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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 하는 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간혹 혼자 여행을 할 때는 이상한 고독감과 슬픔에 시달리곤 한다. 홀로 하는 여행의 '우수' 같은 것을 즐길 법도 한데, 왠지 나는 그것이 싫다. 한마디로 고독을 즐길 줄 모르는 것이다.

총각 시절에는 물론 그렇지 않았다. 나이 마흔에 가까스로 총각을 면하기 전까지는 객지 유랑 생활을 제법 많이 했다. 그때는 철저히 고독했지만, 거의 관성적으로 고독의 우수를 누릴 줄도 즐길 줄도 알았다.

그런데 장년 시절에 결혼을 하여 가정을 갖게 된 뒤부터는, 행여 홀로 먼길 나들이라도 하게 되면 정말이지 이상한 쓸쓸함과 슬픔을 겪게 되었다. 내 아이들의 달콤한 몸 냄새가 그렇게 그리울 수 없었다. 아이들의 이부자리 안에 고여 있는 따스한 냄새가 그리워서 여관방 신세를 지지 않으려고 애쓰고 무리를 해서라도 밤을 달려 내 둥지로 되돌아오곤 한 일도 많았다.

나이가 늘어가면서 혼자 하는 여행은 거의 없고 (잡지사 같은 데서 취재 여행을 부탁해 오는 일도 없고) 이제는 단체 여행을 주로 하게 된다. 가령 <한국소설가협회> 같은 데서 대개 1박 2일 일정의 지방 세미나 행사를 알려오면 시골에서 사는 불리함을 무릅쓰고 일년에 한번 정도는 참여하곤 하는데, 그때마다 여행 중에 가족 생각을 많이 하곤 한다.

여행지가 마음에 들고 볼거리가 많을 경우에는 가족에 함께 이곳에 다시 한번 오고 싶다는, 언제 꼭 한번 기회를 잡아 이곳으로 가족여행을 해야겠다는 생각도 하곤 한다.

그러나 먼길 '가족 나들이'는 쉽게 실행을 할 수 없었다. 그 대신 가까운 명소나 풍광 좋은 곳을 찾아 일요일 오후 한 나절이나 하루를 즐기는 가족 나들이는 많이 해왔다. 뒷 동에 사는 동생 가족과 함께 어머니를 모시고 하는 가족 나들이는 내가 승용차가 아닌 12인승 승합차를 가지고 있어서 더욱 가능했고, 두 형제의 아홉 가족이 한 차에 타고 이동하는 것에서부터 기쁨과 즐거움이 넘치곤 했다.

내가 가족 나들이 행사에 부쩍 신경을 쓰게 된 것은 올해 팔순이신 내 노모께서 2001년 가을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후부터다. 전3기 단계에서 수술을 하시고 수술 이후에 두 번 정밀 검진을 받고 있는 어머니는 비교적 건강하신 편이다.

2년 전에 대장암 수술을 받으신 몸으로도, 그리고 팔순 연세에도 10분 거리인 저자를 걸어서 다니시고, 성당 평일미사 참례도 거의 거르지 않으시고, 손수 김치를 담그셔서 대전 막내아들네도 보내시고 수녀원에도 나눠주시고 하니, 나는 속으로 은근히 걱정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그런 부지런함과 몸 아끼지 않으시는 노고에 탄복을 하곤 한다.

어머니의 그런 모습을 보노라면 그게 당신의 복인지, 자식들 복인지 아리송한 가운데에서도, 어떻든 간에 어머니의 세월이 많이 남지 않았음을 은연중에 느끼기도 한다. 그런 느낌에 젖다보면 지레 슬퍼져서 괜히 눈물을 짓기도 하는데, 그런 심정이 나로 하여금 가족 나들이에 더욱 열중케 한 것이 거의 분명한 것 같다.

그동안 가족 나들이를 참 많이 했다. 열 개도 넘는 용접 면허증을 소지하고서도 비정규직으로 일하는 동생이 번갈아 쉬는 일요일에는 오전 미사 후에 가족 나들이를 한 날이 많았다.

내 사는 고장 태안이 반도(半島)인 데다가 국립해상공원 지역이니 곳곳에 숨어 있는 작고 아늑한 포구도 많고, 오르기가 별로 어렵지 않는 명산들도 주변에는 많다. 그림 같은 작고 아늑한 포구의 바위 위에서 저녁을 맛있게 먹고 나서 찬란한 노을빛을 만들어내며 호수 같은 바다 건너 산과 산 사이로 잠겨 들어가는 해를 보면서 아이들까지 감탄을 한 날들도 있었다.

그러다가 내 딸아이가 천안으로 고교 진학을 한 올해는 가족 나들이가 뜸해졌다. 가족 한 사람이 빠진 가족 나들이가 다소 허전함을 안겨 주는 데다가 내가 종종 천안행을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 변화에서 좋은 시절이 벌써 다 지나는가 싶은 이상한 절박함 같은 것도 느끼며 봄이 다 가도록 가족 나들이 한번 제대로 실행하지 못한 나는 최근 먼길 가족 나들이를 계획했다. 지난 5월초 충북 청원의 '초정약수터'에서 있었던 <한국소설가협회>의 '세종대왕과 한글' 세미나 행사 참가가 그 계기였다.

그때 나는 오십 평생에 '초정약수'라는 것을 처음 접해보았다. 호텔 목욕탕에서 저녁과 아침에 두 번 목욕을 하면서 배가 부르도록 약수를 마셨다. 덕산온천을 가까이 두고 풍광 좋고 기후 좋고 토질 좋은 태안반도에서 사는 내가 복터진 팔자인 줄 알았더니, 충북 청원 사람들이야말로 복 받은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고 한없이 부러울 정도였다. 그런 기분을 느끼다가 나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내 가족을 생각했다.

가까운 시일 안에 어머니를 모시고 동생 가족까지 모두 이끌고 이곳에 와서 난생 처음 초정약수 맛을 보게 하리라고 굳게 결심했다.

집에 와서 초정약수 얘기를 많이 하니 우선 어머니부터 찬동을 하셨고, 가족 모두 잔뜩 기대를 갖는 눈치였다. 나는 곧 계획을 세웠다. 6월 15일이 가장 적당한 날이었다. 우선 동생이 출근을 하지 않고 쉬는 날이었다.

앞의 일요일은 '성령강림대축일'이고, 다음 일요일은 5월 5일 별세하신 내 장모님의 '49재' 날이고….

드디어 6월 15일 아침 우리 두 형제 가족은 여행길에 나섰다. 먼저 성당에 가서 '삼위일체대축일' 아침미사를 지내고, 가족 모두 아침미사를 지낸 연유를 물으시는 신부님께 자세한 말씀을 드리고, 가족 나들이로서는 처음인 '타도(他道)' 여행길에 올랐다. 운전대를 잡은 나는 정말 흐뭇한 기분이었다.

서해안고속도로 서산휴게소에서 다 함께 우동으로 아침을 먹고, 일단 천안으로 가서 딸아이가 자취하는 원룸에 들러 잠시 쉬었다가 딸아이도 태우고 충북 청원으로 행했다. 그리고 11시가 조금 넘은 시각에 '원탕'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듯한 간판을 건 초장약수탕에 도착했다.

오후 1시에 목욕탕에서 나오기로 시간 약속을 했는데, 남탕에 들어간 가족들과는 달리 여탕에 들어간 가족들은 당연히 지체를 했다. 도저히 약속 시간에 나올 수가 없었노라고 했다. 물이 너무 좋아서 나오기가 싫었다고 하시는 어머니의 말에 나는 절로 흐뭇한 마음이었다. 주름진 노인의 얼굴이 뽀얗고 환하게 변해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건설 현장에서 노상 용접 불을 가지고 일하는 작은 아들의 얼굴을 보며 반색을 했다. 햇볕에 그을린 얼굴이 아주 환해지고 예뻐졌다는 말을 거듭하시며 즐거워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큰아들 덕분에 팔십 평생에 처음으로 초정약수 맛을 보았다며, 물에 관한 말씀을 많이 하셨다.

'큰아들 덕분에'라는 말에서는 흐뭇함을 느꼈지만, '팔십 평생에 처음'이라는 말에서는 죄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순간 불현듯 1999년 2월의 제주도 여행 때의 일이 떠올랐다.

큰 손재수에 빠져 오랫동안 고생을 하느라 어머니께 제주도 구경도 한번 시켜 드리지 못했던, 참으로 무심했던 세월이었다. 5년여동안 1억 4천만 원의 '보증빚'을 거의 갚아가던 그때 나는 엉뚱하게도 재주도 가족 여행을 결심했다. 어머니께서 더 늙으시기 전에 비행기 한번 태워드려야 한다는 생각은 내게 이상한 조급증 마저 안겨 주었다.

그때의 제주도 여행에 동생 가족은 함께 하지 못했다. 동생 가족 대신 이상하고도 험난한 사연으로 부모와 생이별을 하고 사는 중학생과 초등학생인 두 생질아이를 동행시켰다. 보증빚을 다 청산하지 못한 상황에서 지출이 꽤 컸지만, 나는 큰일을 '완수'한 것만 흐뭇한 마음속에서도 어머니께 좀더 죄스러운 심정이지 않을 수 없었다.

초정약수를 실컷 즐긴 우리는 싣고 간 물통과 병에다 약수도 긷고, 근처 음식점에서 오리불고기로 점심을 먹고, 가까운 '운보의 집'으로 가서 관람을 했다. 어머니는 거기에서도 '큰아들 덕분에 팔십 평생에 처음 미술품들을 구경한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어머니는 운보 김기창 화백에 대해 '영감님'이라는 호칭을 썼다.

'운보의 집' 관람을 마친 후 우리는 중부고속도로를 이용하여 청원군 부용면으로 갔다. 청원군의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이동을 한 것이다. 목적지는 '부강성당'이었다.

청원군 부용면의 부강성당은 1957년에 지어진 건물이라고 했다. 메리놀회 소속 아일랜드 신부님이 심혈을 기울여 예술적으로 지은 성당이라는데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가끔 영화나 드라마 촬영 장소로도 이용된다는데 과연 그럴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당의 아름다움을 건물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넓은 정원의 아기자기한 조경은 성당 건물과 참으로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데, 그 속에서 나는 부강성당 신자들의 지속적인 수고 봉사를 감지하는 기분이었다.

우리 가족이 부강성당을 찾은 것은 부강성당 신자로서 '평신도사도직'을 성실히 수행하며 사는 진장희 프란치스코 형제 덕이었다. 인터넷상에서 내 글을 즐겨 있는 '애독자'라는 그는 어느 날 내 홈을 찾아와 방명록에 인사를 남기더니, 다음부터는 대뜸 나를 '형님'이라고 불렀다.

답례로 부강성당 홈페이지를 찾은 나는 그림으로 보는 부강성당의 아름다운 모습에 반했다. 언젠가 한번 가족과 함께 부강성당을 꼭 찾기로 굳게 마음먹었다.

청원 IC까지 마중을 나온 진장희 형제는 물론이고 부강성당 조병환 신부님과 진장희 형제의 형수님이 우리 가족을 환대해 주었다. 조 신부님과 진장희 형제, 그의 형수님의 얼굴을 보면서 사람의 착한 심성이 그대로 나타나 보이는 그 아름다운 얼굴들이 성당의 풍경과 참으로 잘 어울려 보인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근처 고색 창연한 기와집 건물 음식점에서 저녁 대접을 받고 7시쯤 부강성당을 떠나올 때 진장희 형제는 자기 승용차로 내 앞에서 15분 정도를 달려 조치원까지 길 안내와 배웅을 해주었다. 천안으로 가는 길목에서 그와 헤어지면서 나는 너무도 과분한 심정이었다.

진장희 형제와 작별을 하고 천안을 향해 달리는 차안에서 어머니는 또 '큰아들 덕분에 난생 처음 부강성당도 구경하고, 아름다운 성당 안에서 기도도 하고, 융숭한 대접을 받아서 참으로 고맙고 즐겁다'는 말씀을 하셨다.

어머니가 '큰아들 덕분'이라는 말 다음에 '난생 처음'이라는 말을 또 하셨지만, 이번에는 그 말이 내게 묘한 아픔을 주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즐겁고 흐뭇한 마음이었다.

팔순의 어머니께서 오늘 같은 기력을 좀더 유지해 주신다면, 앞으로도 이런 즐겁고 흐뭇한 먼길 가족 나들이 기회를 또 한번 만들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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