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상 좁다고만 생각했던 이 땅에 이렇게 드넓은 평야가 있다는 사실이 조금은 생소하다. 이곳이 제주 서쪽의 끝머리인가? 고산리 넓은들 끝, 해안가에 솟아있는 봉우리에 접어들면서부터 있는 힘을 다해 액셀을 밟았다.
입구에 망부석처럼 딱 버티고 서 있는 '영산 수월봉'이라 새겨진 돌 표지판이 마치 이곳을 지키는 수호신처럼 느껴진다. 예로부터 수월봉을 일컬어 '녹고물 오름', '물나리 오름' 이라 하는데는 그 이유가 있다.
봉우리 끝까지 차가 들어갈 수 있어서 참 다행이다. 그 봉우리 끝에 올라서니 하얀 정자에는 먼저 온 사람들이 수월이와 녹고의 전설을 나누고 있었다.
제일먼저 나를 반겨 주는 건 계절을 잊은 코스모스였다. 수월봉에 대한 호기심을 뒤로하고 먼저 코스모스가 활짝 핀 길옆에 차를 세우고 한참동안 가을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낮게 자리잡은 봉우리. 이 봉우리 정상에서 눈에 띄는 것은 '수월봉의 영산비'였다.
이곳에서 보는 '수월봉 영산비'는 뭔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눈앞에 펼쳐지는 제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차귀도'도 오늘은 그리 아름답게 만은 보이지 않는다. 왜 수월이가 낭떠리지에서 떨어지는 모습을 보고도 수호천사가 되어 지켜 주지 못했는지 그저 원망스러울 뿐. 방금 전에 보았던 바다는 분명 쪽빛이었는데, 수월봉에서 보는 바다는 그리움과 한을 겹겹이 간직하고 있는 듯 하다.
책에서 보았던 수월이와 녹고 슬픈 전설이 떠오른다. 두 남매인 수월이와 녹고가 홀어머니를 봉양하며 의좋게 살았다. 수월이와 녹고는 병든 어머니를 위해 약초를 캐러 왔다가 동생 수월이가 절벽 아래로 떨어져 죽자, 오빠인 녹고가 17일 동안 슬피 울었는데, 그 눈물이 절벽 곳곳에 솟아나 샘물이 됐다는 전설이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전설이 과연 어떤 의미를 말하는지 보다, 단지 전설과 어우러진 해안단애가 그저 장관을 이룬다는 사실이 어쩌면 더 관심사인지도 모르겠다.
전설에 따르면, 지나가던 어느 스님이 남매에게 100가지 약초를 구해어머니를 구하라는 처방을 내렸다고 한다. 근데 100가지 중 99가지 약효는 쉽게 구했는데 단 한가지 오갈피라는 약초가 이 낭떠러지 절벽에 있었던 것이다. 홀어머니의 약초를 구하기 위해 수월이가 이 절벽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오갈피를 뜯으러 하다가 낭떠러지에서 떨어졌다는 전설은, 요즘 카드 빚으로 인륜을 저버리고 부모 형제를 버리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세상과는 너무 먼 나라의 동화와 전설임에 틀림이 없다.
수월정에 앉아 있으니 하늘과 맞닿은 바다, 끝없이 펼쳐진 들판, 희뿌연 구름에 가려져 있는 한라산의 모습이 더욱 신비스럽게 보인다.
특히 기우제를 지내는 곳으로 유명한 수월정에 올라서면 차귀도는 물론 고산봉 당산봉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다. 한편 '수월 노을축제'는 차귀도 주변이 벌겋게 타올라 '전국 9대 노을'의 명소로 꼽힌다.
6각정인 수월정 밑으로 얼굴을 내밀면 보기만 해도 아슬아슬한 절벽, 낭떠러지가 버티고 서 있어 현기증을 일으킨다. 이 낭떠러지에서 한 손으로 오갈피를 구하다 절벽으로 떨어졌다는 수월이 생각을 하니 잠시 숙연해 지는 느낌이다.
수월봉 주변의 관광지로는 차귀도의 풍경은 물론 송악산과 산방산, 용머리, 조각공원을 돌아볼 수 있다.
제주공항-12번 국도-애월-한림-협제-고산에서 해안쪽으로 접어들면 한경면 고산리 해안에 바다로 돌출한 해발 77m의 수월봉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