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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 노래를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렇게 감동적이거나 감성을 자극할 만한 가사도 아닌데 말이다. 멜로디가 쉽고 반복되어 외우기 쉬운 까닭일까? 아니면 메모리 용량이 충분하던 어린 시절에 입력된 때문일까? 무궁화가 우리나라 꽃이라는 가사가 범인(凡人)의 애국심을 건드린 것이 이유인지도….
아이를 낳은 후 아이를 재울 때마다 여러가지 노래를 불러주었다. 잊고 지낸 지 이십여년은 되었을 법한 노래들까지, 무덤의 낡은 관을 깨고 나오듯 내 입을 타고 줄줄 흘러나오는 것이 그저 신기하기만 해서, 꽤나 많은 노래를 불러제켰던 것 같다. 가끔 1절과 2절의 가사가 뒤죽박죽이 되는 경우도 있었지만 말이다. 이 노래도 아이를 위해 불러주던 나의 레퍼토리 중의 하나였다.
무궁화는 삼천리 우리 강산에만 피는 우리나라만의 꽃인 줄 알았던 시절도 있었는데…. 그리고 무궁화는 우리나라에만 피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 시절이었던 것 같은데…. 그런데 며칠 전, 나의 어린 시절의 '착각'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금요일은 공민관(公民館)의 수채화 교실에 가는 날이었다. 수업에 늦지 않기 위해 자전거를 타고 냅다 달리고 있는데, 20분 남짓한 거리를 달리며 무려 네 곳에서 무궁화를 만날 수 있었다. 첫번 것은 우리 집에서 50m도 안 되는, 어느 마당이 넓은 집의 담 안쪽에 심어진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너무 반갑고, 애틋한 마음까지 들어 몇 가지 각도로 사진기에 담았다.
늦겠다 싶어서 부지런히 페달을 밟고 있는데, 이번엔 높은 나무의 키만큼 쭈욱 자란 키다리 무궁화가 피어 있는 게 아닌가! 보통은 일본집들의 낮은 담 위로 꽃을 피우는 정도의 크기인데 이 녀석은 보통 것의 2배는 되어 보였다. 이 녀석도 신기하다 싶어 잽싸게 몇 컷을 찍었다.
시계는 보지 않았지만 벌써 수업이 시작되었을 시간이겠다 싶어 마음이 급해졌다. 이제 한눈 팔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을 하고 씽씽 달리고 있는데, '아 어쩌나!' 이번엔 화분에 심어 놓은 작은 무궁화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오늘은 참 이상한 날이라고 생각하며 또 자전거를 세우고 셔터를 눌렀다. 5월 말부터 매주 한번씩 이 길을 달렸지만 단 한차례도 눈에 띄지 않았었는데 오늘은 무엇에라도 홀린 듯 줄줄이 눈에 들어온다.
이미 수업에는 늦은 시간이었다. 기왕 늦은 것 천천히 가자고 마음먹고 있는데, '앗! 또…' 이번엔 흰색 무궁화다. 어떤 작은 절의 입구에 심어진 것이었다. 계속 찍었으니 이 녀석을 빼놓을 수도 없어서 또 몇 장을 찍었다. 이렇게 된 이상 무궁화에 관한 글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주먹을 불끈 쥐면서 말이다.
그런데 정작 한국에 있을 때는 별로 눈에 띄지 않던 무궁화가 어찌하여 이역 하늘 아래서 이렇듯 눈에 띄는 것인지 좀 정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궁화의 개화기가 7-10월이니 이맘때 눈에 띄는 것은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또한 자연과 풍토, 기온 등의 조건이 충족되는 곳이라면 그 어느 곳에서라도 자랄 수 있는 것이니 그 또한 별난 일도 아니다. 게다가 한국에서라면 무궁화가 피어 있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져 그리 눈길을 끌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더라도 왜 우리나라보다 일본에서 무궁화를 더 많이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지 의문이 가시질 않는다. 우리나라 꽃으로서 우리 민족과 함께 그동안의 영화와 시련을 겪어온 꽃이라면 우리나라의 방방곡곡 어디에나 지천으로 피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앞선다.
궁금한 김에 무궁화에 대한 자료를 찾아보니, 세계적으로 250여 종이 있고 한국에는 200여 종이 있다고 한다. 한국이 원산지인지는 불분명하나 중국 최고(最古)의 지리서인 '산해경(山海經)'과 중국 고전인 '고금기(古今記)'에 우리나라에 '훈화초' 혹은 '목근화'(무궁화)가 많았다는 기록이 나온다고 한다.
옛부터 한반도 전역에 널리 분포하였으며, 우리 민족의 오랜 사랑을 받아왔는데, 일제강점기엔 무궁화가 한국의 국화(國花)라는 이유로 일본인들이 전국적으로 뽑아버리는 일도 있었다고 한다.
무궁화는 7∼10월에 걸쳐 계속하여 화려한 꽃을 피우며, 홑꽃은 반드시 이른 새벽에 피고 저녁에는 시들어 날마다 신선한 새로운 꽃이 핀단다. 공해에 강하고, 번식이 쉬우며 관리도 어렵지 않다고 한다. 어릴 때 들은 얘기로는 우리나라 꽃인 무궁화는 병충해가 심해서 마치 우리 민족이 외세의 침입을 많이 받은 것과도 비슷하다고 들었는데, 어디서 그런 유언비어를 주워 듣게 된 것인지 모르겠다.
일본에선 무궁화를 '무쿠게'라고 부른다. 한국의 무궁화(無窮花)라는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설과 중국의 목근(木槿)이라는 이름에서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재배가 시작된 것은 에도시대(1615-1867)부터라고 하는데, 도시를 조금 벗어나면 정원에 심어 놓은 무궁화를 꽤 볼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키요사또(淸里)라는 마을에선 무궁화를 마을의 꽃으로 삼고 있다고도 한다.
무궁화는 정원수, 가로수, 생울타리, 화분심기 등 여러가지로 가꿀 수 있고, 기본적으로 튼튼한 나무인데다 여름철에 꽃을 피우는 꽃나무가 그리 흔치 않아 정원수로 많이 애용된다고 한다. 그러니 일본에서 무궁화를 본다는 게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는 일이다. 내가 일본에서 살고 있는 것과 다를 것이 없지 않는가!
그럼에도 여전히 이역 하늘 아래서 보는 무궁화가 제자리에 있지 못한 듯 낯설게 보이는 것은, 고국을 떠나 살고 있는 자신의 처지가 무궁화라는 상징에 오버랩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동포라도 만난 듯 반가웠던 것은 무궁화가 갖고 있는 그러한 상징의 힘일 것이다.
이역 하늘 아래서 꽃 피우는 무궁화 그대들, 세계의 어디에 뿌리를 내리고 살든, 타고난 튼튼한 그 기질 그대로 뿌리를 잘 내리어 아름다운 꽃을 끊임없이 피워내길 바랄 뿐이다. 한국땅에서만 살아야 우리나라 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 않겠나?
자연과 풍토가 다른 그 어느 곳에 살더라도 무궁화가 우리나라 꽃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다. 오히려 세계 곳곳으로 퍼뜨리고 무궁화가 한국의 상징이라는 사실을 알리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내가 한국의 상징이라고 떳떳하게 나설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지금, 세계 곳곳의 이역 하늘 아래엔 수많은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