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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수교 앞, 천인국 노랗게 이열 종대로 피어 옛 기억 아슴푸레하다
맥수교 앞, 천인국 노랗게 이열 종대로 피어 옛 기억 아슴푸레하다 ⓒ 최성수
주말, 고향집을 찾는 날이면 나는 어김없이 '맥수교'를 건너게 된다. 고향집이 있는 보리소골을 들어가기 위해서 건너야 하는 다리가 바로 맥수교이기 때문이다.

맥수교. 보리 맥(麥)에 이삭 수(穗), 보리 이삭 다리라는 말이다. 보리 이삭 다리라니, 시멘트로 만든 다리와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름이다. 하지만 다리 건너의 골짜기가 보리소골이라는 것을 알고 나면, 그 이름의 뜻이 보리소골로 들어가는 다리라는 말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보리소골이 바로 보리 이삭이 패는 골짜기라는 뜻이니, 그곳으로 가는 다리 이름이 맥수교인 것은 당연지사다. 아니, 한자말보다는 '보리 이삭 다리'가 더 친근감이 가기까지 한다.

다리는 다만 하나의 경계이고 개울을 건너기 위한 수단일 뿐이지만, 내게는 심정적으로 다른 상징물이기도 하다. 맥수교 이전의 땅과 맥수교를 건넌 뒤의 땅은 전혀 다른 곳으로 느껴진다. 맥수교를 건너면서 나는 비로소, '아, 정말 고향에 돌아왔구나!'하는 느낌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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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고향을 떠나 서울로 유학(?)을 떠나던 초등학교 무렵만 해도, 이 개울에는 다리가 없었다. 아니, 있기는 있었다. 기다란 소나무를 두어 그루 베어다 엮어 만든 나무 다리가 운치 있게 놓여 있었다.

그 다리는 여름 한철 홍수로 떠내려가기 일쑤였는데, 한창 농사로 바쁜 시절이라 어른들은 다리를 다시 놓을 틈을 마련할 수 없었는지, 여름을 지나면서부터는 다리 없는 개울이 되고 말았다.

다시 다리를 놓는 것은 추석 무렵이었는데, 그렇게 다시 놓은 다리도 늦여름에서 초가을에 찾아오는 태풍에 밀려 가뭇없이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 겨우내 나무 다리를 대신하는 징검다리가 놓이곤 했다.

일찍 추위가 찾아오는 강원도 내륙에서, 그 추위를 견뎌내며 새로 나무를 해다 다리를 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서였을 것이다. 또 우기도 아니어서 개울물이 갑자기 불어날 일도 없으니 징검다리만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맥수교, 징검다리는 사라지고 시멘트 다리로 바뀐 모습
맥수교, 징검다리는 사라지고 시멘트 다리로 바뀐 모습 ⓒ 최성수
어른들은 그 징검다리를 껑충껑충 건너다녔지만, 우리 같은 아이들이 건너기에는 아무리 물이 적은 가을과 겨울이라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겨울 방학이 시작되기 전까지, 아침이면 신발을 벗어들고 개울물로 들어서는 아이들이 꽤 많았다. 물론 고학년들은 징검다리를 휙휙 건너갔지만, 아직 저학년인 아이들은 괜히 잘못 건너다가 신발과 바지를 적시는 것보다는 차라리 맨발로 물 속을 건너는 것이 더 나았다.

하지만, 그 물은 얼마나 찼던지. 개울을 건너고 나면 발이 바알갛게 부풀어 올랐고, 살을 에일 듯이 찬 느낌이 온 몸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기도 했다.

나는 지금도 그 개울을 지날 때면, 늘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유난히 작은 체구에 몸피도 가늘었던 어머니. 언제나 무거운 짐을 머리에 이고 다녀서, 말년에는 정수리 부분의 머리가 다 닳아 없어지셨던 어머니. 그러나 마음만은 누구보다도 크고 넓으셨던 어머니.

아버지는 무뚝뚝한 분이지만, 지금도 가끔 이런 말씀을 하신다.

"네 엄마는 부처님 같은 사람이었어. 집안 사람들 다 거두어주면서도 한 마디 내색조차 하지 않았지."

나는 그런 어머니에 대한 기억 중에서 지금도 선명한 것으로 개울을 떠올린다. 지금은 맥수교라는 시멘트 다리가 놓여 있는 그 개울이다.

맥수교 아래, 물 흐르는 곳이 징검다리가 있던 곳. 물은 줄고, 개울은 넓어졌다
맥수교 아래, 물 흐르는 곳이 징검다리가 있던 곳. 물은 줄고, 개울은 넓어졌다 ⓒ 최성수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간 것은 여섯 살 때였는데, 남보다 일찍 입학을 하게 된 것은 나와 함께 놀던 친구들이 그 해에 다 학교에 입학해 버렸기 때문이다. 같이 놀 친구 한 명도 없는 삼월 초의 적막함은 나를 견딜 수 없게 했고, 나는 마당에 뒹굴며 학교에 가겠다고 아버지를 졸랐다.

결국 아버지는 나를 학교에 데리고 가 입학을 시켜주었다. 다른 친구들보다 키도 훨씬 작았고, 몸도 가늘었던 나는 조회시간이면 늘 맨 앞에서 눈을 찌푸리며 햇살을 받고 서 있곤 했다.

위로 딸 셋을 줄줄이 낳고, 늦게 나를 낳은 어머니에게 나는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조심스럽고 귀한 아들이었다. 지금이야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어머니는 살아 계실 때 때때로 "너를 낳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이 집안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말을 하곤 하셨다. 그런 어머니에게 여섯 살의 일학년인 나는 얼마나 어린 존재였겠는가.

어머니는 다리가 떠내려가고 징검다리가 놓인 날부터 방학을 할 때까지, 아침이면 언제나 나를 데리고 개울로 나서곤 하셨다.

징검다리 앞에 이르면 어머니는 내게 등을 돌려 대셨고, 나는 으레 어머니의 등에 업혀 개울을 건넜다. 그때 어머니의 등은 내게는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아늑한 곳이었다. 어머니의 등에서 나던 '엄마 냄새'를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런데 개울가에는 나만이 아니라 학교로 가는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었다. 그러니 어머니는 달랑 당신의 아들만 업어 건네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결국은 징검다리를 건널 수 없는 저학년 아이들은 모두 우리 어머니의 등에 업혀 개울을 건넜고, 어머니는 날마다 열 차례가 넘도록 맨발로 개울을 왕복하셔야 했다.

나는 철없던 아이라, 개울을 건너고 나서, 다른 친구들을 우리 어머니 등에 업혀 건너올 때까지 기다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친구들과 재잘거리며 신작로를 따라 학교로 가버렸지만, 그런 나를 하염없이 바라보셨을 어머니 마음은 어떠셨을까?

그렇게 겨울 방학이 될 때까지 어머니의 개울 건네주기는 계속 이어졌다. 겨울 방학이 되면 어머니는 비로소 개울 건네주는 일에서 해방이 되셨는데, 그때쯤 되면 이미 어머니의 발은 날마다 개울 물에서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서 동상에 걸려 있곤 했다.

내가 초등학교 4학년을 마치고, 누나와 함께 서울로 유학을 떠난 후, 어머니는 아침이면 이 개울가에 나와서 개울 건너를 바라보며 하염없이 나를 떠올리며 눈물을 짓곤 하셨다고 한다.

맥수교 건너 보리소골 초입의 귀룽나무
맥수교 건너 보리소골 초입의 귀룽나무 ⓒ 최성수
'눈물로 기도하는 어머니가 계신 한, 자식은 결코 잘못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아마도 내가 지금 이 모양으로라도 세상에 발 딛고 살아갈 수 있는 것은, 개울을 업어 건네주던 어머니의 사랑과 기도 때문일 것이다.

그 후에도 나는 어머니에게 결코 좋은 자식은 아니었다. 어머니 마음에 쏙 들게 공부를 잘 하는 아이도 아니었고, 날마다 만화나 좋아하고, 소설 책 따위나 읽고, 대학도 제때 들어가지 못하고 재수까지 해야 하는, 그래서 어머니 속을 많이 썩혀드린 자식이었다.

대학에 들어가서는 데모 때문에 어머니 마음을 상하게 했고, 선생이 되고 나서는 전교조 관련으로 해직이 되어 또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렸다.

돌아보면 나는 단 하나도 어머니의 기쁨이지 못한 자식이었다. 그래도 어머니에게 나는 세상에서 가장 귀한 자식이었음에는 틀림없다. 내가 복직을 하고, 늦둥이 둘째까지 낳게 되자, 어머니는 평생 가장 환한 웃음을 지으시며 기뻐하셨으니까 말이다. 그 웃음 속에는 옛날 어머니가 등을 내밀어 나를 업어 건네주던 때의, 세상에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엄마 냄새가 담겨 있었다.

이제 오랜 세월이 흘렀다. 어머니가 이승을 떠나 다른 세상을 향해 총총 가버리신 지도 칠 년이 넘었다. 처음에는 어머니 안 계신 집안에서 어떻게 살까 더없이 쓸쓸했던 나는, 요즘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지 않는 때가 더 많아졌다. 그만큼 세월과 세상에 길들여진 탓일까?

그래도 주말, 고향집을 찾아가는 길에 맥수교 앞에 이르면 나는 그 옛날 어머니의 등에 업혀 맡던 '엄마 냄새'를 떠올린다. 그러면 내 마음 속에 어머니의 작고 여린 모습이 고스란히 되살아난다.

요즘 맥수교 앞에는 천인국(天人菊)이 이열 종대로 노랗게 피어 있다. 다리 건너 귀룽나무도 무성하게 잎을 드리우고, 바람결에 몸을 흔들고 있다.

그 천인국의 길을 지나, 귀룽나무 아래를 거쳐 가면, 보리소골이다. 그리고 보리소골은 어머니가 계신 곳이고, 어머니에 대한 내 기억이 살아있는 곳이다.

어머니의 얼굴같이 밝고 환한 천인국과 어머니를 기억하는 내 마음이 점점이 박힌 것 같은 망초꽃이 하염없이 피어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그 길은, 영원한 내 마음의 길이기도 하다.

전에는 제법 큰 물이 흘렀지만, 세월이 그 물을 다 앗아가 버렸을까? 비가 오지 않으면 건천이기 일쑤인 맥수교 아래 개울물.
전에는 제법 큰 물이 흘렀지만, 세월이 그 물을 다 앗아가 버렸을까? 비가 오지 않으면 건천이기 일쑤인 맥수교 아래 개울물. ⓒ 최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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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 <장다리꽃같은 우리 아이들>, <작은 바람 하나로 시작된 우리 랑은>, <천년 전 같은 하루>, <꽃,꽃잎>, <물골, 그 집>, <람풍>등의 시집과 <비에 젖은 종이 비행기>, <꽃비> , <무지개 너머 1,230마일> 등의 소설, 여행기 <구름의 성, 운남>, <일생에 한 번은 몽골을 만나라> 등의 책을 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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