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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보훈 혜택의 질감 속에서>라는 글을 쓴 적이 있다. '호국 보훈의 달'이라고 하는 6월을 맞아 '대한민국상이군경회' 회원으로 가입한 소감을 적은 글이었다.

'상이군인'에 대한 어렸을 적의 기억, 상이군경에 대한 보훈의 실태, 베트남전쟁 고엽제 후유증 환자로서 갖게 되는 한국전쟁 부상자 선배들에 대한 죄송한 심사, 과거 광주민주항쟁 진압과 관련하여 보훈 혜택을 받고 있는 부당한 사례에 대한 지적 따위를 기술한 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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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훈 혜택의 질감 속에서


대한민국상이군경회 회원이 되었으므로 지역의 상이군경회원 여러분께 일종의 신고랄까, 인사를 드리고자 하는 뜻도 거기에는 있었다. 그 동안 알게 모르게 지속해 왔던 지역의 상이군경들에 대한 내 무관심을 반성하는 의미도 있었고, 우리 주변에 '보훈 정신'에 대한 자각을 좀더 일깨우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원래는 그 동안 체재 수호의 선봉 역할을 하면서 극우적인 모습만을 줄곧 보여 온 대한민국상이군경회 또는 일부 상이군경들의 속성이나 행위들에 대한 내 비판적인 시각도 피력하고 싶었으나, 그것은 일단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보훈 수혜자들 중에는 정당한 사유가 아닌, 군 영내에서 운동을 하다가 다친 사람도 포함되어 있다는 항간의 지적들에 대한 고찰도 내 의중에 있었으나, 지면 관계상 역시 언급을 생략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글은 다분히 오늘의 보훈 실태와 관련하여 내가 누리고 있는 보훈 혜택을 굳이 자랑삼아 소개하는 꼴이 된 것만 같았다.

그 글이 일단 지역신문(충남의 태안신문)에 게재된 다음 <오마이뉴스>에 올랐을 때, 미국에서 글을 읽은 누이동생이 메일을 보내왔다. 그 메일 안에 이런 말이 있었다.

"다른 얘기지만 '보훈' 받는 것도 너무 얘기하시지 말고요. 명퇴자 실업자도 많다는데, 지푸라기라도 없어서 못 잡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그런 얘기 듣고 속 쓰리게 되지 않을지…."

누이동생의 그런 '걱정'을 접하는 순간 묘한 당혹스러움에 휩싸였다. 누이동생의 그런 지적이 옳다는 생각이 들었고, 참으로 어려운 처지에서 내 글을 읽고 반감이나 쓰린 심정을 갖는 사람은 혹 없을까, 나도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마음 탓에 그 다음의 글 <먼 '가족 나들이' 길에서>를 쓸 때는 약간의 갈등이 없지 않았지만 나의 '사는 이야기'거리로서는 버리고 싶지 않은 소재였다. 팔순 노모와 두 형제 가족을 위해 어렵게 마련한 먼길 가족 나들이였다. 결코 나를 자랑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으로서의 가족 사랑, 노모께 대한 효성, 형제간의 우애, 가족 화목 등을 꾸밈없이 진솔하게 내 글의 독자님들께 들려 드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내 평범하고 소박한 삶을 진솔하게 그려내는 일이 혹 스스로 너무 나발을 불고 자랑한다는 시각을 불러올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지만, 그것은 별 걱정거리가 아니었다. 그런 시각은 어떤 글에든 늘 있게 마련인 까닭이었다.

그보다 내가 걱정한 것은, 내 글을 읽은 독자들 중에 부러움이 지나쳐서 상심에 빠지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는 점이었다. 미국에서 사는 누이동생이 메일에 적은 것처럼 명퇴자도 실업자도 많은 오늘의 깊은 불황 속에서 지푸라기도 없어서 못 잡는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내 글을 읽고 그만 더욱 속 쓰려할 지도 모른다는 점이었다.

카드 빚에 짓눌려서 오도가도 못할 처지에 빠진 사람들 눈에는 어머니와 두 형제 가족을 내 승합차에 태우고 수백 리 밖인 충북 청원 땅 '초정약수터'까지 나들이를 가는 내 생활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얄미운 일일까. 무려 3백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신용불량'의 덫에 걸려서 힘들게 살고 있는 이 시절에 그런 사치스러운 가족 나들이를 왜 하며, 왜 자랑하는가.

그 글은 내 고장인 태안 군청 홈페이지 자유게시판에도 올랐는데, 몇 사람이 내 글에 반감을 표시했다. 너무 개인의 '신변잡사'를 자랑한다는 지적이었다. 그 의견에 대한 반론들도 오르고, 나를 옹호하는 글들과 비판하는 그들이 서로 어우러지니 가히 백가쟁명(百家爭鳴)식의 독자 의견들이 내 글에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었다.

충분히 논리적이거나 사리가 분명한 글은 아니더라도, 나의 '신변잡사 자랑'을 비판하는 글들을 보면서, 그 글을 쓴 사람들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일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있을지도 모를 '카드 빚과 신용불량의 늪 속에서 지푸라기도 없어서 못 잡는' 사람들의 처지를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고, 더불어 그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평소 일부 연예인들과 스포츠 스타들에게서 묘한 이질감 같은 느끼며 사는 사람이다. 그들이 홈런 한방으로 벌어들이는 돈과 광고 출연 한 건으로 벌어들이는 수억 원대의 금액까지 쉽게 보도 매체에 오르는 현상을 보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심리적 박탈감을 겪을 것인가, 적이 걱정을 해 온 사람이기도 하다.

언젠가 한 번은 스포츠 스타와 인기 연예인들의 수입과 관련하여 방송 매체들의 분별없는 보도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지면에 쓴 적도 있다.

그런 내가 수많은 사람들의 심리적 궁핍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오히려 더욱 조장하듯이 먼길 가족 나들이까지 할 수 있는 내 처지를 천연덕스럽게 자랑처럼 늘어놓는 글을 쓰다니, 생각하면 면구스럽기도 한 일이었다.

그런 마음을 가다듬고 있던 중이었다. 24일 아침 식사를 하며 텔레비전 뉴스를 보다가 나는 실로 충격적인 사실을 접하게 되었다. 태안군 태안읍 동문리라는 말에 한 순간 내 눈과 귀를 의심했지만, 틀림없이 우리 고장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것도 우리 동네, 백 걸음도 안 되는 이웃지간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손을 다치고 실직을 한 데다가 부인이 진 5천만 원의 카드 빚에 쫓긴 삼십대 가장이 네 살과 열한 살인 두 딸을 살해하고 자신도 자살을 기도하여 중태에 빠졌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밥숟갈을 놓고 탄식과 신음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종일 그 사건이 내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앞집 은옥 엄마는 그 집엘 갔다 왔다는 말을 했지만, 나는 차를 타고 길을 가며 그 집 쪽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참담한 심경이었다. 슬프고 아픈 마음속에서 나는 사건이 발생한 23일 저녁 9시쯤을 자꾸 생각하곤 했다. 그 시간에 나는 무슨 일을 하고 있었을까? 백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이웃지간에서 그런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그 시간에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평소와 달리, 그 날 그 시간에는 집의 거실에 편안히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지도 않았다. 컴퓨터 앞에 앉아 인터넷에 빠져 있지도 않았다. 음식점이나 술집에 앉아 호사를 누리고 있지도 않았다. 시내 모처에서 29일 저녁 문예회관에서 갖게 되는 고장 문학행사의 준비를 위한 모임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 사실을 자꾸만 상기했다. 쓸데없는 생각임을 잘 느끼면서도 나는 정말 이상하게 그 생각을 하곤 했다. 내가 스스로 마음의 불편을 느낄 까닭도 없는 일이고, 그 시간에 내가 쾌락이나 호사를 누리고 있지는 않았다고 해서 마음이 온전히 편해질 것도 아니건만, 자꾸만 그 생각에 빠지곤 하는 내 모호한 심리 구조를 느끼며 혼자 쓴웃음을 짓기도 했다.

저녁에 학교에서 돌아온 아내는 의붓아버지 손에 죽은 그 집의 큰딸 이야기를 했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고 했다. 담임 선생님이 하루종일 넋이 빠진 것 같은 표정이었다고 했다. 의붓아버지 밑에서 경제적으로 쪼들리는 가운데서도 전혀 내색 없이 밝고 쾌활하게 생활해 온 아이 얘기를 하며 담임 선생님이 울어서 모두 같이 울었다고 했다.

텔레비전에서는 저녁에도 뉴스 시간마다 그 사건을 보도했다. 그런 일로 인해 내 주변의 잘 아는 사람들 얼굴을 텔레비전에서 보게 되니 얄궂고도 착잡한 심정이었다.

너무도 엄청난 일을 저지른 그 삼십대 가장은 심각한 중태라서 천안 단국대병원으로 후송되었다고 했다. 그를 생각하면 지금도 너무 착잡해지는 심경이다. 기가 막히고 어처구니없는 심정 속에서 그저 한숨만 나온다.

그를 생각하자니 불현듯 얼마 전에 백화산에서 만난 한 청년의 모습이 떠오른다. 한 남자가 태을암과 정상 중간의 외딴 바위 위에 홀로 앉아 있었다. 깊은 상념에 젖어 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호기심이 생겨 다가가 보니 그는 내가 잘 아는 향교말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는 로또 복권이 두어 장 들려져 있었다. 나는 로또 복권을 산적도 없고 추첨하는 것을 텔레비전에서 본 적도 한번 없지만, 그것이 로또 복권이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바위 위에 앉아 깊은 상념에 젖어 있었던 게 아니라, 두 손으로 로또 복권을 쥐고 백화산 신령님께 기원을 드리고 있었던 셈이었다.

나는 그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한숨을 내쉬었다. 로또 복권의 열풍이 바야흐로 백화산 날망에까지 불어오고 있는 셈이라는 쓸데없는 생각이나 할 수밖에 없었다.

텔레비전에서는 노상 스포츠 열풍이 불고, 연예인들이 나와 신변잡사를 늘어놓으며 노닥거리는 장면이 차고 넘친다. 몇 초 짜리 광고 출연 한 건으로 몇 억 원을 벌었다는 얘기도 심심찮게 나오곤 한다.

그 반면에 우리네 서민 세상은 이제 '신용불량자 3백만 명 시대'라는 말이 회자된다. 카드 빚에 쫓겨 자식까지 살해하고 자살을 기도하는 사람도 생겨난다.

이런 혼돈 상황이 깊어질수록 복권 장사는 더욱 호황을 누리고, 로또 복권 열풍은 계속 수많은 사람들을 불로소득, 일확천금, 인생반전을 꿈꾸는 혼미 속으로 몰아넣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내가 사랑하는 백화산에서조차도 두 손에 로또 복권을 쥐고 산신령께 기원을 드리는 청년을 보면서 그가 어떤 깊은 상념의 세계에 빠져 있는 줄로 오해하고 착각하는 이상하고도 허무한 착시 현상을 계속적으로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나는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뜬 그 5학년 여자아이의 담임 선생님께 그 아이의 이름을, 가능하면 그 아이의 동생 이름도 알아오라고 부탁했다. 우리 성당에서는 오늘 저녁에도 미사가 있다. 그 불쌍한 두 아이의 이름을 적어 '위령미사'를 봉헌할 생각을 한 때문이다.

그 아이들이 하느님을 모르고 산 아이들지라도….
아직은 세상의 죄라는 것을 모르고 산 천진난만한 어린아이들일지라도….
내가 그 불쌍한 어린 영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란 미사 봉헌과 기도밖에 없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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