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방청 후 그 부푼 설렘이 무색해졌습니다. 다시는 이런 프로그램에 방청 신청을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니 제가 '방송'을 안다고 섣불리 생각했던 것이 오히려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후 4시부터 8시까지 무려 세 시간 가까이 되는 방청 시간동안 허리 한번 꼿꼿하게 펴지 못했건만 집으로 돌아오는 발걸음은 어찌나 허탈하던지요. 저처럼 태어나서 처음으로 방청 신청을 했다는 올해 대학 신입생인 강양은 헛웃음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방송이란 게 원래 이런 건가요? 출연자에게 그렇게 질문하는 법이 어딨어요?"
강양이 이렇게 말한 것은 이 프로그램의 MC(박명진교수)의 오프닝멘트 준비 때에 나온 말입니다.
" 선생님은 어떻게 보이고 싶으세요? "
이번 주 초대된 소설가 이청준님께 던져진 질문이었습니다. 물론 MC의 선생님에 대한 배려 차원 같은 질문이었을 지 모르지만, 방청을 하는 사람들에겐 얼마나 황당스러웠는지 모릅니다.
MC라면 최소한 녹화를 위해 모셔진 초청작가라면 사전에 이미 멘트를 만들어왔어야하지 않았을까요. 더군다나 소곤소곤 출연자끼리 하는 이야기도 아니고, 가슴에 마이크를 단 채로 울려퍼지게 했으니 얼마나 실망스럽겠습니까.
아마도 오프닝 멘트로 할 내용이 마땅치 않았나보다 라고 넘어갈 수도 있었지만 방청객으로서 이해할 수 없는 시작이었습니다.
게다가 녹화 전 제작진이 방청객에게 특별히 요구를 한 사항이 있었습니다. 그 날의 주인공이 소개받고 들어올 때 모두 일어나서 박수를 치라는 것이었습니다. 뭐, 그거야 평소 그 작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왔을 거라 생각했으니까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박수를 치고 난 후 앉을 때 의자를 끌지 말아달라는 부탁도 받았습니다.
방청객들은 그 요구를 존중해 주었고 당연 녹화장에는 숨소리조차 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게 뭡니까? 한참 녹화 중인데 궁시렁궁시렁 하는 소리가 났습니다. 알고보니 그 프로그램의 제작자 중 어떤 사람이 사적인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참 어처구니 없는 일이라 제 옆에 앉아있던 강양과 웃고 말았습니다.
또 있습니다. 그 뜨거운 햇살에 방청객에게 물 한 잔 나눠주는 배려는 찾아볼 수 없었음은 물론, 자유롭게 질문할 시간이 있다고 했는데도 준비한 질문을 할 수 있는 기회조차 없었습니다.
알고보니 녹화 전 별도에 마련된 질문석에는 제작진이 미리 수배(?)해 놓은 7명의 방청객들이 질문할 수 있도록 준비시켜 놓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당연히 방청석에도 질문의 기회가 주어질 줄 알았던 방청객들은 "이제 모두 끝났습니다"라는 제작진의 말을 듣고 당황할 수밖에요.
제 앞 좌석에 앉아있던 고3 여학생은 수첩에 빼곡이 적어놓은 질문을 한개도 하지 못했다며 무척이나 아쉬워하며 돌아갔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갔을 그 여고생을 생각하니 은근히 화도 났습니다. 물론 이것을 방청객에서 질문이 나오지 않을 것을 대비한 제작진들의 노력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그와 별도로 정말 생생한 질문을 할 수 있는 방청객들의 질문을 소홀하게 대했던 것은 문제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 제작진의 의도를 먼저 설명해 주었다면 쓸데없이 질문 생각하느라 고생하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녹화가 끝난 시간은 8시. 경희대 캠퍼스를 빠져나오며 허탈한 마음이 아직은 덜 나은 발목으로 쏠렸습니다. 지하철을 향해 걸으며 강양과 이런 약속을 했습니다. 교양프로가 아닌 오락프로에 방청 신청을 해서 차라리 맘껏 자유롭게 소리라도 지르다 오자구 말입니다.
방송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이런 생각이 듭니다. 방송은 PD나 MC, 그 밖에 제작진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프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방청객과 같은 시청자의 호흡이 함께 할 때 될 수 있다고 말입니다. 방송을 만드는 자들과 방송에 참여하는 자들이 함께 목소리를 낼 때 더욱더 값진 방송이 될테니까요.
비록 TV화면에 나오지 않는다해도 그 프로그램을 위해 참여한 방청객들에게 꼭두각시 노릇을 시킬 것이라면 아예 방청석을 만들지 않는 것이 어떨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