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 약사
1919년 3·1운동은 실패한 것이 아니라, 성공한 민주 혁명이었다. 3·1운동에서 독립을 선언하였으므로 그 때 마땅히 정부를 세워야 했다.
3·1운동이 일어난 지 한 달 전후로 상해에 임시정부가 세워지는 등, 국내외에 여러 개의 임시정부가 태동하였다.
국외의 임시정부로는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와 러시아령의 대한국민 의회정부가 있었고, 국내에는 한성임시정부, 천도교 중심의 대한민간정부, 조선민국임시정부, 평안도의 신한민국임시정부 등이 있었다.
이들 중에서 상해임시정부, 러시아령의 대한국민 의회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는 실제적인 부서와 청사를 갖췄으나, 나머지 임시정부는 태동 단계에서 유산되고 말았다.
이들 세 임시정부는 모두 민간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매우 의욕적으로 출발하였으나, 임시정부를 뒷받침할 적당한 거점이 없으면 정부수립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일제의 세력이 국내는 물론이거니와 중국 동삼성이나 러시아령의 시베리아까지 뻗쳐 있었으므로, 영구적인 임시정부 수립이 상해 외에는 적당치 않았다. 그러므로 오직 상해 임시정부만이 비교적 안전한 지역으로 거점을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상해는 국제 교통의 요지이며, 각국의 조계지가 설정되어 국제 정세를 파악하기가 쉬워서 임시정부 수립지로 안성맞춤이었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신한청년당(1918년 11월 여운형·김철·선우혁 등 상해 거주 청년들이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하였음)의 초청으로 상해에 모인 독립운동가들이 1919년 4월 10일부터 11일까지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개최하고 임시헌법과 각료를 발표함으로써 성립되었다.
이후 동년 9월,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러시아령 대한민국의회정부, 서울의 한성임시정부와 통합하여 우리 민족 단일의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정부로서, 성립 이후부터 조국이 광복될 때까지 약 30년간 독립운동의 최고의 지휘부요, 우리민족 최고의 대표기관이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내정, 외교, 군사, 재정 등 각 방면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조국 광복 쟁취를 위하여 노력하였다.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에 국내외 동포 사회를 통할하기 위한 연락기관으로 교통국을, 지방행정기구로서 국내에 연통부를, 국외에 거류민단을 설치하였다.
교통국은 통신연락기관으로서, 중국 안동에 지국을 설치하고 국내외의 연락을 꾀하였으며, 국내 지방행정조직으로 연통부를 설치하고 서울에 총판(總辦)을 각 도, 군, 면에 독판(督辦), 군감(郡監), 면장을 두어 임시정부의 법령, 공문 전달, 독립운동 지휘, 애국금 모집 등의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리고 독립전쟁의 효율적인 수행을 위하여 군사 활동에 관한 규정을 마련하고 임시육군무관학교, 비행사양성소, 간호학교 등을 설치하여 군사 양성에 노력하였다. 또 동삼성의 독립군 부대를 임시정부 산하로 개편하였으며, 임시정부의 직할부대로서 1920년에는 대한광복군총영을, 1923년에는 육군주만참의부를 조직하는 등 무장독립전쟁을 수행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수립 초기부터 정부 수립을 각국에 통보하는 한편, 정부 차원에서 주요 지역에 외교위원부를 두고, 외교 위원을 파견하는 등 적극적이고 체계적인 외교 활동을 하였다.
초기에는 외무부, 구미위원부, 파리위원부 등을 중심으로 각종 국제회의에서 한국 독립의 당위성을 주장하였다. 또한 임시정부는 중국, 미국 등 열강과 각국의 언론계, 정계 등 민간 지도자를 상대로 민간 외교 활동도 전개하였다.
그러나 임시정부는 1923년 상해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를 고비로 다소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 원인은 일제의 파괴공작과 재정난, 그리고 임정 내부의 분규였다. 이러한 어려운 여건의 임시정부에 활력을 준 건은 김구·이동녕 선생이 주도하고 이봉창·윤봉길 등이 활약한 한인애국단의 활동이었다.
이 분들의 의거로 임시정부는 비록 상해를 떠나 항주, 가흥, 진강 등 중국내 각지를 전전하게 되었으나, 국제사회에 제국주의에 대한 관심을 불러 일으켰으며, 동포들의 관심을 임시정부에 집중시킴으로써 애국 성금이 답지하는 등 활력을 되찾을 수 있었다.
1940년 중경으로 이동한 임시정부는 한국 광복군을 창설하는 한편 전쟁수행과 광복 후 조국 재건을 위한 체제를 정비하였다.
임시정부는 1940년 9월 17일 연합국의 일원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기 위하여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창설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연합국의 일원으로 대일 전쟁에 참전하였다.
또한 임시정부는 1941년 조국 재건의 기본 이념과 정책을 담은 건국강령을 발표하였으며, 1942년에는 이념과 정당을 초월한 통합 임시의정원을 구성하고, 1944년 제3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헌법을 개정하여 광복된 조국 헌법의 기초를 닦았다.
1945년 8월 15일 일제의 항복으로 조국이 해방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해 11월과 12월, 27년 여의 영광된 독립운동의 임무를 마치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역사에 가설은 무의미할지 모르지만, 만일 일본의 항복이 조금 늦어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국내에 진격하여 일본군으로부터 항복을 받았더라면 우리의 역사도 달라졌을 것이다. <백범일지>에서 김구 주석은 그때의 안타까움을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천신만고로 수년간 애를 써서 참전 준비를 한 것도 다 허사로 돌아가 버렸구나.
서안과 부양에서 훈련받은 우리 청년들에게 각종 비밀무기를 주어 중국 산동에서 미국 잠수함에 태워 본국으로 보내서 국내의 요소를 파괴하고 점령한 후, 미국 비행기로 무기를 운반할 계획까지 미국 육군성과 다 약속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 국내 진격작전을 한번 해보지도 못하고 왜적이 항복했으니, 진실로 전공(前功)이 가석하거니와, 그보다도 걱정이 되는 것은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기 때문에 앞으로 국제간에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것이다.“
역사는 김구 선생의 예언대로 흘러갔다. 광복 후 임정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고, 조국은 강대국의 이해에 따라 38도선으로 분단되었다. 나라의 힘이 약한 백성들이 겪어야 하는 역사의 시련이라기에는 그 고통이 너무나 크다.
한 세기가 바뀌었어도 끝나지 않은 우리 겨레의 아픔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