유림들의 호주제 폐지 반대 집회. ⓒ 오마이뉴스 남소연
어느 날 퇴계 이황이 지방을 여행하던 중 하룻밤 유숙할 곳이 필요해 한 양반가에 머물게 되었는데 저녁상에 자신이 너무나 좋아하는 청국장이 가득 담겨 나와 깜짝 놀라 알아보니 그 집에는 자신이 재가시킨 며느리가 살고 있더라는 얘기가 있다.

이황에겐 20세에 청상과부가 된 둘째 며느리가 있었는데 그는 과부개가금지법에도 불구하고 며느리를 조용히 개가시켜 주었다. 엄격한 유교윤리를 강조한 이황이지만 도는 어디까지나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지 않았던 것이다.


전통윤리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는 유림들은 이런 유학자 이황에 대해 대체 뭐라고 얘기할까? 호주제 폐지가 거론될 때마다 유림들은 "호주제도는 상고시태부터 전해오는 불문율의 제도"라며 호주제 사수에 결사항전의 태도로 임해왔다. "호주를 지키는 것은 국가의 원수를 지키는 것과도 같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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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은 스스로를 "1천만 유림"이라고 말한다. 소위 제사를 지내는 사람들을 모두 포함한 얘기인데 여기에 선뜻 동의할 사람은 드물다. 서울 명륜동 소재의 성균관과 전국 234개의 향교, 289개의 유도회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유림이라고 보는 게 정확하다.

성균관은 고려 말기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유학을 전수하던 최고학부였지만 지금은 그 성격이 완전히 다르다. 법적으로 성균관(재단법인)은 종교단체로 분류돼 문화관광부가 관할하고 있고 성균관대학은 성균관의 부설기관이 더 이상 아니다.

성균관에는 <청금록(靑衿錄)>이란 책이 있다. '청금'은 '푸른 옷소매'란 뜻으로 유생들을 지칭한 용어이며, 청금록에는 과거 조선시대 유생, 선비들의 명단이 기록돼 있다. 그 전통을 살려 현재 성균관에서도 청금록을 작성하고 있는데 오늘날 유림들의 명단이 거기에 올라 있다고 보면 맞다.

청금록에 따르면, 우리나라 유림의 연령층은 대개 60∼80대로 대부분 퇴직자들이다. 직업은 대개 교사, 군인, 경찰, 공무원이 많았고 주목할 만한 것은 공헌에 관한 기록사항이었다. 새마을운동 지도자, 바르게살기 정화위원, 반공연맹 위원장, 자유총연맹 지부장 등으로 관변단체 출신들이 많았다.

공무원·관변단체 출신 퇴직자들이 유림 구성

조선시대, 여성호주 많았다

정지영(서강대 인문과학연구소)씨는 자신의 박사논문 <조선후기 여성호주 연구>에서 "유림이 말하는 전통은 과연 누구의 전통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잇다. 17, 18세기 경상도 단성지방의 호적대장을 연구한 정씨는 주자학이 완전히 정착한 조선후기에도 여성호주가 상당수 존재했음을 밝혀냈다.

"당시 호주는 한 집에 '같이 살던' 사람들의 문서상의 대표일 뿐이었다. 그래서 여성호주도 가능했고 외가의 조부 이름이나 노비 등의 이름도 함께 기록되었다. 지금처럼 가부장의 권한과 지배를 인정한 호주제와는 달랐다."

그리고 18세기 들어 여성호주의 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이는 양반사회의 변화일 뿐, 양인과 천인의 여성호주는 큰 변화가 없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남편이 죽으면 친가로 돌아가 재혼을 준비하고 전 남편의 아이를 데리고 살아 조선시대 여성들은 지금보다 양육권이 더 보장되었다는 사실이다. / 박형숙 기자
해방 이후 유림의 역사를 보면 과연 이들이 '전통의 수호자'라 말할 자격이 되는지 의심스러운 대목이 많다. 성균관의 기관지 <유림월보>(이후 유림회보, 유림신보, 유교신문으로 제호 바뀜)에 그 역사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1969년 4월 30일자 창간호에는 이승만과 박정희 시절 두루 요직을 지냈던 윤치영의 "정신계몽 근대화에 기여를"이란 제목의 창간축사가 실렸고, 7월 25일자 1면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3선 개헌을 정당화하는 성명서 전문이 실렸다.

1974년 3월 25자에는 "북괴의 만행, 불타는 정의감과 군비확충만이 전쟁예방"이라는 제하의 기사를 통해 중앙정보부가 조작, 발표한 간첩단 사건을 "김일성 도당의 지령"이라며 정부의 발표를 그대로 받아썼다.

이에 반해 1979년 6월 25일자에는 미국 카터 대통령의 방한에 대한 환영기사를 실으면서 "우방 미국에 예의를 다해 영접하자"는 내용을 담았다. 그해 말 1979년 12월 25일자에서는 12·12사태로 등장한 최규한 대통령에 대해 "국난을 타개할 위기관리 정부의 출발"이라며 군사 쿠테타를 옹호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듬해 1980년 8월 27일자에선 전두환 대통령을 "8백만 유림의 이름으로 옹립한다"고 썼다. "온 국민의 전폭적인 지지하에 제 11대 대통령에 전두환 장군 당선"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우리는 더욱 충효사상을 발휘하고 국민정신 순화에 기여하며 위정자에 올바른 시책에 협조하여서 국운발전에 전력을 하여야 된다는 사명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유림은 그 합법성을 떠나 정권에 충성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이는 민주화 운동이 한창이던 1986, 1987년에는 또 다른 양상으로 드러났다. 유림이 외친 구호는 '군부독재 타도'나 '직선제 쟁취'가 아니었다.

1986년 12월 25일자 <유림회보> 1면에는 국회의사당 앞에서 열린 유림들의 '가족법 절대고수 범국민 궐기대회' 기사가 크게 실렸다. 민주화에 대한 열망 대신 "호주제를 폐지한다면 일가의 번영과 질서를 도모하는 통솔자가 없게 되는 것이니 한 집안이 불안하면 한 나라가 위태롭게 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사실"이라며 그 결의문을 "전두환 대통령 각하에게 상신한다"고 밝히고 있다.

1987년 6월 항쟁 즈음 유림들이 벌인 궐기대회는 뜻밖에도 '국교생 한자교육 부활'이었다. 1987년 7월 1일자 <유교신보>는 "현행 교육이 한자사용의 역사성을 간과하고 있다"며 한자교육의 복원을 주장하는 유림들의 집회를 1면에서 다뤘다.

성균관의 기관지 <유림월보>에는 유림의 친일, 반공 이력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성균관의 기관지 <유림월보>에는 유림의 친일, 반공 이력이 낱낱이 드러나 있다.
"역사의 격동기 때 성균관이 한 게 뭔가"

유림의 이 같은 행적에 대해 "가족법 개정반대 시위를 제외하고는 평소 사회를 위해 한 일이 없다"는 지적이나 "역사의 격동기 때 성균관에 플래카드 한 번 내걸지 않은 건 정말 부끄러운 일"이라는 비판에 대해 유림계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성균관의 유교윤리구현회 장한수(70) 공동대표는 "현실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은 반성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외부의 비판은 더욱 가혹하다. 유학자 서정기(동양문화연구소) 선생은 "지금 유림계는 일본 황도유학의 후신들이 장악하고 있다"며 "수신만 강조할 뿐 치국평천하에는 관심이 없다"고 지적했다.

"진짜 유림들은 항일운동했던 사람들이다. 일본이 우리의 유교를 두려워하는 것은 국가와 운명을 함께 하는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본의 천황에 헌신하는 황도유학을 공부한 유학생들이 조선유도연합회를 결성하고 그를 중심으로 대동아공영권을 주창하고 유림세력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유교의 수신만을 강조했다."

1910년 일제에 의해 폐쇄된 성균관 후신으로 세워진 경학원에서는 도덕, 역사, 정치학은 가르치지 않았다. 개안(開眼)을 막기 위해 일본법만 가르쳤다. 그런 경학원 출신들이 현재 유림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것이 서정기 선생의 설명이다.

해방 이후 유림만큼 큰 정치조직도 없었다. 1945년 김구 선생이 귀국하자마자 유도회 총본부장으로 추대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같은 항일세력이 유도회를 장악한 것은 잠시, 초대 성균관 관장과 유도회 회장을 지낸 심산 김창숙은 친일파에 의해 밀려나고 이승만이 총수로 이기붕이 최고고문으로 성균관을 장악하게 된다.

이후 성균관은 3·15 부정선거 당시 유도회 정부통령 선거 추진위원회를 도시군읍면까지 조직하며 이승만의 재집권을 도모했다. 이에 저항하는 심산 선생은 이승만의 성균관 문묘 참배를 막으려다가 갈비뼈가 부러지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선 <유도회·성균관 수난 약사>에 잘 나타나 있다.

"유교의 이름이라면 호주제는 폐지돼야"

성균관대학교 유교문화연구소의 이숙인씨는 "유교의 이름으로라면 호주제는 폐지되어야 한다"며 "유교와 유림은 구분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는 유림이 유교의 근본 사상을 제대로 이어가지 못하고 있다는 지적이라고 할 수 있다.

"유교는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상이다. 끊임없이 현실에 대한 재해석을 해온 학문이다. 그런데 현재 유림은 전혀 현실과 소통을 못하고 있다. 여성계의 호주제 폐지 주장에 대해 공산주의라고 매도하는 상황이다."

유교철학을 전공하는 한 연구자는 "차라리 (유림을) 무시하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한다.

"유림이 텔레비전에 나와서 토론하는 걸 보면 창피할 지경이다. 호주제가 이혼녀에게 불리하다는 주장에 대해 '교통사고 당한 사람이 불쌍하다고 전 국민을 병신 만들어 똑같이 평등하게 하자는 주장과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과 어떻게 토론이 되겠는가."

꼿꼿한 유학자였으면서도 인간에 바탕을 두고 유학을 해석하고 행동으로 옮겼던 퇴계 이황. 바로 그 퇴계의 위패는 현재 성균관 대성전에 모셔져 후학들의 추앙을 받고 있다. 유림들은 해마다 두 번씩 성균관에서 석전대제를 지내고 있는데 퇴계가 요즘 후학들의 처사를 보고 대체 뭐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여성주의가 유림을 이겼다"
'아방궁프로젝트'의 입김, 전주이씨종친회 상대 승소

▲ 여성미술가 그룹 '입김' 회원들.
ⓒ우먼타임스

2000년 9월 29일 벌건 대낮, 서울 종묘에서 있었던 '테러'를 기억하십니까?

여성미술가 그룹 '입김'이 "가부장적 유교문화의 상징인 종묘와 여성성의 상징인 자궁으로 재해석된 공원을 대비시킨다"는 기획의도로 준비한 '아방궁(아름답고 방자한 자궁)' 프로젝트가 전주이씨대동종약원과 전통가족수호범국민연합 등의 유림측 방해로 무산된 사건이었다.

문화관광부에 아이템이 당선돼 지원도 받고 정식 절차도 밟아 기획된 공연이었지만 "여자의 치마를 휘날리게 하는 불경스러운 짓거리"라고 막무가내로 설치된 미술품을 부수고, 욕설을 퍼붓는 유림들의 '습격'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이에 '입김' 회원들은 표현의 자유 침해, 성적인 폭언, 명예훼손, 작품훼손, 행사무산 등에 대한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했고, 그로부터 3년 뒤인 지난 6월 3일 "전주이씨대동종약원 등은 입김 회원 각 1인당 1백만원씩과 손해배상 지연손해금을 지급하라”는 재판부의 판결을 받아냈다.

2심에서는 당시 상황을 담은 사건현장비디오가 증거물로 채택돼 증거불충분으로 패소했던 1심의 판결을 뒤집을 수 있었다. 재판 내내 유림측은 "우리 그 자리에 없었다" "모른다"고 책임회피를 했지만 결국 비디오를 통해 조직적으로 회원들을 동원했음이 드러난 것이다.

3년 동안의 긴 여정 끝에 여성주의가 유림을 상대로 얻어낸 첫 쾌거였다. / 박형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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