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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 경계 쇠말뚝만 박아놓은 인도와 차도의 구분-그것도 인도 가운데 전봇대가 막고 있다.
달랑 경계 쇠말뚝만 박아놓은 인도와 차도의 구분-그것도 인도 가운데 전봇대가 막고 있다. ⓒ 최성수
출근할 때 30분, 퇴근 할 때 30분, 그러니 하루에 모두 한 시간을 걸어 다니게 된 것입니다. 처음에는 조금 힘들고, 너무 먼 거리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늘 걷다 보니 점점 다리에 힘도 붙고 걷는 재미도 느끼게 되었습니다.

지난 오월, 비가 오던 날이었습니다. 막 학교 교문을 나서서 걸어가고 있는데, 어떤 아가씨가 다가와 물었습니다.

“여기서 성북 초등학교 앞이 먼가요? 그 학교 근처 녹색연합을 찾아가는 길인데.”

성북 초등학교라면 이곳과 반대 방향, 그러니까 우리 집 근처입니다.

“길을 잘못 찾으셨네요. 이쪽이 아닌데.”

제 대답에 아가씨는 난감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제가 마침 그쪽으로 가는 길이니 저를 따라 오실래요?”

우리 학교 근처에 다른 초등학교가 있는데, 아가씨는 그 초등학교를 성북 초등학교로 잘못 알고 찾아온 것인가 봅니다.

내 제안에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를 따라왔습니다. 저는 대학가 앞을 지나고, 시장통을 거쳐 대로를 건너고, 다시 성북동길을 따라 집 근처까지 왔습니다. 그동안 아가씨는 줄곧 제 뒤를 한 발짝 정도 떨어져 따라왔습니다.

제가 우리 집 근처에 와서 아가씨가 찾는 곳을 알려 주자, 그제야 아가씨는 환히 웃으며 입을 열었습니다.

“늘 이렇게 먼 길을 걸어 다니세요?”
“운동도 되고 좋지요, 뭐.”

제 대답에 아가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감을 표시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남기며 제가 가르쳐준 방향을 따라 갔습니다. 아마도 아가씨는 30분을 걸어야 하는 그 길이 꽤 멀게 느껴졌나 봅니다. 제가 처음 걸어 다닐 때 느꼈던 것처럼 말입니다.

석 달 남짓 걸어 다니다 보니, 걷는 즐거움과 걷는 괴로움에 대한 이런 저런 단상들이 떠오릅니다.

우선 걷는 즐거움. 차를 몰고 다닐 때는 과정이란 없었습니다. 길의 출발지와 목적지만이 존재할 뿐, 그 길의 중간에 있는 어떤 것도 내게는 의미가 없었던 것이지요.

집에서 출발하면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는 오직 차 안에서 운전에만 집중해야 하는 시간입니다. 그 길에 무엇이 있든, 그 길의 어제와 오늘이 어떻게 다른가는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니 목적만이 있고 과정이 없는 것이 차를 운전하고 가는 길입니다.

진달래가 핀 오늘은 피지 않은 어제와는 다른 날이다-지난 봄 길목에서 만난 진달래
진달래가 핀 오늘은 피지 않은 어제와는 다른 날이다-지난 봄 길목에서 만난 진달래 ⓒ 최성수
그러나 걷는 것은 목적만큼 과정에도 의미가 있는 행위입니다. 봄이면 그 길에 잡초가 먼저 돋아나고, 통통하게 살이 오른 목련이 어느 날은 활짝 피어 있습니다.

학교 앞의 진달래도 어느 날 문득 제 빛을 세상에 피워 올리지요. 목련이 피고, 진달래가 터진 날은 어제와 다른 오늘입니다. 그 새로움은 걷기 때문에 맛보는 즐거움인 것이지요.

또 걷는 것은 사고의 폭을 넓혀 줍니다. 걷기 때문에 길의 변화가 눈에 들어오고, 눈에 들어오는 것의 자극을 통해 내 사고의 폭은 넓어집니다. 상상력이라고 해도 좋고, 개똥 철학적 사고라고 해도 좋을 이 생각은 걷는 즐거움의 하나입니다.

나는 지난 한 학기 내내 걸어 다니면서, 차를 몰고 다닐 때와는 달리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그 생각은 걸어 다니면서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한 생각이기도 하고, 아침 신문에 난 기사에 대한 것이기도 하고, 세상이 아무리 철없이 굴러가도 때가 되면 어김 없이 제 몸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자연에 대한 경외감이기도 합니다.

걷는 즐거움에서 가장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육체적 건강이지요. 가끔 저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정신적 건강이 육체적 건강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육체적 건강이 정신적 건강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사실 저는 지병이 있어 몸이 약한 편입니다. 한때는 둘째 가라면 서러울 정도의 건강한 몸이었지만, 몸에 병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정신적으로도 황폐해 지고, 자주 신경질을 냈으며, 그런 저 자신에게 대해 답답한 마음이 몸의 병을 더 키웠습니다.

어느날 눈부시게 피어난 목련과, 그 너머 싱그럽게 푸른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걷는 즐거움의 하나
어느날 눈부시게 피어난 목련과, 그 너머 싱그럽게 푸른 하늘을 만날 수 있는 것도 걷는 즐거움의 하나 ⓒ 최성수
그런데 걷기 시작하면서, 허약하던 다리에 힘이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다리에 힘이 오르니, 처음에는 괴롭던 걷기가 더 편해지고, 마음도 넉넉해 졌습니다.

마음이 넉넉해지니, 신경질도 줄어들고, 예민하던 몸의 반응들이 점점 느긋해 지기 시작했습니다. 걷는 즐거움이야말로 또 다른 세상을 보게 해 주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고 저는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걷다 보면 걷는 괴로움도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좁은 길을 마구 내달리는 자동차들이 걷기를 괴롭게 합니다. 아슬아슬하게 몸을 스치고 지나가는 자동차와, 그 차의 꽁무니에서 쏟아져 나오는 매연 때문에 걷는 즐거움이 반쯤 사라지기 일쑤입니다. 그러면서, 나도 운전할 때는 저랬었다는 반성도 하게 되었습니다.

인도와 차도의 구분도 없이 마구 주차해 놓은 차량들도 걷기를 괴롭게 합니다. 인도에 주차해 놓은 차를 피하려면 어쩔 수 없이 차도로 내려서야 하고, 그때는 어김없이 경적을 울리며 곁을 스쳐가는 자동차에 깜짝깜짝 놀라게 됩니다.

간밤의 숙취와 불면을 그대로 담아내고 있는 거리의 풍경들도 걷는 괴로움의 하나입니다. 인간이 토해놓은 오물들을, 부리를 맞대고 그것을 먹고 있는 비둘기, 마구 흩어지고 터진 쓰레기 봉투, 거기에 비라도 오는 날이면 질퍽하게 흘러내리는 쓰레기 침출수 따위, 그리고 무엇보다도 걷기를 괴롭게 하는 것은, 앞서 가는 사람이 흠뻑 빨아들였다가 뱉어놓는 담배 연기입니다.

나는 때때로 숨을 멈추고, 그 담배 연기가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기도 합니다. 그런데,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휙 꽁초를 던져버리고 가면, 괜히 걷던 길까지 싫어지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도로는 구조적으로 걷기에 적당하지 않습니다. 보행자를 배려하지 않고, 차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걸어 다니는 길에는 큰 도로를 횡단해야 되는 곳이 한 군데 있습니다. 그런데 그 횡단보도의 신호등은 아주아주 늦게 작동해서, 건너갈 사람들이 횡단보도 근처의 인도를 꽉 채우고도 한참을 기다려야 바뀌기 일쑤입니다. 차량 통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보행자의 편의는 배려되지 않기 때문이지요.

길을 막고 세워둔 차-사람이 걸어갈 길은 없다
길을 막고 세워둔 차-사람이 걸어갈 길은 없다 ⓒ 최성수
인도와 차도의 구분조차 없이 달랑 선 하나 그어놓은 길도 걷기를 답답하게 합니다. 가로수 하나 없는 길, 보행의 편의를 생각하지 않고 굴곡이 심하게 혹은 요철이 심하게 만들어 놓은 길, 온통 가게와 가게로 이어진 길을 걸으며 나는 가끔, 언젠가는 이 길에 아름드리 가로수가 들어서고, 봄이면 파릇한 새싹이 돋는 꿈을 꾸곤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차를 몰고 다녀야 하는 현실 속에서, 내가 꾸는 꿈은 어쩌면 허황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재잘거리며 등교하는 아이들의 싱그러운 웃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길, 아침이면 늘 그 시간에 나와 음료수 상자를 옮기는 아저씨가 있고, 오토바이 뒤에 두부 판을 가득 싣고 새벽을 향해 달리는 아저씨가 있고, 바쁜 출근길을 재촉하는 구두굽 소리가 골목을 울리는 길, 그 길을 걸어 출근할 수 있는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인도를 벗어나 차도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길.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갈 길은 없는가?
인도를 벗어나 차도로 걸어갈 수밖에 없는 길. 즐거운 마음으로 걸어갈 길은 없는가?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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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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