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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하이 중심 황푸〔黃浦〕공원 일대의 번화가
상하이 중심 황푸〔黃浦〕공원 일대의 번화가 ⓒ 박도
황푸공원

우리 일행은 임시정부 청사를 나온 후, 곧장 상하이〔上海〕시가지 관광에 나섰다. 상하이는 양쯔강〔揚子江〕하류 황푸(黃浦)강과 우쑹(吳松)강 언덕에 자리잡은 인구 일 천만이 넘는 중국 최대의 도시다.

오늘의 상하이는 ‘중국 속의 세계’라 할 만큼 국제도시로 탈바꿈했지만, 지난날 상하이는 중국 동해안의 어업과 제염업이 성행한 어촌이었다.

지금도 비행기에서 내려다 보면 상하이 교외의 바닷가에 염전이 여러 곳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런 자그마한 어촌 상하이가 비린내와 짠맛을 씻고 거대한 국제도시가 된 것은, 중국으로서는 가장 더럽고 치욕적인 아편전쟁의 결과였다.

청 나라도 우리나라 조선 말기처럼 서구 열강이 침략하는데도 중화사상에 도취된 채, 서양의 거센 근대화 바람에 전혀 무감각하게 지냈다.

일찍이 산업혁명을 일으켜 해상 왕국이 된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내세워 중국과 교역을 했다. 영국은 중국에서 생사·도자기·차 따위를 수입하고, 모직물과 인도의 광산물·상아·목재·면포 따위를 수출했으나, 좀처럼 무역 불균형이 해소되지 않아 고민했다.

영국은 날로 늘어나는 무역 불균형을 깨뜨릴 새로운 상품 개발에 고심한 결과, 식민지 인도에서 생산되는 아편을 몰래 중국에다 수출하였다. 아편의 피해는 들판의 불길처럼 번져서 참다 못한 청 정부는 임칙서(林則徐)를 내세워 아편을 몰수하고 영국 상선에 불을 질렀다.

이로써 벌어진 아편전쟁은 중국의 참패로 끝나 1842년 남경의 양쯔강 위에 정박 중인 영국 군함 콘 윌리스 호에서 ‘난징〔南京〕조약’을 맺었다. 그 강화조약에 따라 청은 영국에 홍콩을 분할 양도하고, 상하이를 비롯한 5개 항구를 개항하였다.

영국에 이어 프랑스, 미국도 각각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상하이 곳곳에는 열강들의 조계지가 설정되었다. 그 결과 상하이는 이리떼에게 뜯긴 멧돼지 꼴로 전락했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상하이는 역설적으로 세계적인 무역항으로 발전했다.

우리 일행은 상하이에서 가장 중심가인 황푸〔黃浦〕공원에서 발길을 멈췄다. 이곳은 상하이 시내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지만, 아편전쟁 후 영국의 조차지로써 지난 세기에는 열강들이 군함을 앞세워 중국대륙을 유린하였던 비극의 역사 현장이다.

중국인들은 제 나라 땅이건만 이 일대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조차 없었다. 심지어 '중국인과 개는 출입을 금한다(狗與華人不進入內)'라는 팻말까지 붙어 있었던 수모의 거리였다.

황푸공원 일대는 1860년대 영국인이 만든 탓으로 건물들이 영국 냄새를 물씬 풍겼다. 마치 런던이나 파리에 온 기분을 느끼게 했다. 대로변의 큰 건물들은 영어 간판을 달았고 세계 여러 나라의 국기가 내걸려 있었다.

황푸강가에서 필자
황푸강가에서 필자 ⓒ 박도
황푸강은 강 이름 그대로 예로부터 누런 강물이었는데, 지금의 강은 누렇다 못해 시커먼 강물이 거세게 흘렀다. 상류에서 내려온 황톳물에다 상하이 일대 각종 공장의 폐수가 뒤섞여 황해 바다로 흘러들었다.

강 건너 편은 포동신구(浦東新區)로 현대식 초고층 빌딩이 즐비하게 솟고 있었다. 신흥 테크놀로지 단지인 양, 최첨단 공법의 건물이 눈을 부시게 했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큰 마음 먹고 정통 상하이 요리를 맛보고자 난징로〔南京路〕에 있는 고급 요리점에 갔다. 중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았다.

요리는 푸짐하고 보기에는 맛깔스러웠으나 내 입맛에는 영 맞지 않았다. 맛이 너무 강하고 느끼했다. 나와 이 선생은 주접을 떤 한국인이 되어 가방에서 고추장을 꺼내서야 접시의 밥을 비웠다.

식사 후, 상하이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난징로 일대를 거닐었다. 마치 서울의 명동을 걷는 기분이었다. 사람 차들의 홍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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