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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밝힌 바와 같이 기존의 민중사 연구의 지평을 넓히면서 대안적 역사쓰기를 제공하기 위하여,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역사인류학적 접근을 통해 충청남도 예산군 시양리(가명)라는 한 '빨갱이 마을' 역사의 재구성을 시도한 글이다.

즉 충남 예산군에서 '예산의 모스크바'로 불릴 정도로 좌익활동이 활발했던 시양리라는 마을의 근현대사를 그 지방민(현지민)의 구술증언(oral testimony)을 통해 재현하려는 것이다.

이는 지금까지 한민족 전체가 주체가 되는 국가전체사(national history)라는 위로부터의 관성적 역사쓰기가 사실 한민족 내의 다양한 주체들의 역사적 경험과 해석의 다양성을 무시해왔음을 반성할 것을 촉구하고 지방에 따라, 세대에 따라, 계층에 따라, 성별에 따라 한국전쟁을 경험한 주체들이 다양함을 인정하려는 역사인류학적 주장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윤택림은 지방민의 다수의 목소리를 드러내고, 지방민의 역사를 복원함으로써 마을 차원의 미시적 접근을 통해 군·국가 차원의 거시적 접근으로 연결시키고자 한다. 나아가 그는 구술사에 덧붙여 가족사와 여성 구술생애사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러한 목적으로 저자는 충남 예산군 시양리에서 1989년 11월부터 1990년 4월까지 6개월간 1990년 10월에서 12월까지 3개월간, 총 9개월 동안의 현지조사와 문헌조사를 수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공적(public), 공식적(official) 역사의 이면에 내장돼 있었던 시양리 마을사람들의 대항 기억을 끄집어내었다.

민족과 국가가 주체가 되는 국가전체사에서 그동안 소외되고 억압된 주체들의 목소리를 복원함으로써 6.25에 대한 역사적 경험의 다성성(multivocality), 역사에서의 주체적 다수성(multiple subjects)을 드러낸 것이다.

책은 모두 3부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처음 1부 4개의 장은 문제제기, 아래로부터의 역사쓰기인 대안적 역사쓰기의 이론적 배경,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기존의 역사적 담론들인 두 개의 진리체제(국가의 공식적 역사와 민중사가 대변하는 대항역사)에 대한 사학사적 접근과 문제점, 탈식민 역사쓰기로서의 민중사를 넘어선 새로운 탈식민 역사를 위한 역사인류학적 접근의 유용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중에서 그는 두 진리체제가 낳은 담론적 획일화 속에서 실제적인 지방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며 지방민의 사적인 기억을 위한 장소, 사적인 삶의 경험을 중시할 것을 주장한다.

또 필자는 1980년대 민중사는 충분히 민중적이지 않았음을 지적하면서, 민중의 다양하고 개별적인 목소리, 역동적 삶의 과정을 재현시킬 수 있는 방법론과 이론이 필요함을 역설하고 있으며 그 대안으로 포스트모던 역사학, 미시사, 일상사, 신문화사, 역사인류학적 접근방식 등 '아래로부터의 역사'쓰기를 열린 마음을 가지고 실험해보자고 제의하고 있다.

사실 학문적 관심이 아니라면 일반인들은 1부를 그냥 건너뛰어도 좋다. 하지만 2부를 심도있게 읽고자한다면 그냥 지나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상의 사학사적 검토 이후 윤택림은 2부 4개의 장에서 앞서 언급한 충남 예산군의 한 빨갱이 마을인 시양리의 근현대사 경험을 깊숙이 추적하고 있다. 여기에서 그는 마을 사람들의 구술사를 비롯하여 현지조사, 심층면접 등을 활용하고 생애사, 가족사 및 민속자료, 자연경관 등을 사적 자료로서 인정하고 수집하고 연구함으로써 그 지방의 총체성을 밝히는 연구를 지향하고 있다. 그리하여 구체적인 서술을 통해 6.25전쟁과 관련된 지방민들의 잃어버린, 침묵된, 그래서 개인들의 사적 기억 속에서 맴도는 역사적 경험을 생생하게 보여주려는 것이다.

대략의 내용은 예산군의 근현대사를 일제시기, 해방정국, 한국전쟁, 전후시기별로 나누어 살피고 있으나 결국 중심적인 결절점은 한국전쟁으로 모아지고 있다. 시양리의 경우 이를 가장 결정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로 필자에 의해 선정된 마을이다. 일제시기의 경우는 우리들의 일반적인 인식과 마찬가지로 마을사람들의 구술을 통해서도 역시 '가장 비참한 시기'로 기억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해방 이후에는 시양리내 감골과 밤골에서 나타난 정치적, 이데올로기적 대립을 설명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일제시기 마을의 정치적 지도자의 한 명이었던 강형준이 출옥 후 밤골 구장으로 있으면서 일제 말기 자신과 갈등관계에 있는 마을사람들을 징용 보낸 건을 둘러싼 마을 내의 불화이다. 이 사례를 통해 필자는 이데올로기가 밤골의 정치적 분리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 이미 있었던 정치적 분리가 이데올로기의 탈을 쓴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

즉 저자는 김성준의 밤골의 정치적 분열에 대한 설명을 말하면서 그에 동조하고 있다. 김성준의 설명은 밤골에서 대립한 두 그룹은 일본의 제국주의 전쟁에서 징용되었다 돌아온 사람들과 마을사람들을 징용 보낸 사람들, 즉 구장인 강형준과 그의 추종자들로 나누어져 있었고, 이러한 갈등은 개인적, 감정적 적대감에서 왔다는 것이었다.

요컨대 밤골에서는 해방 전부터 생긴 개인간의 정치적 갈등(개인적인 불화, 감정적 갈등)이 해방이 되면서 이데올로기적 대립의 옷을 입게 되었고, 그 결과 상대적으로 감골에 비해 밤골이 6·25와중에서 좌·우 양쪽 모두 피해가 컸다는 주장이었다.

또 일제시기부터 시양리의 주요 정치적 지도자들이었던 유찬길(1906∼1950), 김영찬(1907∼), 강형준(1910∼)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어서 기존의 민중사가 발하는 계급에 의한 갈등이라는 도식이 시양리 마을의 경우에는 맞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덧붙여 밤골의 오덕환의 경우 예산읍에서는 좌익으로 간주되고 시양리에서는 우익으로 간주된 것처럼 이 시기의 좌우구별은 무척이나 혼란스러웠음을 보여주고 있다.

결론으로 필자는 6·25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해석은 자족지난(自族之亂)으로 북한 사람들과의 전쟁이 아니라 마을사람들 간의 전쟁이었다는 것으로 전쟁의 성격을 종결짓고 있다.

해방 후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을 둘러싼 일련의 정치적 사건을 겪은 후, 그 양상은 서로 달랐지만 감골과 밤골에서의 정치적 분열은 한마디로 같은 마을 내에서 이데올로기라는 가면하에 치러진 마을사람들 간의 개인적, 감정적, 정치적 주도권 싸움이었다는 것이다.

"학살과 공포를 가져온 것은 바로 지방 좌익과 우익이었고 시양리에서의 6·25는 계급이 갈등의 주요 변수가 아니라 일제시기부터 쌓아온 주요 정치적 지도자들의 개인적인 카리스마와 마을 내에서의 개인적 불화와 감정적 대립이 오히려 가장 강력하게 작동한 갈등 변수였다. 그래서 시양리에서의 이데올로기는 마을사람들 간의 개인적 싸움, 가족간의 불화, 정치적 경쟁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수사적, 상징적 장치였다. 시양리 사람들은 6·25를 계급투쟁이 아니라 개인적 불화와 카리스마로 이해하고 있다는 것"이 그 핵심적 요약이다.

이는 마치 황석영의 소설 <손님>의 내용과 맥이 닿아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하지만 필자도 말하고 있듯이 이는 어디까지나 밤골에서 강형준과 관련된 해방 초기의 일시적 대립상만을 예로들뿐 이 사건을 억지로 전쟁시까지 이어 붙이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으며, 특히 토지분배와 국가건설과 관련된 부분은 마치 대립과 갈등이 전무한 것인양 서술한 부분은 쉽게 납득할 수는 없는 점이라고 지적할 수 있다.

다음 7장에서는 시양리 감골의 정치적 지도자였던 유찬길의 가족사를 재현함으로써 일제 식민지배와 한국전쟁이 낳은 분단의 현실이 어떻게 남은 가족들의 삶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지를 유찬길의 셋째아들인 유근찬(1935년생)과 6촌 동생인 유찬호(1922년생)의 인터뷰를 통해 잘 드러내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전후 빨갱이 가족, 용공 가족으로 낙인찍혀 수많은 차별과 억압을 받으며 숨죽이며 살아야만 했던 유가족들의 삶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윤택림의 책에서 무엇보다도 돋보이는 장은 어디까지나 8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장에서 저자는 여성의 특수한 경험에서 나오는 역사의식 내지 역사해석을 대하여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논하는 여성주의 역사(feminist history) 서술을 시도하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는 시양리의 좌익지도자 아내들의 구술생애사에서 드러난 한국전쟁의 의미를 분석한 결과 이들이 대부분 아내보다는 어머니로서의 성 정체성을 가지고 있으며 자식 중심의 생애사, 모중심 가족의 사례를 보여주고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또 빨갱이 가족이라는 오명을 피하기 위해 전후 반공체제에 적응하고 순응하는 삶을 살았음을 밝혔다. 이들에게 한국전쟁은 기존 가족의 해체와 새로운 가족의 형성, 계층적 하락을 의미했다고 한다.

즉 한국전쟁은 그들의 삶에 있어서 극단적인 가족의 해체와 재형성을 경험한 시기였으며 이후의 삶은 좌익인 남편과 관계된 모든 과거는 묻어버리고 오직 생존과 미래의 삶을 향한 것으로만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전쟁 경험은 전후 남한사회의 이데올로기적 획일화가 강요한 반쪽의 기억이며 동시에 현재 억압되고 금지된 기억들, 삶의 경험이 어떻게 침묵되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이며, 그러한 침묵은 곧 현실에 대한 순응을 뜻하며, 현실에 대한 순응은 곧 자식의 미래, 가족의 미래를 보장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기도" 했다.

요컨대 이들 여성의 한국 전쟁 경험은 자신의 가족의 해체와 계층적 하락을 가져온 기억하고 싶지 않은, 남편 잘못 만나 고생한, 지우고 싶은 과거이지만, 이들을 여성가장으로써 자립적인 생계부양자로서 적극적인 삶을 살게 만든 결정적인 계기였다고 필자는 정리하고 있다.

9장은 필자가 1996년 10월에 다시 방문한 시양리에 대한 감상을 보여주고 있다.

지난 7년 동안의 변화를 그는 1) 인구의 감소 및 노령화, 2) 생활수준의 향상과 소비 증가, 3) 변화의 장애물로 나누어 고찰하고 있다. 두 번째와 관련하여 필자는 시양리의 생활향상은 TV로 말미암은 소비 증가와 함께 사실상 농가부채가 오히려 늘어가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 세 번째는 예산군, 예산읍이 전형적인 농촌 지역이라는 지방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고, 예산읍이 전원 도시로 계획됨에 따라 공장설립을 통한 고용창출과 소득증대로 인한 경제적 부의 창출이라는 지역민의 바람과는 동떨어져 가고 있는 실정을 말하고 있다.

덧붙여 '잘살아보세'라는 경제제일주의 이데올로기, 자본주의적 구호를 내면화하고 있는 시양리민의 심성, 하지만 도시 중산층과의 비교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과 정부시책에 대한 불만은 결국 농촌의 미래가 없다는 것으로 귀결되고 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이상의 시양리 마을사람들의 역사적 경험은 그들의 주관적 삶의 경험이지만, 한국 근현대사의 구조적 변화와 지배적인 사회적 담론과 무관하지 않음을, 곧 구조내 행위로 위치 지을 수밖에 없음을 필자는 적절히 지적하고 있다.

마지막 10장은 내부인 혹은 외부인으로서의 토착인류학자(native anthropologist)라는 정체성의 문제와 시양리를 현지 조사하게 된 재미있는 뒷이야기, 1996년의 재방문시의 저자가 느꼈던 마을 사람들에 대한 강한 책임감과 어쩔 수 없는 외부인으로서의 무력감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결국 윤택림의 주장은 대안적인 역사쓰기로써 시도는 일단 높이 살 필요는 있다. 그럼에도 그의 이러한 시도는 우선 10여년 전의 연구였다는 점에서 시기상으로 다소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특히 문제되는 것은 한국전쟁이 자족지난(自族之亂), 즉 같은 마을 내에서 이데올로기라는 가면하에 치러진 마을사람들 간의 개인적, 감정적, 정치적 주도권 싸움이었다는 그의 주장은 한 마을단위에 매몰된 현지민들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역사인식이며 그 싸움이 단순히 어떠한 역사적 흐름과 목적 없이 진행된 것이라고는 보기 힘들다는 점에서 역사인류학적 연구가 과연 현재의 역사학에 어느 정도 도움을 줄 수 있는가이다.

다시 말해 '아래로부터의 역사'가 지배자나 엘리트의 관점에서 역사를 파악하는 '위로부터의 역사'와 다를 뿐만 아니라, 민중의 저항과 독자성만 강조하고 지배와 저항의 맞물림을 간과하는 '아래의 역사'와도 구별되는 지점을 보다 잘 포착하기 위해서는 좀더 풍부한 사례연구와 재이론화가 시도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다만 위와 아래를 두루 조망하는 역사로 윤택림이 8장에서 보여준 여성의 역사인식, 역사해석은 앞으로의 한국전쟁연구는 물론 일반적인 역사 연구에 유용한 사례였음을 부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손님

황석영 지음, 창비(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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