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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기쉬가 뿔이 잔뜩 났다. 인도 사람인 그는 영국인들 못지않게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구사하는지라 늘상 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런 그가 어제는 분을 삭이지 못하고 더듬거리며 내게 하소연을 해 왔다.
이야기의 발단은 어제 아침 마케팅시간에서부터 시작된다. 코카콜라회사의 자판기 신사업에 관한 케이스를 놓고 발제와 토론을 벌이는 과정에서 요기쉬는 영국학생들로부터 집중적인 질문공세를 받는다.
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 끝나기가 무섭게 이어지는 파상적인 질문 공세는 외국 학생들에게는 차라리 지옥이라 할 수 있다. 더더욱 황당한 것은 이들의 질문 속에 배어 있는 사카즘(Sarcasm), 즉 영국인 특유의 비꼬고 조롱하는 듯한 말투 때문이다.
어제 요기쉬는 그 사카즘의 덫에 걸려 들고 말았다. 흥분한 요기쉬가 격정적으로 토론에 임하면서부터 이미 논쟁의 승부는 판가름 나 버렸기 때문이다. 감정을 최대한 배제하고 철저히 논리적으로 문제를 풀어 나가는 영국인들과 논쟁함에 있어 흥분과 분노는 곧 그 논쟁에서의 패배를 의미한다.
우리 학급의 영국인들은 토론에 무척 강하다. 상대가 아무리 직설적으로 공격을 해와도 자제력을 잃고 논점에서 벗어나는 법이 없다. 오히려 직설화법의 논리적 허점을 파고 들면서 사카즘을 동원하여 상대의 심리적 균형을 흐트려 놓곤 역공을 취하거나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사실과 시각에서 문제를 재조명하며 분위기를 반전시켜 버리곤 한다.
흥분해서 이미 논점을 잃어 버린 상대가 논쟁 자체를 회피할라 치면 이내 목소리의 톤을 낮추고 다가와 언제 그랬느냐 싶게 상대에게 논점의 전후관계를 타이르듯 설명한다. 이쯤 되면 상대는 회피하기도 패배를 자인하기도 어려운 아주 곤란한 상황에 빠지게 된다.
이러한 영국인들의 토론 지향적인 성격은 어릴적 가정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부모와의 “수평적 대화방식”이 바로 그 출발점이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저녁식사의 식탁은 그 학습 현장이 된다. 하루의 일과부터 그 날의 인상 깊었던 일까지 주제의 제한이 없다. 여기서 아이들은 사회자가 되기도 하고 때론 부모의 조언자가 되기도 하면서 토론 실력을 키워 나간다.
초·중등학교로 접어 들면서 이러한 교육방식은 그 깊이를 더해 간다. 어떠한 주제가 주어지면 학생들은 스스로 장단점을 조사하여 그것에 기초한 주장을 입론한다. 그리곤 선생님을 중심으로 둘러 앉아 열띤 토론을 전개하며 논리적 수사력과 토론의 테크닉을 연마하게 된다.
또한 역사적인 시각에서 조명해 볼 수도 있다. 가치판단은 차치하고 어찌 됐든 한반도 면적만한 조그만 섬나라가 한 때 전세계 50여개국의 식민지를 거느리기까지 수많은 통치와 행정력의 아이디어는 그들이 둘러 앉아 벌인 원탁에서의 창의적인 토론과 논쟁의 결과물이였다고 한다.
즉, 문제가 발생하면 원인이 될 법한 모든 경우의 수를 원탁 위에 올려 놓고 실증적 인과적 추론으로 그 근원적 발생인자에 접근해 들어간다. 근본적 문제점을 발견하면 관련된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그에 대한 해법과 대안을 찾기까지 어떠한 인식론적 결정론에 빠지는 것을 경계한다.
이렇듯 영국인들의 토론실력의 이면에는 이러한 귀납적 사유방식이 자리잡고 있다. 즉, 토론이란 상대와 협조하여 최대한 객관적인 사실들을 논리적 체계 속으로 편입하고 최대한 다양한 시각으로 조명하여 결론을 이끌어 내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의 문제로 와 보자.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사고체계는 상대적으로 연역적이고 위계적이다. 여기에는 과거 군사문화와 개발독재의 역사적 경험과 그에 항거한 투쟁의식이 크게 한 몫 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대개의 토론 참여자들은 어떤 주관과 인식에 의한 결론을 앞세워 놓고 이를 뒷받침하는 사실만을 선택적으로 채택하며 토론에 임한다.
따라서 이미 나름대로의 정답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 사고의 포용력과 생각의 유연성을 기대하기란 참 어렵다. 이런 마당에 아무리 객관적인 사실을 제기해도 먹히질 않는다. 논리의 불리함을 깨달으면 곧장 말꼬리 잡기로 들어간다. 그도 저도 안되면 목청높이기와 멱살잡이로 돌변하게 되고 토론은 담박에 극단적 대치나 폭력의 국면으로 옮겨 가곤 한다.
이러한 우리나라의 토론문화를 접할 때마다 나는 토론의 국제경쟁력을 생각하곤 한다. 정부 부문에서부터 민간에 이르기까지 국제 무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협상석상에서 과연 우리의 토론 경쟁력은 얼마나 될까.
토론문화의 국제적 측정지수가 있다면 우리의 수준은 얼마나 될까. 혹시 우리를 대표한 참여자들의 한국적 토론문화와 수준으로 인해 얻을 것을 못 얻거나 괜한 것을 잃고 있지는 않는지 참 우려가 된다.
영국인들 앞에서 흥분하여 논점을 잃어 버린 요기쉬의 모습을 바라보며 내겐 감정적 언사와 생떼로 일관하는 우리의 우물 안 토론문화가 떠올랐다.
멱살잡이로 세월을 보내는 우리의 척박한 정치싸움이 오버랩 됐다. 그런 방식들은 나라밖으로 한발자국만 나오면 도무지 경쟁력이 없고 통하지도 않는 다는 것을 이제 냉정하게 깨달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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