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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행, 하버드에서 회계사까지/열림원
만행, 하버드에서 회계사까지/열림원 ⓒ 열림원
느낌을 풀어나가야 할 들머리부터 선문답에 빠질 뜻은 없다. 현각의 심정을 옮겨보았을 따름이다. 하버드에서 화계사에서, 아니 태어난 순간부터 죽을 순간까지 붙들고 살 화두를 인용했을 따름이다. 예의 답이 궁했을 법하다. 집을 떠난 후 6년이 지나서야 붓다는 답을 찾았다지만 어디 그게 쉽기만 했겠는가. 해서 새로움 없는 시대에 현각이 품은 물음은, 바로 내가 품고 있는 물음이다. 하지만 과연 나는 그 물음마저 마음에 품고 있는가.

아니다. ‘안다 안다 하는’ 무지에 갇혀, 물음을 버린 지 오래다. 현각은 그 물음을 다시 나에게 던져준다. 이렇게 해서 책은 시작한다. 그리고 내 고백도 시작한다. 다시 화두를 붙잡아 보자.
“나는 과연 누구인가”

폴과 나의 체험 ‘하느님의 사랑’

지난 날을 활자화하기가 어째 거북스럽지만 그래도 기억을 되살려 보자. 옹근 10여년 전 ‘철들’ 무렵이다. 그때 난 죽은 언어에 갇혔으면서도 그것을 몰랐고 되레 하느님의 사랑을 만끽했다. 교회가 만들어 논 틀은 한 어린 소년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넉넉했거니와 세상은 항상 사랑으로 넘쳐나 보였다.

사랑과 평화가 똬리튼 교회 공간은 그만치 단단했고, 그 곳을 벗어나려하거나 또는 들어오지 못한 또래 친구들은 모두 연민의 대상이요, 선교의 대상이었다. 더 나아가 선한 자와 악한 자를 가름하는 훌륭한 기준이었다.

무슨 깜냥이었을까. 지금은 남우세스런 일로 기억되지만, 그때는 언죽번죽 ‘명분’도 내걸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구원이시니 모든 죄인이 돌아와야 할 곳이다. 진리였다. 오랜 물음은커녕 생각할 필요도 없는 확실한 진리였다. 선과 악이 구분됐으니 이 만한 생각은 어쩌면 당연하리라.

해서 박제된 언어 속에 하느님의 차별된 사랑은 당연했다. 그래서일까. 예의 나는 신실한 신앙인임을 떠벌렸고 큰 자랑이었다. 성숙하는 신앙에 맞춰 하느님의 사랑도 점점 크는 듯 했으니 말이다. 이 점에서는 현각도 나와 비슷하리라. 아니, 같은 종교 경험을 한 것이다.

“어릴 적 성경에서 읽은 예수님의 말씀은 철이 들 무렵부터 내 머릿속에 새겨져 나의 힌생관이 되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어긋난 현실, 그리고 그것을 깨우친 나

제행무상諸行無常. 모든 것은 항상 그대로 있는 법이 아닌가 보다. 정신마저도. 반항이 곧이어 찾아왔다. 싸목싸목 펴저가는 반항 뒤에는 ‘하느님은 정말 사랑이신가’라는 신앙적 회의가 가리틀기 시작했다. 엘리아데가 고백한 성과 속 마냥 무한한 사랑 뒤에 무한한 악을 보기 시작했다.

예의 신앙 문제로 몰아세울 일이 아니었다. 선한 자는 고통스런 현실에 울부짖고, 악한 자는 쾌락의 현실에 마구날뛰는 묘한 모습이 불합리하게 느껴졌다. 누가 강요할 것도 없이 확실한 진리는 의문의 진리로 왜나갔다.

그랬다. 부와 가난, 부조리와 모순, 그리고 교과서와 다른 현실은 나를 분노에 차게 만들었다. 애오라지 선한 사람들이 애면글면 쌓아온 현실의 결과가 도대체 뭐란 말인가. 둘로 가른 선과 악은 점점 하나가 됐고, 나중에 가서는 그 경계조차 혼미했다.

곧, 박제된 언어라는 환경에서 신의 차별된 사랑이란 양분은 그 자체가 거짓 진리였다. 진리의 무지를 깨달은 순간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느 종교 사상에도 속박되지 않은 채 나를 찾아가는 첫 걸음인 것이다.

이런 개인적 경험때문일까. 현각의 고백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을 뿐더러 생게망게한 언어조합도 아니다. 진리를 밝히려는 지극히 당연한 욕구와 그에 걸맞게 겪은 생각의 혼란도 매우 비슷했다. 따져보면 예수 그리스도와 진리의 관계라는 밑절미가 같았기 때문이다. 결국 시대와 공간은 달라도 정녕 현각과 난 같은 생각을 했던 셈이다. 현각의 증언은 곧 나의 증언이었다. 그는 자신에게 다음과 같이 물었다. 또한 내 물음이기도 하다.

“만약 신이 우주를 만들었다면, 그리고 우주 안의 모든 것을 만들었다면 인간의 죄, 죽음, 사탄 역시 신이 만들 것일까? 그렇다면 신은 너무 불공평하지 않은가? 그 모든 걸 다 만들어놓고 인간이 죄를 범했다고 벌하신다는 말인가?”

흘러간 시간,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현각과 나

세월은 흐른다. 그리고 사람의 모습도 달라진다. 현각은 파란 눈의 스님이 되어 진리를 얻기 위해 명상과 참선을 수행하고 있다. 불성이란 무엇인가,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진리란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스스로를 돌아보고 있다. 중뿔나게 달리고 있다. 느껴진다. 이심전심(以心傳心)이라 해야 할까. 처음에는 진리를 찾는 그의 열정이 타인의 가슴에 고통을 안겨줬으나 이제는 편안을 가져다 준다. 숭산 큰스님을 만나 그는 진정 거듭난 사람이 되었다. 현각 이전, 폴이란 이름에 딸려왔던 그의 이미지들은 이젠 낯선 과거일 뿐이다.

하지만 난 여적 버리지 못하고 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 난 버릴 수 없을뿐더러 버릴 용기도 없다. 난 삶에 집착을 하니까. 기실 오온(五蘊)이 만드는 세계가 거짓일지라도 말이다. 아마도 난 무지의 굴레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래서다. 비난할 수가 없다. 현각을 가리켜 가족을 등지고 삶을 등진 ‘비겁한 사람’이라 욕할 수 없다. 그는 진정 자유인이 됐으니 말이다.

흘러간 시간,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현각과 나
흘러간 시간, 다른 길을 걷고 있는 현각과 나 ⓒ 열림원
인정하자. 용기없는 나를 그대로 인정하고, 진리를 얻으려는 열정이 남다른 현각의 모습을 인정하자. 다시 밝히거니와 나는 진리의 길을 고민했다. 진리의 길은 물론 여러 갈래다. 그런데 난 여러 갈래의 길을 모두 얻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는 늘 하나의 길뿐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답답한 마음에 자꾸 왜나가려 한 것이다. 그런면서도 이 같은 고민을 스스로 풀려 하지 않았다. 기실 진리를 찾으려는 악다구니도, 열정도 없던 것이다.

다시 인정하지만, 나는 진리를 찾지 않으려고 일부러 소극적으로 살았다. 겉으로 언죽번죽 내세운 명분 외에 전혀 한 일이 없다. 내가 믿는 진리를 위해 여러 가지 길을 확인하는 것이 두려워 강요된 하나의 길만을 쫓는 데 만족했다. 예의 귀찮은 고민은 모두 잊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계속 바랬는지 모른다. 내가 확인 할 수 없으니 누군가가 진리의 길을 하나씩 드러내 주기를 말이다. 이 같은 얄팍한 방법을 통해 내가 생각한 것이 맞았다고 대신 이야기 해 주기를 바랬는지 모른다.

그래서일까. 현각의 존재가 더욱 크게 다가온다. 진리를 위해 자신의 가족과 사랑하는 사람까지 버리고 출가한 그의 이야기를 읽는 동안, 나는 한없는 마음의 위안을 얻은 것이다. 기실 새벽녘의 울먹거림도 바로 이 때문이다. 강파른 그의 삶을 느끼며 반성과 채찍으로 내 삶을 뒤돌아 보게 한 그의 언어가 신비스럽다. 비록 박제 속에 갇힌 언어일지라도 말이다.

종교적 사고방식을 벗어나 참 진리로

맞다. 틀에 박힌 ‘종교적 사고방식’은 기우뚱거리는 절름발이와 같다. 거짓 윤똑똑이들이 진실을 비틀 듯 진실에서 한발짝 물러서게 한다. 단, 조건이 붙어야 한다. 적어도 한 종교에 온 마음과 온 정성을 다해 정진해야 한다. 어느 종교든 상관없다.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불교든, 유교든 전혀 문제 없다. 한 종교에, 내 온 몸의 열정이 스며들었을 때, 비틀림은 시작된다. 곧 틀에 박힌 ‘종교적 사고 방식’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쯤되면 다(多)는 없고 일一만 있다. 내 종교가 제일 귀하고 소중하다. 다른 종교로는 진리의 문턱에 들어서지도 못한다. 온갖 말로 어루꾀도 자기 신념은 되도록 바꾸지 않는다. 왜나간 종교적 생활이 드디어 독선적 종교관으로 뒤바뀐 셈이다. 그리고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너는 어느 때까지 독선적 종교관을 고집할 셈이냐?’

잠시 침묵의 살풍경이 돈다. 뼈져린 반성을 못 한 탓일까. 아니면 무지無知를 알면서도 그동안 실천에 옮기지 못한 탓일까. 딴에는 도대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찾아보겠다며 바둥거리기도 했다. 예의 차근차근 지식을 쌓았고, 한꺼풀 한꺼풀 묵은 지식을 벗겨냈다. 그럼에도 문득문득 ‘길(그리스도)은 하나다’는 생각을 저버리지 못했다. 미련이 남아서일까. 아니면 아직 다양한 길을 찾지 못해서일까. 박제 속에 갇힌 정신이니 기실 자유가 없는 게 당연하리라.

그런 뜻에서 현각은 윤똑똑이가 아니다. ‘종교’의 감옥에서 풀려나, 진리의 자유를 찾았다. 그랬다. 결국 그는 찾았다. 독선적 종교관에서 분연히 빠져나와 다른 세계로 가는 열쇠를 얻었다. 하여 그의 고백은 나 뿐만 아니라 독선적 종교관에 빠진 윤똑똑이들에게 넉넉히 길이 되거니와 경고가 된다.

“나는 어쩌면 종교적 사고방식이 진리를 깨닫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까지 이르렀다. 지난 역사에서 종교가 사랑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고통에 빠뜨린 그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멀리 갈 것도 없다. 선민주의에 빠진 이스라엘을 보라. 복잡한 전후사정을 제쳐두고라도 그들의 마음엔 사랑과 온유와 평화가 없다. 되레 사랑을 가장한, 온유를 가장한, 평화를 가장한 지독한 자기 우월의식이 덧입혀져 있을 뿐이다. 자기 우월의식에는 자신들의 생각과 종교가 곧 진리요, 실재라는 거짓 깨우침이 도사려 있다. 기실
'시오니즘’에서 ‘유니버설리즘’으로 과감히 돌아설 때다. 진리는 시오니즘에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현각의 고백대로 ‘종교와 진리’는 다르다. 무지에 갇힌 무명자는 종교를 진리로 착각한다. 이 때는 누군가가 나서서, 또는 스스로 나서서 생각을 수정해야 한다. 필요가 아니고 당위다. 종교는 진리로 나가기 위한 방편일 뿐이다. 엄정히 물어보아도, 방편이 목적이 될 수는 없다.

“쇼펜하우어는 나에게 또 진리와 종교의 차이에 대해 깨닫게 했다. 그는 종교와 진리가 다른 것이라고 말한, 내가 만난 유일한 사람이었다.”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이르는 길에 현각은 이를 깨달은 것이다. 그리고 그는 지금 ‘참선’을 하고 있다. 하여 모두 현각이 했던 것처럼, 그렇게 힘든 길을 가야 하나. 그렇진 않다. 미리 밝혀두거니와 맹목적 추종은 금물이다. 진리는 결국 정신의 깨우침이듯, 현각이 깨우친 종교의 위선을 우리도 알아내기만 하면 된다. 독선적 종교관에 빠진 사람에게 이것이면 족하다. 현각은 그 점을 제대로 지적했고, 뼈져리게 경험한 것이다. 확실히 해 두지만 진리는 예수에게도 있고, 부처에게도 있고, 공자에게도 있다.

“그로 인해 내 마음이 얼마나 열렸는지 설명할 수 없다. 마치 큰 짐을 내 어깨에서 내려놓는 듯한 가벼움이라고 할까.”

작은 염려

불교의 앞날은 밝다. 빠름에 지친 현대인에게 불교는 매력있는 정신적 위안이다. 자신을 잊고, 가족을 잊고, 뭔가에 쫓기듯 아등바등 살다보면 공허가 엄습하기 마련인데, 불교의 참선은 멋진 신세계를 펼쳐준다. 비록 잠시 순간일지라도. 그래서일까. 현각은 애써 서양의 불교 바람을 소개했다. 참선수행과 불교에 심취한 스타에서 정치인까지. 기실 불교 바람이 한때 바람이 아님을 보란 듯이 얘기한다.

이에 딴지 걸고 싶은 마음은 없다. 성장에 배아파할 뜸부기는 아니다. 다만 우려가 될 뿐이다. 미덥지 못한 지적이겠지만 일리는 있으리라 생각한다.

깜냥껏 전하고, 깜냥껏 사찰을 짓고, 깜냥껏 성장하는 건 종교의 숙명이다. 널리 가르침을 전해서 더 많은 사람들이 냉랭한 마음에 정신적 위안을 얻을 수 있다면 그보다 더 좋은게 어디있으랴. 다만, 성장의 달콤함에 빠져 박제된 종교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곧, 불교 바람이 제도에 얽매인 종교가 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진리는 언제든 제도에 갇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곧, 제도주의화된 진리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여기에는 생명력도, 가르침도, 진리도 없다. 또 따른 독선적 종교관이 자릴 꿰찰 뿐이다. 되레 사람들의 마음에 멍울을 새겨 논다. 하여 1) 수단이 목적이 되고 목적이 수단이 되거나 2) 본디 사명보다 자신의 생존과 발전에 더 깊은 관심을 갖거나 3) 정신을 상실하고 형식 만을 추구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혹 이 세가지를 꼭 지켜야겠다면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길 바란다.

시작은 미약했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작은 물음을 품었던 꼬마가 결국에는 진리를 찾아 구도의 길에 나선 수도자가 됐으니. 생게망게한 경험은 아니다. 누구든 한번 쯤 생각해 봄직한 고민이거니와 나 또한 그러했다. 현각은 좀 더 적극적으로 진리를 찾기 위해 속세를 떠났을 뿐이다. 그럼에도 그가 유달리 주목받는건 쉼없는 노력과 한없는 우리나라 ‘사랑’ 때문이다. 현생의 값진 고행이 부디 내세의 크나큰 업으로 되받길 축복한다. 덧붙여 이 책은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자랑스런 선택의 용기’를 기록한 것이다.

만행 1 -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

현각 지음, 김홍희 사진, 열림원(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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