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의 논리에 충실히 따를 것을 강요하는 사회에서 상상에 관한 얘기를 담은 책, 그것도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상상을 담은 책을 만들겠다는 출판사의 욕심 자체가 하나의 상상이다.
독특한 개성을 가진 '휴머니스트'라는 출판사가 아니었다면 이 책은 기획에서부터 빛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출판사의 상상과 작가들의 상상이 함께 만든 상상에 관한 텍스트가 바로 <상상: 상상을 초월하는 33인의 유쾌한 발상>이다.
그런데 제목에서부터 뭔가 어색함이 느껴진다. 부제로 붙인
'상상을 초월하는'이라는 말의 의미는 뭘까? 상상 그 자체가 초월인데, 그것을 또 초월한다? 도대체 어떤 내용이 담겨 있길래 이런 부제를 붙였을까? 공연한 시비걸기로 느껴질지 모르지만 바로 이 '상상을 초월하는 상상'이 이 책의 한계이다. 그 얘긴 조금 있다 하자.
제목에서 느낀 또 다른 생각. 이 33인은 어떻게 추려졌을까? 황경신 씨의 글 <은밀한 프로젝트>에서처럼 상상력에 등급을 매기고 그 지수를 측정해서 추린 것일까? 아니면 각 개인의 생각과 활동을 무시하고 이름있는 사람들을 적절히 배합한 걸까? 책 뒤의 기획일지를 보면 필자를 찾는데 많은 노력을 들였다 하지만 그 기준을 도저히 알 수 없다. 그렇기에 33인의 글을 순서 매긴 원칙도 알 수 없다.
제목에 대한 마지막 딴지. 유쾌한 발상이라 했다. 33인의 저자가 틀에 메이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맘껏 쏟아냈으니 그 사람들은 유쾌할지 모르겠다.
철학자 김용석씨는 책의 서문에서
"상상의 힘은 현실의 땅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겸허의 힘이다. 겸허의 힘은 우주의 정기로 승화한다. 상상은 천상의 누각을 짓는 일이 아니라, 판자촌을 천상의 누각으로 바꾸는 일이다. 달 위에 동네를 짓는 일이 아니라, 달동네를 달같이 아름다운 동네로 바꾸는 일이다.
…이 세상 희로애락의 진실을 그 고귀한 주름 속에 담고 있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하며, 장애의 불리함을 능력으로 전환하려는 의지로 사는 사람들과 함께 한다. 사창가에 버려진 이팔청춘의 고통과 함께 하며, 서울역 대합실 노숙자들의 슬픈 꿈과 함께 한다. 결식이라는 참담한 현실 속에서 생존의 고통을 너무 빨리 체화한, 그래서 꿈조차 잃어버린 이 나라 모든 청소년들과 함께 한다. 꿈을 잃었지만 꿈을 꾸고 싶어하고 꿈을 향한 길을 찾기 바라는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한다"라고 얘기한다.
이 무슨 소리인가? 달동네를 아무리 아름답게 치장하더라도 그곳은 결코 아름다운 동네로 바뀔 수 없다. 판자촌은 천상의 누각이 되지 못한다. 차디찬 시멘트 바닥의 노숙자는 시린 등 탓에 꿈조차 잘 꾸지 못하고, 사창가에 버려진 이팔청춘은 고통이 아니라 끔찍한 절망 속에 산다. 결식의 배고픔이 상상의 자유로움에 앞선다.
이 비참한 현실을 바꿀 힘은 함께 함에서 나오지만 그 함께 함의 바탕은
겸허가 아니라 치열함이다. 도대체 무슨 얘긴가? 겸허함이라니. 그리고 그런 함께 함을 위해 33인의 저자들은 현실에서 어떤 실천을 하고 있는가?(그런 실천의 힘을 느낄 수 있는 글은 몇 개 되지 않는다.)
이들의 상상을 듣고 있으니
'상상에도 계급이 있구나', '유쾌함에도 격차가 있구나'라는 생각이 자꾸 머리를 어지럽힌다. 나의 상상을 방해한다.
이런 어지러움은 다른 사람들의 글에서도 느껴진다. 예를 들어 기획자 김진애씨는 '시민투자 포장마차 주식회사', 줄여서 '시민포차'를 만들자고 상상한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주)시민포차의 요점은 이렇다. 1. 이 회사는 시민들이 주주다. 2. 회사는 지방자치단체로부터 거리, 광장, 공원의 사용권을 얻는다. 물론 어디에, 몇 개가, 어떤 종류로, 어떤 시간대에, 어떤 안전규칙을 지키겠다는 이용계획을 세우고 지킨다. 3. 회사는 노점상 회원을 모집하고 회원약정을 맺는다. 공평하게 할 것으로 믿는다. 4. 합당한 이용료를 낸다. 회사와 지방자치단체 간, 회사와 회원 간에 적용한다. 매출에 따라 이용료에 차등을 두는 문제는 알아서 잘 해보자. 서로 좋자고 하는 일이니까. 5. 회사는 멋진 디자인을 개발한다. 포장마차도, 유니폼도, 깃발도, 모여 있는 모습도. 6. 회사는 멋진 서비스도 개발한다. 영수증 서비스도, 안전한 전기취사 서비스도. 7. 회사는 도시마다, 구청마다, 특정 지구마다 하나씩 만들어도 좋겠다. 적절한 운영 규모가 필요할 테니까. 8. 1년에 한번씩 시민 주주들이 회사 주인으로서 이용 시민들의 평가를 받는 축제를 신나게 한다"(252쪽).
"노점상인을 건강한 경제인으로 만든다는 것 또한 중요한 효과다. 우리나라 경제 성장을 볼 때 노점상들을 영원히 '비공식 이코노미'로만 둘 수는 없다. 재미없게 말하면 '양성화, 제도권화'지만,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건강한 경제인 키우기'다. 눈치보는 장사가 아니라 떳떳하게 장사하는 사람들을 만들면 불온한 돈도 없어질 게다. 아무래도 나라의 경제 인프라를 만드는 가장 중요한 프로젝트 중 하나겠다"(253쪽).
이걸 할까, 저걸 할까 고민할만큼 경제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포장마차를 하지 않는다. 노점단속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서 쇠사슬을 감고 저항하는 사람들이 포장마차와 노점상을 한다. 이런 현실을 손대지 않고 시민주주들이 대는 돈으로 주식회사를 만들겠다니 아주 좋은 얘기이지만 별로 현실성이 없다.
그리고 정말 어려운 문제인 주주 모집에서 노점상 회원 모집, 이용료를 알아서 하라니 뭐부터 손을 대야 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나는 영수증에 유니폼, 깃발까지 갖춘 깔끔한 포장마차에서 술 마시고 싶지 않다(그럴 생각이면 다른 술집을 찾겠다).
차라리 나는 어느 지역 노점상연합회라 적힌 조끼를 걸친 주인이 하는 허름한 포장마차에서 다소 불편하고 비위생적인 서비스를 받으며 술을 마시겠다.
개그맨 전유성씨는 더 끔찍한 상상을 한다.
"예전의 사이렌 소리가 통행 금지를 의미했다면, 이제는 그 시절 고생을 했던 우리 부모님 세대의 가정을 위한 애틋한 열정을 되새기며, 현재 우리 가정의 소중함을 되돌아보는 날로 지정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사이렌의 부활을 꿈꿔 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262쪽).
아버지가 정한 통금을 지키기 위해 여자친구 손을 잡고 뛰어야 한다는 박카스 광고를 보면서 숨이 막혔는데, 아예 국가 차원에서 통행 금지를 부활시키자니. 가정의 소중함을 되새기자는 그 좋은 생각을 통행금지 사이렌의 부활이라는 나쁜 방식으로 실천하려하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
사실 이런 생각들에는 소설가 듀나씨의 생각이 바탕에 깔려 있는 것 같다.
"나는 쇼핑몰 유토피아의 이미지만 받아들일 뿐, 그 세계가 어떤 메커니즘에 의해 유지될지에 대해서는 신경쓰고 싶지 않다. 적당히 정의롭고 유연한 사회이면 충분하다. 쇼핑몰 유토피아는 쉽게 망가질 만큼 깨끗하지 않다"(169쪽).
메커니즘을 고민하고 그것을 바꾸려 노력하는 건 분명 피곤하고 힘든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누구도 그 부담을 떠맡으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사회 내에 어떤 매커니즘이 들어서는가에 따라 이 세계의
'적당함'은 바뀐다. '무관심'이 적당하지 않은 사회를 만들고 쉽게 망가질 만큼 깨끗하지 않은 사회가 아니라 부패와 야합으로 더럽혀진 사회를 만든다.
"능동적으로 삶을 형성하고 현실을 규정하는 것이 인간의 자유의 필수적 조건이라면, 인간의 자유는 다른 무엇보다 상상력의 힘에 의존하는 것"(김상봉,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 한길사, 2003, 80쪽)이고
"상상력은 눈에 보이는 것으로부터 보이지 않는 것을 그려 보일 수 있는 힘"(80∼81쪽)이다. 능동적이고 현실을 규정하고 넘어서려는 것이기에 상상은 현실과 무관한
'공상'이 아니어야 한다.
남의 상상에 돌을 던져 분위기를 깨려는 속셈은 없다. 다만 그들의
'현실을 벗어난 넉넉함'이 부러울 따름이다. 그리 넉넉하지 않은 나의 현실이 글을 읽는 내 속을 뒤집어 놓은 것일 뿐이다. 그래도 나는 상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